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인터뷰] 13. 정재헌 "12년째 해도 질린적 없어, 지금도 섭외오면 설렌다"
"연기를 하고 사는 자체가 행복해요. 지금도 섭외 오면 막 설레고 그래요. 12년째 하지만 질린 적이 없어요."
워커 홀릭. 일 중독은 한국을 대표하는 키워드로 어느 해외 유명 만화 사이트의 세계지도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 자신의 일에 중독된 사람은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신인 때처럼 지금도 막 두근거리고 그러는 남자, 성우에 흠뻑 빠진 '12년차 신인' 정재헌을 열 세번째 성우로 소개한다.
정재헌
2002년 MBC 16기 입사
대표작 마지 레드 오즈 카이 - 파워레인저 매직포스 (재능방송)
엔진 블루 - 파워레인저 엔진포스 (챔프)
카제하야 - 너에게 닿기를 (투니버스)
디케이드 - 가면라이더 디케이드 (챔프)
히소카 - 헌터x헌터 리메이크(애니맥스)
프라이빗 - 마다가스카의 펭귄
키요마로 - 금색의 갓슈 (챔프)
에릭 델코 - 외화 CSI 마이애미 시리즈 (MBC)
아치존슨 - 외화 CSI 과학수사대 시리즈(MBC)
허건오 - 회색도시 (카카오게임)
엑셀러레이터 -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애니맥스)
유우지 - 토라도라 (애니맥스)
소년 사쿠 - 세상의중심에서사랑을외치다 (MBC)
시라이시 미노루 - 러키스타 (챔프)
켄 - 독수리5형제 극장판 (애니박스)
필 프리츠/앙리 크레이트 - 사이버포뮬러 시리즈 (애니박스)
쟌- 닌자고 (니켈로디언)
밴드오브브라더스(MBC)
동쪽의 에덴 (투니버스)
후쿠다/요시다-바쿠만(애니박스)
주드/국왕/유빅-베르세르크 극장판(애니박스)
제하트-기동전사건담 에이지 (챔프)
공성전차,발레리안멩스크 - 게임 스타크래프트2 시리즈
블라디미르 등 - 게임 리그오브레전드
임페리우스 - 게임 디아블로3
블러드 엘프, 켈타스 선스트라이더 -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로난 - 게임 그랜드체이스
바쿠라 - 유희왕3,4 (챔프)
시몬 - 천원돌파 그렌라간(애니맥스)
스파이더맨 - 스파이더맨
사라도령 - 고스트메신저(OVA)
데이다라 - 나루토(투니버스)
카임 아라고나 - 게임 로스트 오딧세이
기타등등
데뷔작 장르노 주연의 외화에서 창에찔려죽는남자 13, 지나가는 청년 등으로 데뷔
주연데뷔작 합체용사 플러스터 (재능방송)
168의 전설을 쓰는 남자
세상에 가장 완벽한 키가 있다면,
그건 여자와 눈을 맞출 수 있는 배려와,
닌자가 되어 군중 속에 숨어도 찾아낼 수 없는 밸런스,
그리고 약자를 끌어안을 때의 외유내강이 될 것입니다.
단언컨대, 168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남자의 키입니다.
루저라고 부르겠는가. 이 남자, 강인한 168이다.
스스로를 168이라 밝히고, 또 자신이 주연했던 대표 주인공 허건오, 엑셀러레이터 등도 168이라며 코스프레 하기에도 좋다고 당당히 말한다. 키 180 안넘으면 루저라고 한 여자 나오라고 그래. 어디 앞에서 한 번 더 불러보라지.
"주변에선 그런 말 하더라고요. 쿠로코의 농구가 들어오면 쿠로코(농구선수인데도 키 작은 주인공)도 해 보라고. 후훗, 그런데 또 SNS에선 쿠로코보다도 키세를 맡길 바라는 분이 더 많아요."
그렇다. 어느덧 성우 정재헌은 성우 뿐 아니라 키 작은 남자들에게도 희망이 되었다. 당당하게 자신의 키를 밝혀라.
국어 선생님 사모하며 내 꿈 찾은 그 시절
시간의 흐름대로 그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어째서 그는 성우가 되었을까. 설마 무대연기를 하고픈데 키가 짧아서? 키에 당당한 그가 그럴리가 없다.
"중학교 때 짝사랑하던 국어 선생님이 있었어요.(물론 여자선생님) 그런데 국어책을 수업 시간 때 돌아가면서 읽잖아요? 그 분이 '오늘부터 읽는 건 재헌이가 전담이다'라고 하신 거예요. 그래서 읽기를 계속했어요. 잘 보이려 연습도 많이 했죠. 그런데 재밌더라고요."
한 줄요약 하자면 최고의 스승을 만난 거였다. 한 선생님이, 한 여인이 한 소년에게 자신의 재능도 발견케 하고 꿈도 꾸게 하고 노력도 하게 했고 지금의 길로 인도했다.
"처음엔 라디오 디제이를 희망했죠. 그러다가 성우란 직업으로 목표를 달리 했어요. 이걸 학교에서 어떻게 꽃 피울까. 그런데 마침 학교 아침방송을 진행하며 학교의 인기남이었던 선배 형의 후임이 될 기회가 찾아왔어요. 마이크로 대중 앞에 나서는 첫 여행이었죠."
그런데 하필, 그 때 이사가 결정됐다. 그러나 딱 하루라도 하고 싶어 첫 방송을 했다. 정말로 딱 하루만 방송한 뒤 이사해 버렸다.
그의 목표는 고교 진학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본격적으로 그 때부터 연기 전공을 목표하진 않았다고. 대학 진학할 때도 연극영화과 선택은 자신과 안 맞는 것 같아 다른 학과를 찾았단다.
"그 때 결정한 게 신문방송학과예요."
"어? 저랑 같네요."
직접 경험한 동류의 사람인지라 더 이상의 설명은 없어도 이해가 갔다. 예술이 아닌 문과 계통의 무난한 학과, 그러면서도 목을 쓰는 일이 많을 것 같은 신문방송학과는 나름 최고의 선택이었다.
"근데 막상 해보니 1%도 도움이 안 되는걸요. 다 '공부'잖아요. 그래서 졸업 전엔 성우 스터디 그룹에 들어가서 주경야독? 아니지 주독야독 했어요. 당시 저를 가르쳐 준 것은 김승준 선배님이었죠."
합격보단 합격 후 전속생활이 더 험난했던 그 시절
성우지망생에겐 "성우는 되기 보다 된 후가 더 어렵다"는 말이 사실 잘 와닿지 않는다. 그런 말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반사적으로 "일단은 되고 난 뒤에 말하자고!"를 외칠 수 밖에.
그런 면에서 성우 정재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는 사람이고 또 재능이 뛰어난대도 성우 시험 땐 훌륭한 경쟁자가 너무도 많다. 합격이 쉽지 않아 결국은 운이란 제 3의 요건까지 빌려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합격 자체가 곧 본인 역량에 플러스 알파인 축복 버프를 받아야 하는게 과언이 아니지.
성우 공부한 첫 해에 합격했단다. 시험은 두번째에 합격.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빠른 성과였다. 그치만 그 때문에 전속 땐 누구보다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어려워했다.
"난 연기를 너무 못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합격해 고생 너무 했죠. 후배들은 안 믿겠지만요, 그 때 우리 기수 6명 중 3명은 타 극회서 왔어요. 완전 신인이 아니라 이미 성우였던 실력자죠. 그래서 엄청났어요. 반면에 전 이들을 죽어라 노력해서 따라잡을 수 밖에요. 새벽에도 방송국에서 연습하고, 그런데 그게 전 즐거웠죠. 그리고 당장은 뒤처져 있을지언정 전 저를 절대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랬다면 거기서 주저앉았겠죠."
당시 비수를 꽂기로 유명한 PD님이 계셨단다. 차장도 하셨고 굉장히 열심히 하시는 분이었으나 성우들한텐 이름만 들어도 움찔할만치 악명이 자자했다고. 녹음하다가 "저게 뭐하자는 거야, 지금 이게 학예회야?"하고 일갈할 정도였다.
"그래도 처음엔 기회도 주고 할텐데 저는 그 분이 1년간 캐스팅조차 안 해요. 이건 좀 억울하다 싶어 시위하듯 삭발까지 해서 보여줬을 정도인데도 '어 정재헌이 뭐야, 반항하는거야?' 하고 별 반응이 없어요. 그러다가 드디어 제게 기회가 왔어요. 정말 연습 열심히 했어요."
그 때 그에게 들어온 배역은 '마약쟁이'였단다. 진정 약에 취한 연기를 훌륭히 하고자 부던히 노력했고 그것을 보여줬다. 그런데.
"글쎄 뭐라면요, '야 정재헌이, 지금 뭐하자는거야, 공중파방송에서 약 한 연기를 하잖아!'라는 거예요. 어 맞아 난 약 한 연기를 하는 건데. 어쩌라는건지. 제가 '어 그럼 어떻게...' 하니까 '뭐? 정재헌이 너 지금 반항하는 거야 어?' 그러시는거여요. 푸핫. 그 이후로도 욕 많이 먹었죠. 그치만 전 제가 생각하기로도 독했어요. 어려우면 독해지잖아요. 그게 연기자에겐 중요해요. 그 땐 전 '두고 봐, 당신 놀라게 해줄거야'라고 이 악물었어요. 어느새 그 사람이 제 목표였죠. 새벽에도 방송사에 남아 연습했어요."
어떻게 됐을까. 전속 마지막 해인 3년차가 됐을 때, 그 PD와 외화 '밴드오브브라더스' 작업을 함께 하게 됐다. 그 땐 어느덧 후배도 생겼을 때다. 그의 말에 따르면 더빙 현장 스케일도 컸다. 많은 성우들이 들어섰고 훌륭한 선배도 많았단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었다. 그 PD는 후배들에게 여느 때처럼 '학예회하는 거야 어?'하고 호통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지금 뭐하는거야! 연기를 할거면 말야, 저기 너네 선배 안 보여! 재헌이처럼 하라고! 라고 했어요. 그 땐 정말 놀랐어요. 내 귀를 의심했어요. 제가 처음으로 인정을 받은 거죠."
어느덧 성우 정재헌은 전속기간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연기를 인정받는 어엿한 선배가 되어 있었다. 훗날엔 그 PD와 사이가 좋아졌다고 한다.
그의 12년 성우 연기 중 최고의 작품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그가 꼽는 12년 경력 중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으로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카제하야.
출처 다음 영화 너에게 닿기를 포토 게시판
투니버스의 더빙 명작 중 하나로 인기있는 미소년 카제하야 역을 맡았다. 그래서 그의 별명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재하야'기도 하다. 무척 해보고 싶었으며 80명의 오디션 참가자 중에 당당히 따낸 역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러키스타다. 2008년 챔프로 방영된 이 작품에서 그는 시라이시 미노루 역을 했는데 아이돌 선배 아키라를 맡았고 지난 번 앞서 인터뷰를 했던 여민정 성우와 호흡을 맞췄다.
"그러고보니 민정이랑은 이래저래 자주 만나요. 특별한 인연이죠. (너에게 닿기를에선 카제하야와 이소은 성우의 사와코 사이를 갈라놓으려던 악녀 연기였고, 토라도라에서는 또 커플이 됐다) 토라도라도 참 좋은 작품이었던걸로 기억해요. 그리고 이 작품에선 극중 방송에 나와 또 날 괴롭히는 역이었죠."
러키스타는 실사 장면이 군데군데 나온다. 이걸 그가 로컬라이징하자고 PD에게 이야기했다. 하게 되면 출연도 직접 하고 내가 산에도 오르고 하겠다고. 후지산 대신 한라산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아마 실행됐다면 팬들이 흘리는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었겠으나, 불발.
그러나 개인적으로 꼽는 최고의 캐릭터는 '사쿠'다.
출처 다음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포토 게시판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이 영화에서 그는 소년 때의 남자 주인공 사쿠 역을 소화했다. 어느 인물보다 어느 작품보다도 깊이 동화되었던 터라 최고로 기억나는 작품이 됐단다. 얼마나 감정이입이 잘 되었냐면, 쉬는 시간에도 더빙실서 나가지 않고 감정 잡고 있었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했어도 계속 침울해 있었다.
그러다 선배가 한 번 NG를 내면서 감정이 다 날아갔다. 다시 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시 잘 해 냈다. 자신의 분량을 마치고 돌아갈 때 앉아있던 다른 이들이 울고 있기에 '아 나 잘했구나' 하고 느꼈다 한다.
"끝난 뒤엔 선배님들이 너무 칭찬을 많이 해 주셨어요. 여주인공이었던 서영 선배(김서영-MBC 1999년 입사)는 나에게 잘 맞춰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어요. 이 작품이 기내 방송으로 먼저 더빙됐는데 그 때 한번 했던 터라 감정이 그만큼 못 나왔다고 하시더라고요."
첫 주연작, 후두염 투병하며 극적으로 성공
성우 정재헌의 정식 데뷔작은? 팬들도 모를거다.
"이름은 기억 안나는데 레옹에 나왔던 장르노가 주연한 외화에서 창에 찔려 죽는 역 13(...), 지나가는 청년 등을 했죠."
그럼 정식 첫 주연작은 무엇일까. 이것도 모를걸?
"합체용사 플러스터예요. 프리로 풀리자마자 맡았는데 52부작으로 재능방송에서 했죠. 마이너한 작품이지만 주연이었어요. 그런데 정작 녹음 직전 후두염에 걸려서 '끝난 줄' 알았죠. 그런데 당시 PD님이 전화통화로 "한 주 늦춰 볼 테니 그 사이에 꼭 나으라"고 배려해줬어요. 문제는 일주일간 온갖것을 다 해도 완치가 안 된 거예요. 정말 끝났구나 하며 다시 통화를 했는데 PD님이 "내가 어떻게든 1주 다시 편성 늦춰보겠다"고 하셨어요. 완벽하진 않았지만 2주씩이나 버텨 주셨는데 놓칠 수 없죠."
그런 일을 겪으며 성우로 성장해 온 덕인지 지금도 그는 하고픈 배역도 욕심나는 작품도 많다. 타고난 미성으로 하렘물(남자 주인공 하나에 여자 캐릭터가 덕지덕지 붙는 작품) 같은 연애물 섭외가 많을 것 같지만 정작 본인은 하렘의 뻔한 주인공은 재미없다고 말한다. "그래도 카제하야나 유지는 재밌었다"고 밝힌다. 특히 카제하야의 경우는 8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에서 꿰찼던 데다 정말 하고 싶었었기에 소원 풀었던 케이스가 아니던가.
"전 특별히 싫었던 캐릭터가 없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다양한 캐릭터를 해보고 싶어요. 지금껏 다양하게 배역을 받은 건 감사할 일이죠. 카제하야도, 회색도시의 허건오도, 어떤마술의금서목록의 엑셀러레이터도 다 다른 캐릭터잖아요? 어떤 땐 미남도 해보고 또 어떤 땐 언제 또 이런 미친 놈 연기를 해보겠나 싶고 그렇게 다양하게 불러주시는것에 감사하죠."
"엑셀러레이터는 '우라질!' 욕 대사 듣고 놀랐었는데요."
"하하 정말 큰 욕설 연기는 못 들으셨군요. 블리치에서는 '뒈졌어'도 나왔었는데요."
파워레인저 레드 아빠를 둔 아들은 행복하다
트위터로 가족 자랑 많이 하는 아빠이기도 한 그다. 어린 아들 둘을 두고 있다.
그런 생각한다. 만일 내 아빠가 파워레인저 레드라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라고. 그는 매직포스에선 레드였고, 엔진포스에선 블루였다.
"좋아라 해요. 아빠가 파워레인저라는 사실을. 언젠가 유치원 선생님이 청해 왔어요. 아이들 수업 때 와 줄수 있냐고. 애들한테 아빠가 파워레인저 엔진 블루라 하면 잘 안 믿기짆아요. 가서 목소리 연기를 해 줬더니 아이들도 제 아이도 너무 좋아했어요. 그리고 닌자고, 로보카 폴리의 캐릭터도 다 들려줬죠. 나중에 아이 어깨가 으쓱한게 보여요. 아빠를 자랑스러워 하고 그게 저도 참 좋죠."
아무래도 후뢰시맨 세대로서 파워레인저 시리즈는 성우를 만날 때마다 의식 안 할 수가 없는데, 지금껏 만난 성우 중 파워레인저였던 성우가 상당하다. 홍범기 성우도 와일드스피릿 레드였고, 채의진 성우는 트레저포스 옐로였지. 위훈 성우는 정글포스 옐로였다. 맞다, 최근 최승훈 성우는 고버스터즈 레드가 됐네. 레드만 세 분 째. 언젠가 레드후뢰시를 만날 날을 위해 열심히 달려야겠다, 이 연재.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가 아닌 새로운 세상일 수 있다
트위터를 즐겨하는 그는 연예인 중에선(강수진 성우는 성우를 기능인이라 하는 이에 대해 호박을 깨버리고 싶었다며 성우란 엄연히 연예인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모범 사례다. 퍼거슨 경이 트위터는 인생이 낭비라고 했고 실제로 국내외에서 트위터가 독이 되는 사례가 많다. 그 와중에서 그는 지금껏 큰 문제 없이 이를 통해 팬들과 교감 중이다.
"글쎄요, 정말 트위터를 제대로 사용 못하는 사람이야 진정 인생의 낭비가 될 수도 있는거고, 반대로 잘만 쓰면 그렇지 않죠. 저는 스마트폰을 다소 늦게 장만했는데, 갖자마자 맨 먼저 한게 트위터였어요. 해보고 싶었거든요. 일면식 없는 사람과 바로 친해지는 게 참 좋았죠. 격투기를 좋아하는지라 해설자랑도 트윗 친구가 되고... 그런 과정이 좋았죠. 그러다 보니 어느덧 트위터에서 만나는 팬도 늘었어요. 처음엔 제 개인적 이야기를 많이 나눴죠. 그런데 지금은 '뻘글'도 줄고, 개인적 공간으로서의 역할은 잠시 내려놓았어요. 충분히 개인적으로는 즐겼으니까, 이젠 여러분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공간으로 활용 중입니다. 물론 심적부담은 클 때가 있어요. 그래도 지금으로선 트위터를 내려놓을 생각은 없어요."
내가 그의 트위터를 인지한건 2년 전인데, 두번째 인터뷰 주자였던 채의진 성우의 기사가 올라 트위터 링크로 전해질 때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축전을 보냈었지. '(커피)우윳빛깔 채의진!'이라고. 그 때 채의진 성우는 '커피우유...ㅜㅜ'라고 답글했던 것이 아직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정재헌, 성우계 난제의 중심에서 해답을 외치다 1 - 개그콘서트 레알현대사전 사건
성우로서 이런저런 공적 발언도 많이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올해 있었던 개그콘서트 레알현대사전 사건이다. 당시 이 코너에선 성우에 대해 'TV에서 해주는 외국영화란 입과 말이 따로 노는 것' 같은 대사 등 성우와 성우팬으로선 노할 만한 논란을 낳았다. 당시 성우 중에선 블로그 활동이 왕성한 KBS의 구자형 성우와 더불어 그가 비판의견을 냈다.
"처음엔 트위터로 이야기할까 했으나, 짧게 말하는 걸로는 안되겠더라구요. 명백하게 잘못된 사실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게시판에 찾아가 장문의 글을 게시했어요. 분노는 컸지만 자제하면서 썼습니다. 보셨다면 알겠지만 난 평소 개그콘서트를 즐겨보는 팬이고 좋아라 하는 사람이라 서두를 뗐죠."
"혹시 트위터로 비난해 오던 개그콘서트 팬은 없었나요?"
"정작 트윗멘션으로는 두 사람 빼곤 별 반박이 없었죠. 공감하는 분이 많다고 느꼈지요."
"사실 포털 기사에 이름이 올랐을 때 댓글에서 이런 저런 비난이 많았어요. 사실 그 중엔 'MBC 김재철사장한텐 아무말 못하는 MBC성우가 왜 타 방송국에 뭐라하느냐, 개그맨은 우습게 보이냐' 같은 무지한 글도 있었고(성우는 전속 기간이 풀린 후엔 프리랜서로 활동하므로 출신 방송국이라도 그 조직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랬죠."
"포털 기사는 안 봤어요. 거기 댓글까지 제가 가서 확인할 필요는 없어요. 직접 할 말이 있어 트위터로 찾아오면 대화했겠죠."
결국 개그콘서트 당사자들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개그콘서트 대신 사건과 무관한 개그맨 엄용수 씨가 사과를 해 오시더라고요. 아 왜 저 분이 사과를 하실까 죄송스럽더라고요. 공식적인 사과는... 안 한거죠. 그런데 사실 개그콘서트 측에서도 해당 PD가 사과의 뜻을 밝혀왔었습니다. 다만, 그걸 개그콘서트 측이 공개적인 사과로는 할 수 없다 하더라고요. 만일 그렇게 되면 그간 소재가 됐던 곳에서 전부 사과를 요구해 올 수 있다는 거였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유감스럽다는 취지를 밝히는 정도가 기사에 올랐어요."
이후 공식 사과가 나오긴 했다. 현재 검색대에서 확인해 보면 사건 후 개그콘서트 측이 공식적인 입장을 홈페이지로 밝힌 관련기사가 나온다. "성우비하 의도는 전혀 없었음을 이해해 달라"며 "시청하면서 불쾌함을 느꼈다면 대단히 죄송하다"란 사과의 뜻이 포함됐다. 다만, 그에게 있어선 발표 시기가 늦은 것과 맞물려 내용이 '사과'보단 '유감' 정도로 만족스럽게 전달되진 않았나 보다. 실제로 방송은 6월2일이었던데 비해 입장은 2주 가까이 흐른 14일 나왔고 그간 논란은 더 커졌다.
그러나 이 정도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정재헌 성우와 구자형 성우를 비롯 SNS를 통해 활발히 노력한 성우들이 있어서였다. 이만하면 성우가 SNS를 통해 성우계에 긍정적 역할을 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정재헌, 성우계 난제의 중심에서 해답을 외치다 2 - MBC 성우를 부탁해
MBC는 KBS,EBS와 더불어 극회역사가 깊은 성우계 3대 방송국이다. 기존에 성우를 모집하던 기독교방송과 대교방송은 현재 기수가 끊겨 있고, 투니버스와 대원방송이 애니메이션 채널로서 성우공채를 한 것은 비교적 근간의 일이다.
그런데 MBC는 2004년을 끝으로 성우공채가 한번도 없었다. 내년이 되면 10년째가 되는 것이다.
이유는 멀리 찾을 것 없이 MBC의 성우 수요가 줄어서다. KBS는 라디오드라마, MBC는 외화를 떠올릴만큼 MBC 성우의 대표적 영역은 외화였는데 아쉽게도 주말의명화는 몇년 전 폐지됐다. (물론 KBS도 토요명화가 폐지됐고 SBS 영화특급도 사라지면서 외화 극장 시리즈의 위기는 모든 방송사에 해당한다. 현재는 명화극장 딱 하나 남았다)
레니게이드, 동양특급 로형사, 베버리힐스의 아이들 같은 시리즈물 외화도 명맥이 끊겨 버렸다. 마지막 보루였던 CSI조차도. 라디오 드라마는 전통의 격동50년이 2009년 폐지됐고 애니메이션도 크게 줄었다. 하지만 그가 전속으로 들어왔을때만 해도 이는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고.
"제가 처음 들어왔을땐 바빴어요. 심야 외화부터 애니메이션도 무지 많았고 라디오? 격동 50년까지. 지금은 추억이 되었지만 그 땐 지금처럼 동영상 파일로 개인 시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 방송국 베타 테잎으로 시사를 해야 해서 까딱하면 새벽까지 기다려야 해요. 대작 영화 하려면 서른명 가량 성우분들이 들어설 때도 있거든요. 시사할 성우는 수십명인데 기계는 두 대 뿐이라 저 같은 경우 낮에 시사할 때가 거의 없었어요. 저녁 때도 힘들고 그러다 보니 전속이던 저는 새벽시사를 할 때도 많았죠. 그랬는데 지금은 방송국에서 자체녹음이 없어요. MBC에 지금 있다면 고전열전과 키즈 프로그램 2개가 전부예요. 사실 전 외화 연기가 너무 하고 싶은데 현재로선 스카이 기내영화 말곤 답이 없네요. 타 방송사에서 불러주면 모를까."
MBC에서 성우가 숨 쉴 공간이 줄어든 것은 곧 성우공채 중단의 장기화와도 뗄 수 없는 문제다. 결국 MBC성우극회는 물론 대한민국 성우계 전체를 놓고 봐도 안타까운 부분인데, 이에 대해 MBC 성우들의 노력은 없었을까. 있었다. 그는 최근 과학수사대 CSI까지 밀려나는 상황에서 현안을 놓고 김재철 MBC사장과 면담을 요구했었다고 밝힌다. 결과를 떠나 방송국 사장과 성우들의 만남은 성사될 뻔도 했다.
"마이애미 편이 끝나면서 그 타임을 빼앗겼죠. 그걸 사수하려고 만나려 한 건데 일단 한번 스케줄이 연기가 됐어요. 그러다 다시 만날 약속을 했죠. 그런데 하필 그 시기에 해임된 거에요. 사장이 바뀌면서 대화 창구도 같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리고 결국 빼앗겼죠.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해요."
다행히 이웃 KBS는 셜록, 닥터 후 등의 작품이 큰 인기와 더빙 퀄리티를 인정받으며 다시 성우와 외화더빙을 주목받게 했다. 좀 더 기폭제가 늘어난다면 MBC의 성우와 성우팬들에게도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최근 근황 애니메이션 종횡무진 활약
개그콘서트 사건 당시의 활동을 보면 투사 느낌도 나지만, 사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천상 여린 소년이다. 애니메이션에서 곱디고운 선의 소년과 청년 역을 자주 맡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현재 그의 근황을 물었다. 마침 이날은 인터뷰 후 곧장 대원방송의 화제작 '바쿠만' 녹음 현장으로 가야 한다. 해당 캐릭터처럼 그도 두건을 썼다. 캐릭터와 비슷한 모습을 갖추고 녹음하는 성우의 모습을 보면 여전히 특별해 보인다.
"이거 말고도 트레인 히어로, 룰루랄라 동물여행, 대교방송 신작 드림... 뭐였지?(꿈의 전사 드림 디펜더즈를 말하는 듯) 세 곳 녹음을 같이 하고 있어요. 방영 중인 신작은 10작품 정도? 텔레노벨라 외화 마이사, 건담 에이지에선 가레트, 골판지전사워즈, 스핀배틀 몬수노, 포요포요, 닌자보이 랜디, 키즈CSI과학수사대2기, 세인트세이야 오메가, 바다탐험대 옥토넛, 달리달리 씽씽 뮤비쇼, 그리고 최근 애니박스에선 베르세르크 극장판 3연작에서도 출연했죠."
"그리피스 역할을 맡고 싶다 하셨었죠?"
"방송사에서 주역 둘의 목소리를 인기투표로 정한다고 해서 나름 욕심냈는데, 김승준 선배님 인기가 워낙 강했죠.(그러고보니 사제간 인기투표경쟁이었네?) 사실 역전할 맘은 없었어요. 대신 다른 역할을 다수 맡았는데 3부까지 녹음하면서 정말 행복하게 했어요. 성완경 선배님은 피토하면서 하더라고요. 미나 누나(윤미나-대교방송)는 여전히 강렬했죠.
학원서 강의 "같이 공부하는 마음으로, 지망생 기간은 에티켓과 소양도 함께 배우는 시간"
바쁜 일정이지만 그에겐 또하나 중요한 스케줄이 늘었다. 현재 '더 소리'에서 성우지망생들과 함께 공부한다. 십수년 전 그가 성우스터디를 했던 것처럼. 단, 이번엔 스승이다. 과거 자신과 같은 지망생들의 꿈을 이뤄주고자 새로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 강의할 생각은 없었는데 승표 형(홍승표-대교방송, 더 소리 대표) 삼고초려로 시작하게 됐어요. 지금은 그들과 같이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임해요. 저도 거기서 배우는거죠."
"성우님이 공부할 때에 비해 나이가 찬 지망생도 있지 않나요?"
"삼십대 후반도 있어요. 사실 그들의 꿈을 이뤄주는게 내 역할이다 보니 어렵죠. 특히 틀을 못 깨는 친구들을 보면 어떻게 해 주면 좋을까 고민이 늘어요. 맘도 아프고. 무엇보다 그 과정을 내가 겪었고 어떤 마음일지도 아니까요. 하지만 재미도 보람도 있어요."
헤어질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기를 하며 사는 자체가 행복해요. 지금도 게임이든 애니든 섭외 오면 설레요. 12년 째 하지만 질린 적이 없어요."
성우지망생으로서 더욱 불타오르게 하는 말이지 않은가.
성우로서 소신도 잊지 않는다. 아무리 '네임드'라 불리는 분이라 해도, 꼭 지각하는 분들이 계신다며 그건 다른 동료 성우와 스태프들 등에 실례라 생각한다고. 아울러 성우 지망생들에게도 준비하는 기간동안 지각 말 것, 개인적인 에티켓을 상기하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 말도 꼭 들려주고 싶어요. 바늘 구멍을 통해 들어왔다고 해서 안심 말라고. 생존은 더 힘들다고. 어떤 노력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처음 가진 거는 많지 않아도 미친듯이 훈련하고 즐기듯이 하다보면 필시 나중엔 엄청나게 커져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그의 뒷모습을 본다. 작은 거인이다. 키는 크지 않아도 폭발력 있는 사람. 정말 그를 화나게 하면 '우라질!'하며 엑셀러레이터가 되어 주변 집기를 들어올릴지 모른다. 순수한 성우로서의 폭발력이 같은 길을 걷는 이는 순수한 힘으로 감싸고, 반대로 그 길을 부정하는 이는 격한 폭풍으로 휩쌀 것이다.
맞다, 떠난 직후 그는 문자로 또 한번의 바람을 불러 왔다.
"다음 열 네번째 주자는 말이죠..."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 Photographer 권오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