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선, 네티즌과 시티즌의 담소터.
이거 어떤 얼굴로 이야기를 건네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은근히 놀랍다는 사실.
39. 답답한 한국 축구, 반공을 깨다(?)
먼저 지난 11일자 기사를 소개한다.(http://www.newsboy.kr/news/articleView.html?idxno=4227)
10일 한국 축구 대표팀은 또한번 호되게 질책을 받았다. 한 수 아래로 평가되는 북한과의 월드컵 예선에서 시종일관 고전하다 무승부를 기록한 뒤, 네티즌 반응은 온통 열광의 도가니로 화했다.(?)
스트라이커가 골을 못 넣으면 어느 포지션보다 먼저 여론의 화살을 맞는다. 조재진은 이날 경기 후 '축구장의 칸트'란 별명을 얻었다. 생각하는 플레이는 아무래도 좋으니 뛰어다니라는 반응이다. 허정무 감독은 어떠한가. 아직 한 경기 치뤘을 뿐이라 밝혔지만 첫 단추를 조 3위로 잠근 것과 오버랩되는 역효과를 낳았다.
경기에 대한 팬들의 실망감은 결국 포털 문자중계 게시판의 응원방에서 한국팀보다 상대팀의 응원표가 많아지는 기이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아무리 강적을 만난다 해도 이런 경우는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는 '우리나라보다 상대팀의 응원지수가 높은 진풍경'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다. 상대팀이 다른 팀도 아닌 북한이었기 때문.
물론 우리나라의 대북 감정은 지난 시절의 것과는 상당히 달라진게 사실이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박정희 전대통령 시절의 반공과는 완벽히 반하는 햇볕정책으로 대북정책을 선회시켰고 병영교육에서도 우리의 주적은 '북한'에서 '북괴'로 수정됐으니까.
그래도 축구 남북전에서 북한을 응원하는 반응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건 여러모로 흥미로울 수 밖에. 아니,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겐 흥미로운게 아니라 "큰일 날 세상일세"란 말이 절로 터질 광경이다.
아무리 최근 들어 많이 변했다지만, 현 시대의 젊은 축인 기자 세대만 해도 초등학교 시절(국민학교 간판이 유효했던 거의 끝자락 세대)엔 반공 교육이 엄연히 존재했다. 현충일이나 6.25사변일의 TV에선 어김없이 특선만화로 반공 애니메이션이 전파를 탔다. 김일성 부자가 성난 주민들에게 허겁지겁 쫓기다 돼지로 변하며 드러나는 '실제 정체는 인간으로 둔갑한 돼지였다'란 설정은 여덟살 아이에겐 상당한 충격이었다.
80년대 남아들의 로망이었던 로봇물 마린엑스는 또 어떠한가. 설정된 적은 우주인이나 지저세계인이 아니라 북한이었다. 여기서 북한엔 진짜 배후가 따로 있었고 김일성은 벌벌 떨며 복종하는 허수아비로 그려졌다. 저작권 문제가 어떻게 되는진 모르겠는데, 헐리웃에서 헐크를 데려와 요정과 한 소년의 북한 탈출기(얘가 왜 북한으로 워프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에 등장시킨 작품도 있었다. 교과서보다 더 영향력 있는 애니메이션을 반공 프로그램으로 심심치 않게 방영했던 게 불과 20년전의 일이다.
미술시간 주제가 '자유화'로 잡히면 동무 중 상당수가 북한군 때려잡는 자신을 그렸고(고백하는데 본인은 메칸더전투기와 오메가 미사일 그리느라 바빴다. 헌데 점수는 쟤들보다 더 좋았으니 왜일까나) 담임 선생님은 바른 생활 시간마다 "북한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미제놈 때려잡자...' 같은 가사 뿐"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방학 독후감 과제는 3학년때까지 지정 반공 도서에 한했다.(합성인간이나 고래목장 같은 근미래 과학 도서가 간혹 끼긴 했지만) kal기 폭파사건을 다룬 '통곡하는 하늘'이라던가, 6.25 당시 사지에서 전선을 잇는 병사들의 활약을 다룬 '용감한 통신병' 등의 스토리는 아직까지도 뇌리에 각인돼 있다. 학급문고에도 상당수가 반공소설이었고 독서파에겐 여러모로 파급력이 강했다.
돌이켜보니, 저 나이 때의 교육이 평생 간다는 말은 확실히 과언이 아님을 절감한다. 보수세력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좌파란 말 역시 거부감을 느끼는 건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네티즌과 축구팬 중 상당수를 구성하는 칼라TV 세대는 이렇듯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아 왔다. 아무리 교육현장을 떠나 스스로의 자유의지와 자아를 구축해 살아가는 자유민주공화국의 국민들이라지만 저 당시 교육의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수년전 북한과 일본이 축구경기를 펼쳤을 때 일이다. 당시 언론에선 거리낌없이 '북한 이겨라'를 외치는 한국 팬들의 모습을 소개하며 화해무드로 확연히 달라진 대북감정을 소개했다. 하지만 이를 바꿔 말하면 과거엔 반일감정보다 반공의식이 더욱 강했고 북한보단 차라리 일본을 응원했음의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젠 인터넷을 통해 당당히 "경기 보자니 갑갑해 죽겠다, 차라리 북한이 이겨버려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린 것이다.
이에 대한 시각은 분명 엇갈릴 터. 전쟁과 '박통 시절'을 겪고 "너네가 50년대를 아느냐"고 젊은이들을 호통치는 어른 세대에선 상당수가 "빨갱이 시대가 도래했군"이라 탄식을 토할 것이고, 반면 민주노동당 등 진보세력을 지지하는 젊은 세대에선 역시 상당수가 "언제적 시절 이야기를 꺼내냐"고 별 문제 될 게 없음을 주장할 것이다. 물론 새 시대를 사는 한편으론 어린 시절의 반공 교육과 군 시절의 병영 교육 영향으로 갈팡질팡하는 이들 수도 상당할 터. 여기에 대한 본인 소견이나 단정은 유보한다. (저 중 마지막 유형에 속한다)
그런데 이를 떠나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이렇듯 반공의 벽을 부수고 한국팀의 응원지수를 역류시킨 이유가 그저 '답답한 한국 축구'에 대한 반감 때문이란 사실을 직시하게 되면 실소할 수 밖에 없다. 한편으론 "축구보다 오죽 화났으면 저랬을까"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결국 이번 풍경은 월드컵 4강의 빛나는 역사를 잇지 못하는 대표팀이 원흉(?)이니까.
분명 이번 해프닝의 본질이 멀리 찾을 문제는 못된다. 한국 축구를 응원하던 팬들의 시선이 한순간 싸늘해졌고, 현대 한국 문화의 트레이드마크인 인터넷포털 커뮤니케이션과 이런 반응이 융합하면서 터져나온 일순간의 에피소드일 뿐이다. 다만, 그래도 저 깊숙한 곳에선 어느새인가 반공 교육과 '무슨 이유로든 북한에 져버리란 말은 하면 안돼'라는 의식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북한을 바라보는 의식이 반공에서 뭔가 다른 무엇으로 변하고 있는 시대다.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