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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보이 기사(newsboy.kr)/칼럼

"육지 분이 4.3 사건엔 왜 관심을?"

[오아시스]"육지 분이 4.3 사건엔 왜 관심을?"


# 여기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선, 네티즌과 시티즌의 담소터.

 

그녀는 내게 의아한 듯이 물어왔었다.

"육지 분이 4.3 사건은 왜?"

생각해보니, 이 때가 내 인생 최초의 취재여행이었다.

 

53. "육지 분이 4.3 사건엔 왜 관심을?"

 

올 것 같지 않던 꿈의 2003년.

"꽃피는 봄이 오면 나는 가네"라 별 희한한 노래를 부르며 '고향 앞으로!' 했었다. 꿈만 같은 제대.

하지만 공백기는 없었다.  곧바로 2주차 새학기에 복학해 맞이한 3학년. 굳어버린 건 머리 속인지, 아님 융통성인지... 난 그 학기에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C플러스가 수두룩한 걸 보다 현기증을 느끼며 순간 막다른 길까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딱 하나, '역사와현실'이란 교양과목에서만큼은 A플러스를 받았었다. 유일한 위안거리다. 하지만, 여기서 그 성적은 중요한 내용이 아니다.(물론 마지막에 밝히듯 내 개인에겐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 2학점짜리 교양과목은 중간고사를 현장 레포트로 대체해 성적의 명암을 가르는 점이 특이했다. 그리고 이를 떠올리자면 제주에서의 기억이 따라붙는다. 아름답던 졸업여행의 추억, 그리고 4.3 양민 학살 사건을 짚는 풋내기 저널리즘학도의 1인 취재기가 이상하게 뒤죽박죽 섞였다. 이번 글의 주된 내용은 이거.

담당 교수님은 마치 당대 인기 드라마였던 '야인시대'에서 걸어나온 민족주의진영의 한 사람 같았다. 친일파 숙청을 부르짖었고 '동해도 부족하다, 한국해로 불러야 한다'고 외쳤다. 블로거뉴스가 열리고 진보적 네티즌이 목소리를 높이는 지금이었다면 대학생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를 얻었을 법하다.

앞서 밝혔듯 중간고사를 특이하게도 자유 현장 과제로 내걸었다. '봄인데 아무데나 좋으니 커플끼리 유적지나 역사적 장소에 여행이라도 다녀오고 감상리포트를 적어내라'는 지령이었다. 

C.C가 없으니 앞의 조건은 곤란했고, 따라서 딱히 어딘가를 찾고자 하는 동기유발도 없었다. 그러다 고심 끝에 생각한 것이 마침 그 학기에 잡혔던 제주도행 졸업여행이었다. (요새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당시 우리학교는 3학년 1학기에 미리 졸업여행을 다녀왔었다) 일정 중 짬을 내 '제주 4.3 사건'의 흔적을 직접 찾아보자는 계획이었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내 인생 최초의 현장취재였다.

2박 3일의 여행. 제주는 아름다웠고, 여행은 재미있었다. 이병헌과 송혜교의 그 유명한 언덕 위 성당도 찾았고, 일제강점기 시절의 안타까운 동굴도 찾았다. 비취색 바다와 은색 모래는 내 소중한 기억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눠가졌던 이것만으로도 모자라 욕심을 조금 더 낸 셈이 됐다. 일과종료 후 숙소로 돌아와선 곧장 양해를 구하고, 홀로 버스를 잡아탄 채 현장 답사에 나섰다. (덕분에 다음날은 이동할 때마다 버스안에서 죽은 듯 잤다)

솔직히 무모했다. 시도때도 바뀌던 날씨가 오후 비로 바뀌었을 때(제주는 장마기가 따로 없음을 몸소 알았다), 우산도 없이 길을 나섰다. 허나 정말 무모한 것은 사전 정보 하나 없이 덤볐다는 것. 그저 만나는 지역사람들에게 4.3 사건을 묻고, 이를 확인할 장소를 찾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취재 방법의 전부였다.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자신은 '섬 사람'으로, 나를 비롯한 타지역 사람들은 '육지 사람' 내지 '내륙인'으로 부르던 제주 사람들. 그들은 이를 물을 때마다 나를 이상한 듯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레 조력자가 되어 주었다. 수십년이 지난 비극의 역사 아래서 후손들 사이에 기묘한 분위기가 잠시 머물다 사라짐을 순간순간 느꼈다. 잊지 못할 기억이다.

실은 빗 속 취재를 떠나기 전 뜻하지도 않게 아이템 하나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날 일정 중 막바지였던 어느 폭포 관광지에서, 숫기도 없던 주제에 용기를 내 관광 안내데스크를 찾아 물었다. 4.3 사건을 되짚을 수 있는 장소가 있느냐고.

이런 경우는 드문 모양이었다. 나이대가 비슷해뵈는 젊은 여성 안내원은 '내륙인'의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호의를 베풀었다. 순간 내가 감지한 그녀 눈빛은 관광객을 접하는 안내원이 아닌, 4.3사건에 관심을 갖는 내륙인을 바라보는 섬 주민의 그것이었다. 주저않고 제주 지역 관광지도를 꺼내와선 곧장 복사해 줬는데 내겐 기대 이상의 배려였다. '자신도 권할 만한 지역적 지식은 없지만'이라며 대신 건네준 사본 지도는 유용하게 쓰였다.

여행 가이드에 찾아갈 만한 곳을 물었더니 그녀는 예정 밖의 것을 묻는 것에 의아해 하면서 '항일기념관'을 소개해 줬다. 내가 소개받은 유일한 장소다. 사실 항일기념관은 말 그대로 일제강점기 시대의 항일정신을 담은 곳이지만, 그녀는 "딱히 4.3 사건만을 다룬 기념관 등은 전무하다"고 고개를 내젓고 이것이 최선 내지 차선임을 알렸다. 아울러 그 인근 마을이 4.3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가르쳐 줬다.

'이번 정부 들어서며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할 의사를 밝혔었는데 아직은 모른다', 내가 그녀에 들었던 당시 흐름의 전부였다. 솔직히 이 부분은 6년이 지난 이제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 그녀는 내가 뭔가 물을 때마다 '너무 어렵다, 정치적 문제는 잘 모른다'고 손을 내저었다. 아마도 '별종이다'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어물어 버스를 타고 항일기념관에 도착. 평일 빗속의 저녁이라 넓은 터엔 사람 발길도 거의 없었다. 내려간 체온에 흐려진 시야가 이상한 분위기로 날 잡아끌었다.

확실히, 항일기념관에선 4.3 사건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다시 길을 나선 나는 젖은 지도와 도로 이정표를 나침반 삼아 인근 마을(이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로 30여분가량 걸었다. 교회가 하나 보였고, 가옥들이 보였다. 내가 선택한 것은 인기척이 있는 교회. 이미 날은 완전히 저물었다.

교회에서 한 중년 여인을 만났다. 교회 관계자임은 짐작했는데 어떤 직책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난 머리의 빗물을 쓸어내리며 "이 곳 마을이 4.3 사건과 연루된 곳으로 들었다, 이야기를 좀 듣고 싶다"고 청했다.

그녀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내 여기저기를 살폈다.

"집안 어른들이 제주 분이세요?"

"아뇨, 부산에서 왔습니다."

그녀는 곧바로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런데 육지 분이 4.3 양민학살은 어떻게 관심을 갖으시고...?"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은 '대학 과제를 위해서며, 학교에서 리포트로 알리고 싶다, 주위 사람들도 이 때 일에 대해선 아는 사실이 별로 없더라'는 정도. 납득을 할지 여부는 자신이 없었다. 혹 날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기만 하는건 아닐까도 싶었다.

그러나 뜻밖의 객손에게 그녀는 앞서 관광안내원과 마찬가지로 호의적이었다. 그녀는 '여기 이 마을도, 옆 마을도 인근 마을 모두가 당시 그 때 일과 연루된 피해지역'이라며 자신의 부모님 세대와 그 이전 세대는 모두 공유하는 과거임을 밝혔다.

"잠시만요"

가까이에 있던 나이 지긋한 주민을 부르더니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내 앞에서 입을 열도록 도와준다. 노인은 "그랬었지"라 운을 뗀 뒤 "당시엔 정확한 근거도 없이 저 집도, 이 집도 할 거 없이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불려가고 잡혀갔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윗 마을 누구네도, 옆 집 누구네의 누구도 그랬었다"며 "수십년간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렇게 살아왔었다"고 밝혔다.

내가 확인할 수 있던 것은 그게 전부였다.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이 태반이며, 그럼에도 수십년간 화를 입을까 말도 제대로 꺼내보지 못한 채 그저 서로가 숨죽인 채로 그것을 보듬으며 살아왔다"는 증언.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내 리포트에 담을 이야기는 충분했다. 

아무 것도 없이 맨 손으로 찾아가 전해듣는 것만으로 이뤄진 현장취재였다. 신문방송학도임을 실감한 것에 대한 당시의 기묘한 감흥, 그리고 후일 성적표를 '꽝' 수준에서 건진 A플러스 학점은 아마도 빗 속에서 초행길 불안감을 더듬으며 돌아다닌 것에 대한 약간의 보상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그 때의 경험이 '기자질'을 밥벌이로(일단은) 삼게 한 사실상의 계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이제와 그 날에 대해 말하자면, 앞서 밝혔듯 내가 만난 제주도 사람들은 4.3 사건에 대해 알고자 하는 육지 사람들에게 은근히 놀라고, 또 호감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들에 있어 4.3 사건은 타지인에 줄곧 전하고 싶었건만 탁 단절되고 응어리져버린, 그러나 언젠간 반드시 함께 공유하고 또 해소하고 싶은 것이었나 보다. 아울러 먼저 이를 물어오는 사람은 특별할 수 밖에 없는 손님이었다.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