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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보이 기사(newsboy.kr)/시사

결핵, 그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지독한 아픔

결핵, 그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지독한 아픔


난 지금 실로 후회하고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동영상으로 찍어 보다 현장감 있게 캐치할 것을.

1일, 서울 프리마호텔에서 열렸던 2009 헬스 커뮤니케이션 세미나 중. 세션 2의 첫번째 연사로 나선 이는 맥캔헬스케어의 이진우 이사. 그는 "정부의 헬스커뮤니케이션 방향 및 사례"를 주제로 질병에 대한 정부의 대국민 홍보캠페인 사례와 현재를 엮어 이야기했다.



그의 프리젠테이션은 동영상을 활용, 여러가지 이야기를 흥미롭게 이끌어나갔다. 초반부는 금연과 절주 등의 캠페인 광고와 후일담, 앞으로 저출산과 질병 등 이슈를 낳고 있는 국민 건강과 의료 문제에 있어 정부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등이 내용으로 놓였다.

후반부는 보다 구체적인 각각의 중한 질병과 이에 경각심을 부르는 정부의 커뮤니케이션 사례, 현재의 모습이 나왔다. 여기엔 오랫동안 거론되어 오던 인류 최악의 병 에이즈, 그리고 현재 전세계를 광풍에 몰아넣은 신종인플루엔자가 포함돼 있었다. 아마, 이 곳을 찾은 이들이라면 거의가 이 두 질병에 초점을 맞췄을 것이다.

난 거꾸로 여기에 대해선 너무 많이 들었던 탓인지 그냥 무감하게 체크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챕터가 날 멈칫하게 했다.




결핵. "잊혀진 질병으로 인식되고 있음"이란 문구 그대로, 많은 이들이 결핵을 말하면 고개부터 갸웃하는 실상. 심지어 "우리나라에도 결핵이 있나"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흔히들, '후진국병'이라 부르며, 이미 한국에선 소멸한 듯 알고 있는 질병.

요즘 아이들도 그럴지 모르겠다. 내가 어릴적엔 학교에서 12월, 이즈음 해서 결핵씰을 판매했고, 우린 이것이 알지못할 그 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살리는 것이라 믿었다. 물론 부모님도 두말없이 천원짜리, 오백원짜리를 내어주시곤 했다. 정상대로라면, 난 그것으로 결핵에 대한 기억을 마무리했을지 모른다...

이진우 이사는 이 병의 중함을 피력한다.

"상황적으로 결핵은 다른 질병보다 심각하지만 지금은 잊혀지고 있죠."


잊혀진 병도, 사라진 병도 아니다. 그 무서움은 전해들은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이었다. 난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결핵환자를 취재했느냐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럴 수 밖에. 다름아닌 내가, 나 자신이 그 무서운 병에 걸렸던 사람 중 하나다.

3년전... 핫. 기가 막히군. 정말로 딱 3년전이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렇다. 날짜까지 딱 들어맞는다. 처음으로 내 몸이 심각하게 망가졌음을 진단받았던 그 판정일이, 이 날이었다. 희한하게도 지금 난 몸 상태가 대단히 안 좋은채 글을 쓰고 있는데, 이건 또 무슨 조화냐.

"심장이 두배로 커졌습니다. 폐도 커졌어요..."

한달이 넘게 감기몸살 비슷한 병세를 보이던 나, 그러나 홀로 살고 있어 옆에서 이를 간호할 식구 하나 없었다. 직장 사람? 훗, 중병 걸려 일 못한다고 하니 기가 차다는듯 웃어제끼던 사장 얼굴을 잊을 수 없지.

그간 아스피린에 광동탕만 약국에서 타다 먹다가 처음 찾아간 영등포병원에서 그 말 듣고선 적잖이 놀랐다. 엑스레이 사진에 붙은 내 심장은 마치 코끼리의 그것 같았다. 폐 역시 기형처럼 보였다. 끔찍한 기억이다.

국내에서 가장 심장을 잘 본다는 병원을 찾게 됐다. 그렇게 다음날 간 곳은 강북삼성병원. 난 심장과 폐 모두 잘못된 상황이라 순환기, 호흡기의 양쪽 의사를 모두 번갈아 만나야 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입원해야 한다. 그것도, 중환자실에 준하는 소위 '준중환자실'로 불리는 병실에 들어야 했다. 중환자실 다음으로 위급한 이들이 모인다고.

하지만 그 때만해도 난 내가 결핵일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폐보단 심장에 좀 더 신경이 쓰였고, 심장병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심장을 보는 의사와 폐를 보는 의사가 의견을 나눈 후. 내 전공의로 배정된 심장 쪽 의사가 전해온 소견은  이것. 세 가지 중 하나라는 거였다.

첫째, 암. 둘째, 바이러스성 급성 질환, 셋째, 결핵.

후보군이 셋으로 좁혀진 가운데 이 중 무엇이 진짜인지는 좀 더 두고보자는 것이었다.

암은 처음부터 가능성이 낮다고 했다. 하지만 솔직히 "아직 나이가 그러니 암은 아닐거다"란 소견은 신빙성보단 위로에 가깝게 전해졌다. 역시나 중한 병인 결핵의 경우는 폐가 먼저 잘못된 뒤 뭔가 그 이상현상이 심장으로 전이됐다는 이야기인데, 그 무서움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때 씰을 사면서 여실히 들었던 것이라 한숨 터지긴 매한가지였다.

사실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던건 바이러스성 질환이라는건데, 이건 증명이 어려웠다. 그저 시간을 두고 의사의 최종판단을 기다릴 수 밖에.

매일마다 몸 상태를 검진하니 특이한 상황이 벌어진다. 운동도 하지 못하는데 몸무게가 날마다 1kg이상 줄어드는 현상. 다이어트 중인 이라면 앞뒤 다 잘라먹고 저 이야기만 들었을때 눈을 빛낼법한 상황이다. 어느샌가 10kg 가까이 줄어있는 나를 봤다. 이건, 결핵의 증세. 그래도 설마 했다.

며칠 후 의사는 의견을 밝혔다. 역시나, 결핵이라는 거였다.

"선생님, 가능성이..."
"9할."

사실상의 확진. 결핵이 폐는 물론이요, 심장까지 건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몸소 깨달았다. 우리가 상상하던 것 이상의 무서움. 내가 말로만 듣던 그 결핵환자가 될 줄이야. 그리고 난 그때부터 곁에 오는 사람에게 이걸 말해줘야만 했다.

"전염병 아니예요."

'걱정말라'는 말이 담긴 그 말을 할 때마다 처량해지곤 했다.

그 날 이후로 결핵치료에 들어갔다. 매일마다 식사 후 세번씩 약을 먹는다. 어찌나 약이 많고 큰지 넘기기 어려웠다. 틈틈이 불려가 여러 검사를 받았다. 의사는 휠체어를 이용해 움직일 것을 지시했다. 잠도 편히 잘 수 없었다. 상체를 위로 향하게 하도록 침대를 조정했더니 꼬리뼈가 아파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며칠 후 혼자 거동해도 되고 침대를 제대로 눕혀도 된다고 이야기들었을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평소엔 당연한듯 느꼈던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행복인지를 깨닫는다.

그러나 치료는 더욱 고통스러워졌다. 가장 고비는 가슴에 튜브를 관통시켜 심장까지 닿게 한 후 그 안에 찼던 물을 빼어낼 때. 그 40여분간 나는 고문을 받는 듯한 격통을 감내해야 했다. 갈비뼈 아래를 뚫고 굵은 무언가가 생명과 가장 가깝다는 심장에 닿는 것, 그리고 뭔가가 뽑혀나온다는 것, 평소엔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장시간 이어졌다. 끝나고 죽은듯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나의 이동침대를 밀고 엘리베이터로 가던 어머니 심정도 편치 못했으리라.

의아할지 모른다. 결핵인데 왜 심장때문에 이같은 고통을 배로 받아야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의사 판정대로라면 결핵은 이렇듯 폐 뿐만 아니라 그 균이 심장까지 잠식해 영향을 미치고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버리는, 실로 무서운 전이성의 병이다. 나 역시 이때서야 처음 알았다. 보다 결핵의 문제점을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육신의 고통만이 전부가 아니다. 무시못할 치료비가 날아든다. 사진 찍는데만도 상당한 비용이 든다. 엑스레이야 별 문제 없지만 CT촬영, 초음파검사 등은 수십만원대의 비용이 청구됐다. 의료보험에 포함이 안되거나 혹은 지원이 되어도 워낙에 부담이 큰 검사 내지 치료가 이리저리 요구됐던 터라, 중간 청구서만 내 기억으로는 170만원이 넘게 산정됐던 걸로 기억한다. 이후 청구된 최종 청구서는 그 이상의 금액이었고, 이 외에도 그 때 그 때 자잘하게 나가는 청구내역이 따로 존재한 것으로 기억한다. 어디까지나, 십수일간의 입원치료 때에 한정한 이야기다.

퇴원 후에도 난 2주에 한번씩 병원을 들어야 했다. 약국에서 주기적으로 타 오는 약의 수량도 이걸 다 내가 먹어야 하나 겁날 정도였다.

그렇게 나는 6개월동안 결핵 약을 먹어야 했고 통원치료를 해야 했다. (사람에 따라 9개월을 먹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간 나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의사는 치료기간동안 생업의 올스톱을 주문한다. 내가 다시 기자일을 할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8개월 후다. 그렇게, 난 내 인생의 황금기 중 1년 가까이를 놀아야 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이진우 이사는 결핵의 한국 상황이 매우 심각함을 밝힌다. 한해 3만5000명의 환자가 발생 중이고, 이 중 2400명이 사망한다. 환자 100명 중 7명이 사망한다는 이야기. 이는 OECD 국가 중 1위의 통계라고. 생각한 것 이상의 심각한 상황. 왜 이걸 인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다.

이렇듯 무서운 병이지만, 70년대부터 국가의 대대적 커뮤니케이션 활동은 접혔고, 결과적으로 현재 국민들은 잊혀진 질병으로 인식한다는게 그의 이야기다. 더불어, 언급한대로 후진국에서 걸리는, 잊혀진 질병이라는 현 인식을 이젠 누구나 걸릴 수 있고 또 완치가 가능한 병으로 바꿔나가는 것이 결핵커뮤니케이션의 목표라고 밝혔다. 보건복지가족부와 대한결핵협회는 결핵퇴치 2030계획을 마련해 1단계로 2012년까지 결핵발생률 및 사망률을 50% 감소시켜 OECD 가입국 중 중위권에 도달하고 2단계로 2030년까진 완전 퇴치를 목표한다고. 하지만 난 결핵에 대해 이렇다할 대국민 캠페인을 본 기억이 없다. 실로 시급한 문제임을 환자였던 한사람으로 통감하고 있었다.




유명인사 중에 결핵으로 고생한 이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2009 결핵 캠페인의 홍보대사엔 뜻밖에도 가수 김창렬 씨가 선정, 활동하고 있었다. 지금은 완치됐지만 과거엔 어려움을 겪었다고. 3월 결핵퇴치홍보대사로 임명된 그다.

그런가 하면 이 날 보여진 40초짜리 공익광고엔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모습을 비친다. 그녀 역시 과거 결핵을 앓았던 적이 있었다고. 이 쯤 하면, 공인의 사례를 통해 결핵이 절대 사라진 병이 아님을 조금은 모두가 공감할 듯 하다.



이진우 이사는 "국민들이 이같은 실정에도 불구 질병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지적한 뒤, 심각성 전달, 경각심을 심어준 후 예방과 치료의 중요성을 전달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으로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씁쓸한 기억을 다시 곱씹게 해 준 그에게 감사한다. 덕분에 여기서 얻어마신 블랙커피가 달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하나 더 이야기를 추가하자면, 결핵은 재발할 경우 손 쓸 방도가 없다. 의사는 내가 먹는 결핵약이 60~70년대에 개발된 약이고 추가 개발이 끊겼다고 전했다. 우리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의학계는 결핵에 있어 더 이상 버전업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일까. 한번 결핵약을 먹은 이가 다시 재발하면 이미 약에 면역력을 갖춘 몸이라 같은 약은 통하지 않는다. 뭔가 이 때를 위한 신약의 개발이 절실함을 되새겨 본다.

그나마 나는 그래도 가족이 있어 행복한 사람이었다. 본가에 내려가,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며 통원치료를 하면서 난 그 기간을 아쉽지만 그래도 휴식하고 충전하는 시간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사실 병에 걸린 그 해는 기자수업을 하면서 여러모로 마음고생을 했던 해였다. (이건 다음에 밝힌다. 언론인들에 있어 다함께 고민해야할 난제가 주어질 것이다) 결핵이라는게, 에너지 소비가 심한 병이라 뭐든 잘 먹어야 한다더니 정말 그랬고, 난 이것저것 먹으라고 보살펴주는 가족이 있었다. 평소 무감했던 많은 것들에 감사하고, 우리가 실은 많은 것을 가진 행복한 사람임을 깨닫게 해 줬다는 점에 있어선 몇 안되지만, 그래도 저 몹쓸병에 감사할 수 밖에 없다. 그나마도 갖지 못한 이들에겐 이 얼마나 혹독한 질병인가.

아, 하나 더 말하자면 그 덕에 내가 여기서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고 있다는 것 정도? 8개월간의 공백기를 끝낸 것이 복간한지 한달째였던 뉴스보이의 프리랜서 모집 공고였으니까. 결핵으로 맺어진 인연이랄까. 참 세상은 오묘하다. 하핫, 세상은 참 재밌어. 쓴 맛 뒤엔 묘한 여운이 감도니까 말야.

혹시 지구는 거대한 커피잔이 아닐까? 쓰고도 달달한 커피의 소용돌이 말이다.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