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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보이 기사(newsboy.kr)/칼럼

화장터에서 미아가 된 어른들 [오아시스]

 

[오아시스] 화장터에서, '다시' 미아가 된 어른들  

  
# 여기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선, 네티즌과 시티즌의 담소터.

 

"권기자 님도 언젠가, 화장터 위를 걸어보길 권합니다. 그 삶과 죽음의 경계로를."

그 분의 조언을 오늘, 행하게 됐다. 자의는 아니었다.

    

  
     
 
50. 화장터에서, '다시' 미아가 된 어른들

 

고모부 님이 돌아가셨다. 갑작스런 비보였다.

고모 님이 그러하셨듯 화장하셨다. 인천시립 승화원에서 불꽃 속으로.

"3년만이로구나..."

스스로의 뜻으로 타인의 장소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건, 뜻하지 않게 그 때 받았던 조언을 오늘 행하게 됐다.

이건 내가 지금보다 조금은 더 젊었을 적 이야기다. 3년 전, 한창 이런저런 쓴맛을 보던 견습시절 때 취재터에서 뜻깊은 인연을 접했다. 그리고 스스로 거기서 내 적을 지우기 직전, 그 소중한 인연에 답례할 겸 마지막 인터뷰를 청했다.

이별선물임을 몰랐던 그 사람은 자신의 비밀을 밝혔다. 전쟁같던 업계에서 매주마다 심기일전하는 자신의 마인드컨트롤 비법이었다.

"난, 주말마다 벽제 화장터를 거닙니다. 거기서 항상 뭔가를 털고 새로운 것을 접합니다. 사람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그 사별의 무게감에서 '뭔가'를 찾곤 하죠."

흥미로웠다. ''호감가는 어른'의 교습은 이런 것인가' 하며 잠시 기자수첩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혹시... 아하하, 권 기자님. 이런 이야기 한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시거나, 화내시지는 말고..."

그는 신중하게 손을 내저으며 내게 조언했다.

"시간이 되시면, 기자님도 그 곳에 가보시길 권합니다. 무언가 느끼고 얻는 바가 있으실 겁니다."

물론 난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곤혹스러워 하거나 화내지도 않았다. "알겠습니다"라며 꼭 한번 가 보겠노라고 답했다.

그러나 어느샌가 잊고 있었다. 가끔 가다 '그런 일이 있었지'라며 떠올리긴 했어도 그게 전부였다. 맘 먹고 시간을 내어 방문하는 일은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 오늘을 맞이했다. 비록 벽제는 아니었지만.

어둠이 걷히는 여명, '승화원'으로 이름이 달리 한 화장터는 혼잡했다. 알지 못할 많은 이들의 연이 거기서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5개의 안치실, 15개의 분골실과 관망실... 차례차례 세상에서 자취를 지워가는 이들이었다. 마스크를 쓴 안내자가 엘리베이터로 흘려보내는 망자에게 한번, 뒤돌아 관망하는 이들에 한번 경례를 붙여 이별의식의 거행을 알리면 살아있는 이의 가슴마저 타들어갔다. 관망실에 시선을 두면 뜨거운 불꽃이 연상되고, 그만 고개를 돌려 바깥 풍경으로 향하면 차가운 설국이 열려 극심한 온도차를 시각에 전달했다.

     
  
  차가운 설경에 묻힌 승화원  
 



그리고 산 저 멀리엔 수많은 묘지가 안개너머로 비춰진다. 그저 휴식의 땅을 얼어붙게 하는 동장군이 얄미울 뿐이다.  
 


안치실서 고모부 님이 쉬고 있는 관의 끝자락에 살짝 손가락을 대고 쓸어내렸다. 차갑다. 차가운 느낌도, 모든것을 재로 살라먹을 뜨거움을 연상하는 것도 모두 싫었다. 그에 앞서 너무 비좁아 보이는 그 공간의 속박감이 전달되는 것부터 싫었다. 40여센티미터나 될까 싶은 그 목재 속 공간은 보는 것만으로도 폐쇄의 공포를 불렀다.

"엄마! 안돼!"

한 어른의 단말마가 울렸다. 50대쯤 되어보이는 아주머니가 안치실서 들려나오는 관을 따라나오며 울부짖었다. 낯선 듯 낯익은 모습.

"엄마! 엄마!"

바닥에 쓰러져 오열하는 '아이', 그리고 말없이 떠나가는 '엄마'. 난 거기서 문득 하나를 깨달았다. 아이는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어도 부모와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시간을 거슬러 다시 여닐곱살의 그 때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시장통에서 엄마를 잃고 울음을 터뜨려버리는 아이, 그 때의 모습이다. 어른은, 화장터에서 다시 한번 '미아'가 되어 부모를 찾는다. 예순이 넘고 일흔이 넘는들 다를것이 있으랴. 거스를 수 없는 시간에 떼쓰고, 말없는 부모를 찾아헤맨들 변하는 바 없음을 이미 잊었다.

우리 차례가 왔다. 통곡과 조용한 표현의 차는 있을지언정 미아 된 슬픔은 다를 바가 없다. 영원히 찾을 수 없다는 시간차의 확신이 그들 가슴을 두드릴 것을 어찌 모르겠나.

'이것이었습니까'

답변의 기대를 할 수 없는 되뇌임. 깨닫고 배우게 될 그 '무언가'는 적어도 오늘 만큼은 이것이었던 겁니까.

사실 난 그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 잘 이해했기에 당시 인터뷰 기사에 가감없이 옮겨 낼 수 있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플랫폼에서 지금 내가 살아있음에 희망을 보고, 유한한 삶의 확인으로 느슨해진 심기를 다시 다듬으라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허나 그것만은 아니었나. 그리고, 여기서 확인한 것의 연장선상이 이어졌다.

분골이 진행될 동안 바깥으로 나갔더니 까치 두 마리가 하늘을 비행한다. 결혼비행인 듯 실로 엮인것처럼 가까이 함께했다.

고모 님 가신지 3년 9개월. '잉꼬부부'라는 말을 떠올리게끔 기간차를 두고 남편은 아내의 뒤를 따랐다. 남겨진 이와 별개로 내외에겐 행복의 완성점이다. 오랜 기다림 없이 다시 만날 수 있는 인연의 매듭은 존경심에 가까운 무언가를 자아낸다. 비록 옆자리는 분양으로 양보하게 됐으나 그래도 두 분은 납골당서 다시 만났다.

       
  승화원 내부에 걸린 싯구   
 

결국 이 날 확인한 것은 가족과, 부부의 정이다. 다시 아이로 돌아간 어른과, 마지막 순간 '죽음'으로 또 하나의 무언가를 이뤄내는 이. 그들은 어느샌가 생명의 경계 뿐 아니라 시간의 선까지 허물었다. 남은 것은 시류에 씻기지 않는 본질의 순도. 그리고 이는 매번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찾아올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으로 연이어지는게 아닐까란 추측으로 경외감을 들게 했다. 부디, 유한한 내 삶에도 순수와 본질이 불변하길.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