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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보이 기사(newsboy.kr)/시사

추석 시장은 다시 돌아올까 - 개점 휴업, 재래시장 탐방기

추석 시장은 다시 돌아올까
신촌 - 동대문 - 남대문 시장 르포


 어릴적 어머니 따라 추석 맞이 시장에 따라가면 신묘한 분위기에 도취됐었다. 골목은 활기에 차 있었고 사람들은 북적였다. 옷, 장난감, 먹거리, 이상하게 생긴 생선과 연신 손님을 맞이하는 신발가게, 그리고 사방에서 울리는 소리.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교실에서 아이들이 재잘되는 것과 어른들의 것은 또 이렇게 다르구나 싶었다. 부산의 망미 시장, 수영 팔도시장...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동네 시장이었지만 마치 '시장도 추석빔을 차려입는구나' 싶을만치 달라 보였던 기억이다. 

바른생활 교과서에 '활기찬 시장'이라 묘사한 본문보다도 훨씬 그것을 실감케 했던 것들.

그 분위기를 한번 더 느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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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야시장의 공기는 추석 시즌에도 적막하다.  

추석 시장은 다시 돌아올까 - 신촌, 동대문, 남대문 시장 르포

6일 pm 7:00 신촌 - 이대

추석 연휴를 한 주 앞둔 주말. 신촌 - 이대 라인을 찾았다. 언제나처럼 붐비는 골목. 하지만 의류나 액세서리 상권은 특수철이라기엔 '그다지'다. 

신촌역 옆에 자리잡은 지도 벌써 2년째인 밀리오레 신촌점을 찾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쉴새없이 남녀가 오가기는 하는데... 모두 저 위 꼭대기까지 논스톱 행이다. 극장가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다.

3층 남성의류 매장으로 접어드니 누구 하나가 따라 붙는다. "필요한거 없냐"고 묻길래 조끼 상품을 문의했지만 영화 때문인지 '정우성 표 조끼' 뿐이라 고사.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넌지시 "대목인데 어째 허전하다"고 운을 띄웠다.

"추석 대목... 연휴가 연짱이잖아요. 여름 끝나고 얼마 안됐으니까."

한 층 더 올라가 잡화 매장을 거닐어 봤다. 한산하다. 한 점장에게 다가가 물으니 "추석 대목, 그런 거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달라지지 않을까 하며 첫 날 나들이를 마쳤다.


10일 pm 10:00 동대문 패션시티

90년대 초입의 3세대 물결, 1997년의 4세대 물결로 한국 패션의 성지로 각인된 동대문 패션상권. 연휴 돌입 사흘을 앞둔 밤, 여기에선 추석 냄새를 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었다. 먼저 찾은 곳은 3세대-3.5세대의 도매상권으로 구성된 동부 라인. 그러나 이 길목은 활기와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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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가 줄지어졌던 장관이야 실종된지 오래라지만 '추석 대목 반짝 재현'에 대한 기대도 무리였던 걸까.   
 


한때 동대문 시장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전국팔도 KTX 버스'는 이미 2, 3년전부터 실종된 광경. 그래도 "추석 초입인데 신기루처럼 등장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품었던게 사실. 하지만 플랫폼은 황량함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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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지방 보따리 상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플랫폼'은 이제 동대문 천일야화의 전설로만 남은걸까.   
 


디자이너클럽, 누죤, 유어스... 도매 패션타운의 신세대를 구축한 각지를 훑으며 상인들 표정을 살폈다. 어릴 적 동네 시장에서 접하던 그것들, 눈코 뜰새 없이 바빴던 옛 추억의 표정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혹 서부 라인의 소매시장은 좀 다르지 않을까 싶어 장소를 옮긴다. 지나치다 보니 그래도 구 동대문야구장의 허리춤에 형성된 노점상 코너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북적인다. 허나 그것도 잠깐.

두산타워, 밀리오레, 그리고 헬로APM... 4세대 물결의 트라이앵글은 11시를 넘긴 한창 때에도 평이한 수준이다. '언제나 불황'이라지만 이건 뭔가 이상하다. 각 상인들에게서 대목 실종의 원인을 들어봤다. "때가 너무 일러서", "철이 철이 아니라서", "휴가기간이 너무 짧아서" 등 여러가지 진단이 나온다.(11일자 관련기사 참조 http://www.newsboy.kr/news/articleView.html?idxno=4230)

헬로APM 4층 플로어. 에스컬레이터로 다음 층으로 향하는 일본 여성 고객들에게 넉살 좋은 남자 점원이 "오겡끼데스까!", "아이시떼루!"를 외치며 폭소케 한다. (그녀들은 웃으며 화답했지만 결국 발목 잡는데는 실패했다) 여기도 손님보다 상인들이 더 많은 상황.

"손님, 무진장 싸게 하나 드릴게. 동생이랑 밥을 못 먹어서 그래요."

"손님! 잠깐만 이리 와 봐. 그냥 손님 보는게 너무 반가워서 그래."

진부한 레퍼토리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빈 말이 아닌 듯 전해져 온다. "추석 대목 장사 잘 하세요"란 인사에 그들은 "아유, 대목? 올핸 없는거야"라며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4층의 남성전문매장 맨플레이의 김영근 씨는 "나도 이런 추석은 처음 본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을 상품을 진열해 놓고 손님들에게 제시하던 예년의 풍경이 올해는 모든 악조건의 조합으로 무산돼 버렸다고 진단한다.

"날씨가 더우니 긴 옷도 못 내놔요. 연휴는 또 너무 짧아요. 그리고 여름 끝나자 마자 빨리 찾아온 것도 문제고..." 


11일 pm 11:00 남대문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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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 바나나 우유 하나를 계산하다 "이 곳에서 가장 야시장이 크게 서는 길목이 어디냐" 물었다. 고참을 부르는 아르바이트생.

"그게... 요새는 남대문도 야시장이 그렇게 크게 서질 않아요. 그나마 이 앞에 메사나... 저기 아동복 거리가 번성한데... 역시 예전만 못하죠. 일단 이시간이면 이미 서기 시작했을텐데..."

"추석인데도요?"

"그렇죠 뭐."

큰 골목가는 불이 켜져 있지만 군데군데 연결된 길목은 어둠 속에 묻혀 여기저기 단절된 야시장. 술손님들의 노천 상가만 띄엄띄엄 사람 냄새가 풍길 뿐. 내일부터 본격적인 귀향길이 시작된다는 사실이 의심스럽다. 

남대문시장의 상징이자 추석선물품목의 주력인 아동복 시장골목은 그나마 야시장다운 분위기가 살아 있다. 그러나 각 매장 안을 들여다 보면 여기도 역시. '이게 정말 추석 시즌인가' 싶을 정도로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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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대문의 메카인 아동복 골목. 채 가시지 않은 여름 기운은 상인들에 있어 칼바람과 같다.  

"네, 천천히 보세요. 애가 몇 살?"

포키 아동복의 한 코너. 사람좋아보이는 아줌마가 네 눈길이 멎은 작은 청바지 하나를 꺼내 보여준다. 그 때 마침 찾아와 뭔가를 결산하는 총각. 펜으로 이것저것 적는 그에게 그녀가 '어디가 제일 많이 팔려?'라고 묻는다.

"이모네가 제일 많이 나갔어요."

그 말을 듣고선 "어우, 여기서 제일 많이 파셨네"라고 맞장구를 쳐 봤다. 난감한듯 웃어보이며 "아유, 아니야"라는 아줌마.

"많이 파세요"라고 지나치려다 "근데 지금이면 한창 북적여야 하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계속 더웠잖아요? 이제 좀 찬 바람 부니 장사 좀 되겠다 했는데... 갔던 여름이 다시 되돌아오는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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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대문 시장 각 길목은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였다.   


신촌, 동대문, 남대문 까지. 서울을 대표하는 그 어느 시장에서도 그리운 옛 활기는 찾을 길이 없었다.


12일 pm 3:00 신촌 밀리오레

마지막으로 지난 주 찾았던 신촌 밀리오레 점을 다시 방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6일, 11일에 이어 세번째. 늦은 시각 방문으로 두차례 헛걸음 했지만 이날은 드디어 내부 촬영 허가 표찰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상 추석이 시작되는 오늘은 그래도 전과 좀 다르겠지' 하며 각 매장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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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별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3층 매장은 들어설 때마다 환영인사를 받나 보다. "뭘 찾느냐"는 한 여성 직원에게 "오늘은 옷 말고 다른 걸 찾으러 왔다"고 웃어보이니 그제서야 "아아..." 한다.

"손님이 많아야 할 텐데... 한산해서 어쩌죠?"

그녀는 "아뇨, 애초 추석 끝나고 가을 시작되면 그 땐 잘 될 거예요. 그렇게 믿어요"라고 말했다. "정말 그래야죠."라며 화답해 봤지만 표정이 썩 밝아보이진 않는다.

5층으로 올라갔더니 첫 날 만났던 아저씨와 다시 조우한다. "그간 손님 좀 있었느냐"고 인사하니 씁쓸히 웃어보이기만 했다.

"그래도 추석 시즌인데..."

"추석대목은... 올해는 없어요."

"그간 동대문, 남대문 등 다 돌아다녀봤다"고 하자 그는 "여기뿐 아니라 다른데도 마찬가지 아니더냐"고 묻는다. 맞는 말이었다.

"저도 여기저기 매장을 두고 있는데... 서울에서 가장 큰 상권지대라 하면 어디어디겠습니까. 여기 신촌과 이대라인, 남대문하고 동대문 시장, 그리고 명동이잖아요? 그런 곳들이 이정도면 말 다했죠."

"사실 작년 추석땐 이정돈 아니었잖아요?"

"아 물론 지금과는 확실히 달랐죠. 올해 추석은 없는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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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촌 밀리오레 점은 아직 젊은 매장답게 디스플레이나 조명 연출 면에선 확실히 쾌적하다.   
 


타임아웃. 이젠 나도 고향집으로 향할 시간이다. 나름의 '보물찾기'였지만 빈손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랄까. '시장'은 있었지만 '추석시장'은 없었다. 명동 시장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이 그제서야 아쉬웠다. 혹 그곳엔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때늦은 후회감. 하지만 어쩜 이렇게 위안할 마지막 가능성으로 남겨둔 것이 나았을런지도 모른다.

어릴적 받아쓰던 교과서엔 '우리 나라는 참 살기 좋은 나라'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 근거로 제시된 것이 '청명한 4계절'과 더불어 '활기찬 삶의 현장'이다. 우리나라의 시장에 가보면 언제나 활기가 넘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함께 넘쳐난다는 설명은 분명 근사했다.

'꼬꼬마' 시절의 기자는 추석 귀향 전날, 이를 직접 확인했다. 별 거 아닌 듯 하지만 이는 분명 '살아있는 교육'의 한 장이었다. 다시 한번 체감하고 싶을 만큼 그리운 추억이기도 하다.

남대문시장에서 아동복 코너를 돌 때 뭔가 야릇한 기운을 느꼈다.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나도 준비해야 할 나이인가'란 자문을 수면 위에 띄운다. 나도 부모가 된다면, 내 아이에게 같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는 희망사항과 함께. 그 시절의 광경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은 왜 이리 조바심처럼 밀려드는 걸까.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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