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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 부산 야구소년, 임수혁 빈소에 마지막 인사가다

10년전 부산 야구소년, 임수혁 빈소에 마지막 인사가다
1999, 플레이오프최종전 동점투런, 야구팬은 당신 때문에 행복했네



임수혁 선수의 발인이 몇시간 뒤다. 이미 빈소엔 몽구 님도 다녀갔고 여러 저널리스트가 오가며 안타까움을 내어 봤지만, 그래도 나는 좀 더 각별한 마음으로 라이팅에 임하게 될 것 같다. '야구선수를 꿈꿨던 부산 친구...' 라면 조금은 이해가 가려나.

8일 저녁, 그가 누운 자리를 찾았다. 그를 사랑해온 팬들은 부산에서 그를 기다리지만, 그의 빈소는 서울에 차려졌다. 부산 팬들에겐 또 한번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저들을 대신하는 기분으로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강서에서 강동을 가로질러야 했지만 부산 팬들에 비하면 먼 거리가 아니다.

사실 난 '임수혁'이란 이름을 야구선수 중 첫째로 떠올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90년대의 한국 야구에 열광했던 뭇 소년으로서 그의 활약상과 롯데자이언츠의 존재는 '알 만큼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

거인 임수혁이 눈을 감았다. 잠들고 만 거인에 롯데 팬들이 이토록 각별한 감정을 내보이는 건 무엇 때문일까. 어떤 선수라도 경기 중 쓰러졌고 그렇게 10년간 식물인간으로 투병했다면 그럴 것이라고?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허나 임수혁이 야도 부산 팬들에 어떤 선물을 안겨다 줬는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그건 역시나, 부산 사람 내지 롯데 팬이 아니라면 쉽게 납득하지 못할 일이지.



임수혁 선수 이야기 전에, 좀 길긴 하지만 롯데에 대한 이야기부터 부연설명으로 넣어야 할 것 같다. 부산의 야구팬들이 롯데자이언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만년 꼴찌에도 국내서 두번째로 크다는 야구장을 만석으로 채워주는 그 극성스런 팬심 때문에 1등 팀이 부러워하고 갈 꼴찌팀이 롯데.

롯데는 삼성과 더불어 원년부터 지금까지, 팀명은 물론 스폰서 이름까지 한 글자도 바뀌지 않은 유이한 팀이다. 우승기를 수없이 흔들며 왕조를 건국한 해태와 현대도 팀을 다른 기업에 넘겼는데, 가을야구한 기억보다 8등한 기억이 더 짠한 롯데가 30년 가까운 프로야구 역사에서 계속 살아남은 거 보면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정말 미스터리다.

그렇다고 롯데가 흥행보증수표로 충만한 스타 군단이었느냐. 물론 많은 프랜차이즈 스타가 있었고 팬들에겐 한 선수 한 선수가 사랑스런 스타다. 그러나 전국구로 시대를 풍미한 스타를 찾아 타 팀과 비교하면 빈말로도 많다고는 할 수 없다. 전설로 기억되는 이름을 떠올린다면 맨먼저 꺼낼만한 선수가 최동원과 박동희 같은 당대의 대투수, 그리고 팔방미인 박정태와 대도 전준호, 그리고 자갈치포 김민호 정도? 마해영과 이종운, 주형광과 염종석은 그 재능에 비해 너무 짧았던 전성기와 불운으로 '비운의 스타'란 꼬릿말이 달리는게 아쉽기만 하다. 맞다, 장효조와 김시진 선수도 있었지. 그리고, 임수혁...

연패기록으로 팬들 속썩여, 스타 영입이 활발한 것도 아니야, 무려 8년간 가을야구를 못하는 긴 암흑기도 기록했어, 심지어 골퍼를 감독으로 영입했다는 웃지 못할 흑역사도 있어... 얼핏 보면 성적표나 외형에 있어 저만한 사랑을 받을 팀은 아니었다. 그럼 '꼴데' 소리를 들으면서도 만원열기로 충만했던 롯데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건 롯데가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스포츠 본연의 매력을 몸으로 보여주는 팀이어서였다.

내가 보건대 롯데의 르네상스기는 네 번으로 요약된다. 물론 마지막 네번째는 로이스터 감독체제인 지금이다.
우승했던 84년이 첫번째. 유두열의 3점홈런과 최동원의 무쇠팔은 한국시리즈 최고의 드라마였다. 두번째가 우승과 준우승을 한번씩 맛본 90년대 전반인데 '롯데시대' 중엔 가장 길었고 또 행복했던 때였다. 박동희 윤학길 염종석 트로이카와 박정태 이종운 김민호 전준호 등 롯데로선 가장 스타가 많았던 그 시기, 모두의 예상을 깨고 삼성 해태 빙그레를 연달아 잡는 파란을 일으켰다. 두번째의 극적 우승. 우승할 때는 언제나 한편의 영화처럼, 그것이 롯데였다.
그리고 준우승했던 99년이 세번째. 검은 용병 호세와 기론이 있었고 주형광과 마해영이 있었고 박정태가 건재했다. 그리고 임수혁... 임수혁이 특별한 것은 그가 바로 롯데의 드라마를 관통하는 선수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그에게 부산 야구팬으로서 감사하게 된 그 날 경기의 이야기를 하게 됐군.



1999년은 롯데 팬에게도, 한화 팬에게도 특별한 해였다. 난 부산에서 자란 야구팬이지만 이실직고하자면 가장 응원하는 '퍼스트'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화다. 그러나 '서브'가 롯데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내겐 정말 특별한 해였다.

롯데의 매력은 '야성'으로 뭉친 팀이라는 점. 그것은 1999년도 마찬가지였다. 이겨도 져도 언제나 화끈한 경기, 스타에 의존하지 않고 탄탄한 팀웍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응집력. 그 속엔 공통적으로 '파이팅'이 있었다. 악바리처럼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바로 팬들에 있어 '미워도 다시한번'을 연출케 하는 원동력이었다.

플레이오프에서 라이벌 삼성과 맞붙게 된 롯데. 최종전인 7차전은 84년도 한국시리즈7차전과 더불어 롯데의 가을야구 경기 중 최고의 명승부.

대구 원정경기였다. 2대0으로 지던 롯데는 6회 호세의 솔로홈런으로 추격한다. 그러나 이 때 그 유명한 이물질 투척 사건이 벌어지고 흥분한 호세는 방망이를 집어던지고 퇴장당한다. 그만 화가 난게 아니었다. 롯데 선수들 모두가 경기를 보이콧하려 했고 몇몇 선수는 호세와 마찬가지로 분노를 표출했다. 물론 이 경기를 보던 부산의 팬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대학생 새내기던 나는 아버지와 함께 TV로 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제 보니 사직야구장은 양반이네"하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해영은 시위라도 하듯 곧장 동점 솔로홈런을 터뜨렸다. 2대2. 경기는 미궁 속에 빠졌다.

8회가 되자 급격히 분위기가 삼성으로 넘어갔다. 김종훈, 이승엽이 연속으로 홈런을 터뜨리며 5대3으로 벌어진 것. 스코어보다 분위기가 냉각된 것이 더 쇼크였다. 그리고, 이 때 PSB(현재 KNN)방송은 정규방송 관계로 경기 중계를 중단하고 만다. 이어지는 프로그램은 순풍산부인과였다.
 
"에이 졌다, 졌어."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떳다. 난 가라앉지 않은 기분으로 드라마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믿기지 않는 속보 자막이 나왔다. '9회초, 5대5'라는 거였다.

"야 이걸 보여 줘야지!"

울 아버지 다시 나와 자리에 앉는다. 화면 속 화면엔 대타가 동점 투런 홈런을 날리는 장면이 리플레이되고 있었다. 그 대타가 임수혁이었다.

30여분의 시트콤이 끝나자 다시 연결되는 중계방송. 그렇게 경기는 연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경기 결말은 중요치 않다고 느껴졌다. 다 끝났다고 체념했던 경기가 다시 시작되는 그 마법이 전율처럼 흘렀다. 경기결과는 아시다시피 롯데의 한 점차 승리였다. 홈런만 5개가 터져나온 그 경기에서 임수혁은 최고의 히어로로 꼽을만 했다.

"임수혁이 누구냐?"

아버지가 물어왔다. 난 웃기만 했다. 그 경기에서 그가 스윙하자 마자 홈런을 직감하고 두 팔을 뻗는 모습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야구팬으로서 너무나도 소중한 기억을 선물받은 것이었다.




그것에 대한 작은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직접 대면한적 없는 그의 빈소를 찾은 나였다. 이미 그 자리엔 친정팀 롯데는 물론이요 팀을 넘어 각 구단의 동료들이 국화 화환을 두고 간 뒤였다. 지난 10년간 기다려준 팬클럽의 사람들도 보내왔다. 그들에게 이 곳은 여전히 그라운드의 연장선상, 2루에서 홈으로 돌아오는 그 길이었다. 그의 영정 좌우로 위치한 정운찬 국무총리와 김형오 국회의장 화환은 오히려 뜬금없게 느껴졌다. 

초대받지 않은 문상객이었기에 들어가 향불 하나 피워올리지 못하고 그저 바깥에서 물끄러미 그의 영정사진을 지켜만 봤다. 홈인 중인 것일까. 유니폼 차림으로 웃으며 달려오는 그의 모습. 그건 마치 10년간의 투병기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2루베이스에서 멈췄던 그가 세월을 거쳐 3루로, 또 홈플레이트로 들어오는 과정 말이다. 투병이란 이름으로 계속됐던 인생의 도전을 야구팬은 영정을 통해 지금도 이렇듯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