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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보이 기사(newsboy.kr)/시사

박찬호 중계 보다 깨달은 "잊고있었네, 15년간 행복했음을"

박찬호 중계 보다 깨달은 "잊고있었네, 15년간 행복했음을"  

 
"중계 못보나요?"

한 네티즌이 볼멘 소리를 했다. 경인TV의 송신 지역이 아닌 지역에선 마냥 아쉬울 수 밖에 없다. 그저 문자중계로 만족할 뿐. 그의 호투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밖에.

     
  
   

  
 


18일, 2승째를 노리는 박찬호의 선발경기가 문자중계되는 다음 게시판. 1회 상황에서 모인 응원지수는 필라델피아가 956, 워싱턴이 456.

수치적인 부분만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얼마 안 되네"라고. 확실히, 박지성 선수의 맨체스터 경기에 축구팬들이 다섯자리숫자를 심심찮게 올려놓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귀신보다 더 무섭다는 월요일의 새벽 3시 상황이다. 그리고...

 

박찬호 중계 보다 깨달은 "잊고 있었네, 15년간 행복했음을"

 

사실 18일 새벽 벌어진 워싱턴전은 그리 특별할 경기가 아니었다. 박찬호는 이런저런 아쉬움을 남긴 채 4실점 후 2회에 강판됐다. 약점으로 지적되는 '마의 1회'가 또 재현된 것. 이런 경기 중계를 보다 '눈이 젖었다'던지, '행복했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 그런데 새삼 코 끝 찡한 감정이 몰려오는 건 무엇때문일까.

박찬호가 다시 선발 무대 위에 오르고, 인터넷 문자중계를 통해 네티즌의 시선을 모으는 것 만으로도 내게 특별히 다가왔던 것. 수년간의 길고 어둡던 터널을 뚫고 다시 '선발투수 박찬호'로 컴백해 연승의 기대감을 자아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은 실로 오래간만이다. 이미 작년에 부활을 알렸지만 붙박이 주전은 아니었지 않은가. 아쉬운 목소리라도 내어 줄 팬들이 내일 아침을 생각치 않고 일어나 시선을 모으는 것이 그립던 십여년전을 떠오르게 했다. "오늘도 이겨줄까"란 화제로 중계시간을 고대하게 만들던 동양특급의 전성기를.

   

  
  
  30여분 뒤 강판될 시기에 이만큼 표가 늘어났다. 출근, 등교를 생각치 않는 팬들의 결과물이다.  
 


15년전인 1994년, 그의 모습은 기적과 같았다. 해외의 최고무대에 한국인이 맹활약하는 모습을 방송사가 중계권을 따 와 매번 생중계해주는 것 자체가 당시로선 믿기지 않았기에. 지금이야 박지성 선수의 매경기를 케이블채널로 지켜보는 시대지만, 이밖에도 축구에서나 야구에서나 여러 선수들이 즐거움을 전해주는 시대지만 그 때로선 전례 자체가 전무했다. 앞서 분데스리가의 차붐 열풍이 있었지만 생중계는 생각할 수 없는 시대였지 않은가. 사상 최초의 메이저리거라는 수식어야 두말하면 숨 차고.

이승엽도, 김병현도, 박지성도, 이영표도 모두가 영웅이지만, 그래도 스포츠에서 국민영웅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박찬호다. IMF 한파라는 그 시대적 상황에 홀연히 일어섰던 해외파 스포츠 영웅은 그 혼자였다. 세계에 통하는 한국인이 필요했고, 외채에 허덕일 때 외화를 벌어들이는 모델이 필요했으며 그를 일임받아 훌륭히 수행해 준 것이 박찬호였다. 시대와 운명이 점지한 영웅이었던 셈이다.

현재의 박지성이 우리에 안겨주는 선물을 무료한 일상을 달랠 달콤한 사탕이라 한다면, 그 때의 박찬호는 당장의 고통에서 구원해 줄 약상자를 매번 꾸려다 주었다. 158KM의 초강속구를 미트에 꽂아넣으며 8~9회까지 완투해 쌓았던 18승의 기록은 곧 세계에 대한 우리의 자부심이며 "우리도 할 수 있다"란 희망의 증표였다. 새벽에 일어나 TV앞에 앉게 했던 것도 당시로선 유일했던 재미였다.

'박찬호 선발'이란 중계안내는 한 때 영영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너무 오랜 암흑기였기에 그 대단했던 날들의 기억조차 잊혀졌나 보다. 아무리 위대한 기록의 보유자라도 슬럼프 자체를 용인치 않는 악플러에겐 '먹튀'라는 모욕이 수년간 쏟아졌다. '나라망신'이라는 욕설까지 터져나왔다. 그들은 모른다. 어째서 모르는 것일까, 지난 15년간 메이저리그에서 메이저리거의 명함을 지켜낸 것 또한 멋진 기록이라는 것을.

아니, 사실 이 점은 그를 줄곧 응원해오던 입장에서도 어느샌가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어느 팀의 어느 자리에 있어도 "언제 어떻게 다시 위대한 선발로 돌아올지 모른다"란 기대를 항시 가능토록, 메이저리그에서 자기 자리를 십수년 지켜오는 선수가 있다는 기적같은 진실을 우린 너무도 당연히 여기고 있었다. 저것이 한국인으로서 얼마나 행복한 일이며 또 그 행복이 15년동안이나 지속되고 있었음을 말이다. "잊고 있었네, 15년간 행복했음을"하고 깨닫는 순간 새삼스럽고도 때아닌 감흥이 전해져왔다. 오늘 경기 내용과는 무관하게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것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은 이 때문.

   

    
  
  네티즌들은 위기에 몰려도 힘을 내라며 기도해주었다. 다시 '어게인 동양특급'의 바람이 부는 것 같아 행복했다  
 


지금 우리는 박태환과 김연아를 보며 "우리나라에 저런 기적같은 선수가 나오다니"라고 기뻐한다. 사실 이는 15년전, 도저히 넘볼 수 없을 것만 같던 메이저리그에 깃발을 꽂은 박찬호의 몫이었다. 종별을 초월해 저같은 기적의 릴레이에서 첫 주자로 나섰던(너무 앞서 나왔기에 다음 주자까지의 공백이 수십년 지속됐던 차범근 선수는 예외로 하고) 박찬호 선수는 이제, 또하나의 위대한 기적으로 거듭나고 있다. 십수년 롱런하는 불사조의 기적 말이다.

내일 아침 스포츠 섹션에서 또다시 수많은 악플러가 들고 일어나 "역시 먹튀네"하고 퍼부을 것이 눈에 선하다. 십수년 이어지다 못해 이젠 불감하게 된 행복의 부작용일까. "이미 우린 15년간 그로 인해 충분히 행복했다"고 깨닫는 것이 너무 늦지 않길 바랄 뿐이다.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