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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 다이어리

[성우인터뷰] 11. 정선혜 "녹음은 가루가 되어도 신나게!"

[성우인터뷰] 11. 정선혜 "녹음은 가루가 되어도 신나게!"

 

 

 

"신나게 했어요. 떨어져도 책임질 일 없으니 그냥 나를 보여주고 왔어요. 그러니까 배역이 오더라고요."

 

첫 오디션 배역을 그렇게 따냈고 이제 그 배역은 대표작이 됐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녹음이 이어지고 있다. 성우는 즐거운 것. 신나게 녹음하면 천하무적이 되는 정선혜 성우를 만났다. 

 

 

 

 

정선혜

2000년 투니버스 4기 입사

 

데뷔작 체포하겠어! - 여자 1 (투니버스) 

 

대표작 

마루코 - 마루코는 아홉살 (투니버스, 애니맥스)

맛나 - 고녀석 맛나겠다 (극장판)

렌턴 - 교향시편 유레카 (애니맥스)

신짱구 - 짱구는못말려 (12기부터~) (투니버스)

유키 - 배틀짱 (투니버스)

기타로(타요마) - 게게게의 기타로(요괴인간 타요마) (투니버스)

냉장고나라 코코몽 - 코코몽 (투니버스)

히츠가야 토시로 - 블리치 (투니버스, 애니맥스)

케서린 - 은혼 (투니버스)

박세모 - 명탐정코난 (투니버스)

포사청란(스콜피온) - 명탐정코난 극장판3기 세기말의 마술사 (투니버스) 

 

 

 

 

"먹는거 좋아해요"

 

햇수로 14년차, 그러나 인터뷰는 별로 해 본 적 없다는 정선혜 성우다. 오래동안 고사하다가 영광스럽게도 이번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수제 햄버거를 먹으며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평소 때도 먹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제가 원래 돌아다니면서도 뭘 잘 먹어요."

 

이 말에서 무진장 활달한 성격도 엿볼수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햇빛 좋은 날엔 집에 있지 않고 어딘가 돌아다닌다고 말한다. 게다가 운전도 잘 한단다. 어느샌가 자동변속이 주류가 된 한국 교통문화지만 첫 차부터 수동을 몰았다고 한다. 처음 그녀 차를 얻어탄 사람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변속감을 느낀다고. 손도 발도 바쁜 수동 운전이지만 그 와중에 간식타임도 겸한다고 그러네.

 

"한번은 입에 빵을 물고 운전을 했어요. 그런데 며칠 뒤 만난 엔지니어가 옆 차에서 절 봤대요. 입은 먹고 오른손은 기어 움직이고 왼손은 핸들 잡고 장난 아니었대요."  

 

듣다가 문득 머릿 속 전구에 불이 켜졌다. 그녀한테 넌지시 정보 하나를 건넸다.

 

"진격의 거인이라고 있어요."

 

"네."

 

"거기에 먹는 거 되게 좋아하는 활달한 여자애가 있는데, 혹 국내에 정식더빙으로 소개되면 오디션 한번 보시겠어요?"

 

"진짜로 교관한테 감자 먹였어요? 해보고 싶다." 

 

코미디 프로그램에까지 소개되고 숱한 패러디작이 나오며 인기몰이 중이라 언젠가 국내 더빙방영이 유력할 거라 보는 이 작품, 기대해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인터뷰 후 시간이 흐른 뒤에 이 작품이 우익 성향 논란에 빠진 걸 알았다. 아직은 그 진위를 놓고 갑론을박 중이지만 만일 사실이라면, 단념해야겠다는 생각에 여러모로 안타깝다. 그 밝고 먹성좋은 캐릭터의 본성 그대로를 가진 훌륭한 성우가 있는데 말이다.

 

 

 

 

남자같다고? 장난스런 여자!

 

최근 대선배에게서 큰 역을 하나 물려받았다. 짱구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십수년간 짱구를 맡았던 박영남 성우가 건강 문제로 하차했고, 지금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그녀다. 캐스팅 비화에 대해선 잠시 후 들어보기로 하고, 그런데 정말 짱구와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다. 장난스럽고 개구진 모습이 온 몸에더 절로 배어나온다. 짱구 본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 실제로도 그녀는 장난스러운 걸까. 실은 그렇다고 하네.

 

성우 정선혜. 같은 이름을 가진 동기 때문에 재밌는 일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투니버스 4기로 함께 입사한 김선혜 성우에 대해 그녀는 "정말 내가 봐도 예쁜 언니"라고 말한다. 수년전 모 잡지 릴레이인터뷰에서 동기인 시영준 성우가 여민정 성우를 다음 주자로 선택할 때 그녀를 언급했는데 '민정이도 예뻤죠. (김)선혜한테 묻혀서 그렇지'라고 친절하게 성을 괄호 붙여 소개한 일이 있다. 그러고보니 마침 바로 앞에 만난 주자가 여민정 성우였네. 이 이야길 듣고 '두 명 죽인다'고 웃었었는데, 정작 또 한명의 피해자(?) 정선혜 성우는 그냥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이름 가지고 저랑 (김)선혜 언니랑 짜고 장난도 많이 쳤어요. 선배 누구가 '거기 예쁜 선혜'라고 부르면 제가 쓰윽 일어나 '고맙습니다' 했어요. 그럼 설마 상대가 예쁘단 말 취소하면서 '너 말고'라 하겠어요?"

 

"사람들은 어떻게 두 분을 분간해 불러요? 학창 시절 땐 키를 보고 큰 누구 작은 누구 이렇게 부르잖아요."

 

"이쁜 선혜, 그냥 선혜요." 

 

이거 좀 너무한데.

 

"우리도 혼란스러울 때가 있어요. 저한테 명탐정 코난의 섭외 전화가 왔는데 언니 찾는 줄 알고선 '전화 잘못 거셨다'라 하고, 반대로 언니는 제가 자주 스팟을 맡았던 바둑TV서 전화가 올 때 '다른 선혜 찾는거 아니냐'고 반문하죠."

 

어릴적 부터 장난꾸러기였다고 회고한다. 심지어 담을 넘는 적도 많았다. 길을 질러가려고 넘기도 하고, 때론 개를 만나 무서워서 탈출 방법으로 쓰기도 했다는데 남자도 쉽진 않을 일이지. 혹시 그 때 치마를 입었던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정말 그녀는 보이쉬하다. 오늘 그녀는 배낭에 청바지, 야상차림인데 숏컷까지 곁들여지면서 은하철도999의 철이를 떠올리게 한다. 여행하는 소년이랄까. 평소 때도 이런 모습으로  가장 편했다고. 그래서 오해 살 일도 많았다는데 혹시 이걸로 상처 받기도 할까?

 

도리어 즐긴다는데?

 

"남자친구랑 연애할 때예요. 같이 다니니까 지나가던 여학생이 쿡쿡대면서 말하는게 들려요. "야 나 '여자'인줄 알았어"라고요."

 

여자 맞는데?

 

"재밌어서 저도 남친도 서로 웃었어요. 그의 말이 '야, 너더러 여잔줄 알았대. 결국 너 남자로 알고 가네'라는데 저도 재밌어서 은근 그런 걸 즐겨요."

 

두 사람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 그 남친에게 있어 그녀는 동성적 특성만 어필하고 이성적 매력은 전하지 못했던가 아닐까 하여 내심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 남자친구가 바로 지금의 남편이란다. 아내의 그런 보이쉬한 점을 함께 있으면 재밌고 즐거운 매력포인트로 받아들였다네. 그래서 두 사람은 현재 아이를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한참 이쁘고 또 미울 나이의 사내아이. 어쩜 짱구와 닮았을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다.

 

그런데 말이다, 요즘도 이런 일은 현재진행형이라는데?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그녀는 본의 아니게 '소동 메이커'가 된다.

 

"제가 여자 화장실에서 손 씻고 있으면 아저씨가 순간 헷갈려하다가 제 얼굴을 보고선 '아하!' 하고 '확신'을 갖고 들어와요."

 

그러나 그녀는 암말 안 하고 그 과정을 즐긴단다. 내가 말 안해도 곧 있으면 안에서 다른 여자들을 보고 알아서 나간다고는 하는데... 아니 그건 그게 그런 문제는 아닌거 같은데.

 

"반대로 여자분들은 들어오다가도 저 보고 그냥 나가요. 저는 그런 거 보면서 씨익 웃어요. 재밌거든요."

 

학창시절에도 그랬다. 봉사활동을 위해 농활을 나가면 거기 사람들이 '아니 왜 우리한텐 여학생이 없고 죄다 남학생들이야?'라고 했다고 한다. 친구들이 '얘 여자애예요'라 하면 그래도 한참 수상하게 본다고.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너무도 즐겁게 꺼내는 그녀다.  

 

 

 

 

남자 아역 전문이 됐다

 

그런데 외모에서만 그런 건 아니라서, 그간 맡은 주요 작품을 보면 연기세계에서도 소년 역할이 많다. 스스로가 남아 전문이라 칭한다. 주요작 소개를 거슬러 올라가 확인해보면 대개는 소년 내지 '아주 어린 소녀'다. 특히 검색해보면 은근 놀랄 정도로 소년만화의 남아 주인공을 많이 했다. 성숙하고 섹시한 여자 성인 역은 별로 없다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성이 다른 배역이 자신과 잘 맞고 또 좋아한다고 했다.

 

"저는 렌턴처럼 고뇌하며 성장해 가거나, 타요마처럼 정의로우면서도 화를 낼 때 확 폭발하는 그런 아이들이 좋아요. 배틀짱의 유키도 신나고 후련했죠. 달리기하듯 감정을 드러내는 그런 느낌의 남아가 좋아요."  

 

 

 

출처 다음 영화 교향시편 유레카 7 게시판 - 어리지만 사랑하는 소녀를 위해 몸을 던질 줄 아는 소년 렌턴으로 열연했다 

 

그녀가 출연한 대표작을 보면 정말 남아가 많다. 언급된 랜턴, 타요마, 유키 외에도 인기작 블리치에선 주인공 못지 않게 골수팬을 보유한 멋진 소년 히츠가야 토시로 대장으로 출연했다.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역인데 차가운 면모를 표현하는게 어려웠다"고 한다. 유희왕 제넥스에선 예쁜 얼굴과 근육질 팔뚝의 요한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지난번 만난 여민정 성우와는 정반대다. 요조숙녀 전문이던 그녀는 남아에 욕심을 냈지. 이젠 짱구 짱아 남매로 만나게 됐네?  가만, 그럼 그녀는 거꾸로 여자 역에 욕심이 있는거야? 여자 성우가 여아에 욕심낸다는 것 자체가 뭔가 딜레마긴 하지만.

 

"맞아요. 주제넘지만 섹시한 연기나 그런것도 해 보고 싶고. 하지만 그보단 중년 아줌마 역할이 더 재밌을 거 같아요. 질박한 아줌마랄까? 미스 포와로 때도 그런 하녀 아줌마 할 때 즐거웠던 기억이에요."

 

"섹시한 역도 있잖아요 왜."

 

명탐정코난 극장판 3기에서 그녀는 고정배역인 세모 외에 스물일곱난 차이나드레스의 미녀로 나온 바 있다. 게다가 잔혹한 암살범이었지 아마? 당시 굉장히 섹시하다고 생각했고 자주 그런 목소리가 나오길 바랬지.

 

 

 

명탐정코난 세번째 극장판 '세기말의 마술사' 중 - 평소 들을 수 없던 성숙한 여인의 목소리를 들려줬던 포사청란

 

여자역을 좀 더 찾아보기로 하자. 이래뵈도 대표작은 아홉살 소녀 마루코가 아니던가. 비록 스스로가 일반적 여자 아이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말이다. 데뷔작인 체포하겠어에서도 여자 단역으로 나왔다. 다만 처음으로 맡은 비중있는 역은 남자인지 중성인지 아무튼 신비로운 봉신연의의 보현진인이었다는데 그건 잠시 제쳐두고. 

 

"그 외에도 트윈스피카에서 담임선생님이라던가, '엠마'에서는 그레이스로 나와 성숙한 목소리를 내 봤죠. 단편 '똑바로 가자'에서도 여아였고 꽃보다 남자에서도 여주인공 미소의 친구로 나왔고. 근데 그 정도가 십수년간 맡은 여성 캐릭터의 거진 전부예요."

 

앞으로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남아 역에 충실하면서도, 때로는 많이 해 보지 못한 여성 캐릭터도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재미있다고. 몬스터에서 뚱뚱한 도서관 사서 아줌마를 할 때라던가, 코난에서 단역 내지 증언자로 나오는 소소한 재미가 좋았다고 말한다. 여담이지만 지난 회 여민정 성우도 밝혔듯 한 때 코난에서 범인은 목소리만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게스트 성우가 나오면 백퍼센트에 가깝게 범인이었다. 혹여 극회 성우로만 진행된다면 이 때의 범인 배역은 여자일시 여민정, 남자일시 이주창으로 고정돼 있었다. (범인은 곧 미소의 엄마 아빠라는 묘한 공식이 성립된다) 

하지만 정작 여민정 성우는 다양한 성인 역을 맡을 수 있어 좋았다는데 시청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후 범인 배역은 맡을 수 없었다는데, 하필이면 성우 정선혜도 더불어 역풍을 맞았다고 했다.

 

"저한테도 자투리 배역은 잘 안 오게 되더라고요. 고정출연인 세모만 맡게 됐죠. 제게도 아쉬운 일이었어요. 여자 역을 할 얼마 안 될 기회였는데 말이죠. 정말 죽어라 남아만 파야 하는 운명인가 했어요."  

 

 

 

 

새로운 짱구 탄생, 원래 '짝퉁 짱구'였던 비밀은 아닌 이야기

 

짱구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왔다. 도라에몽과 더불어 캐릭터계의 양대산맥이자, 요즘 대세가 된 국산 캐릭터 뽀로로까지 합쳐도 남녀노소 가장 폭넓은 팬을 소화하는 것이 이 다섯살짜리 꼬마인데 목소리가 바뀌는 건 일대 사건이었다. 기사화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사실 워낙 박영남 성우의 파워가 강해서 말이다. 이래저래 후임으로서는 맘고생도 부담도 많았을 거다. 어쩌면 골수팬에게 미운털이 박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이전부터 그녀는 짱구와 인연이 깊었다. '짝퉁 짱구'로서 암약한 적이 있었던 거다.

 

 

 

 

투니버스의 주력 작품인 장수 시리즈 짱구는 얼마전 목소리가 달라졌다

 

 

"전속 때 한 적 있어요. ARS 생방송 때 제가 짱구 목소리를 냈거든요. 게다가, 공채 면접 때도 짱구 성대모사를 장기로 내보였어요."

 

"짱구가 합격에 도움을 줬을지도 모르네요."

 

"나름 저와 인연이 깊은 아이예요. 그랬더니 당시 '양산형 짱구'를 찾는 섭외건도 생기더군요. 그치만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 후엔 그런 섭외를 다 고사했어요. '다른 성우가 이미 맡고 있는 캐릭터는 흉내내지 않겠다, 도중에 그 성우가 그만두면 모를까'라고 말예요. 그게 그 선배님을 비롯 다른 성우들에 대한 도리라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짱구는 더 이상 인연이 없을 줄 알았죠. 그런데 말예요, 최근에 진짜로 박영남 선배님이 짱구를 그만두신거예요. 예전 내력 때문인가, 어떻게 하다보니 저도 후임을 찾는 오디션을 보게 됐어요."

 

'신' 신짱구가 결정되고, 후임자는 곧장 선임자를 찾아 황송한 마음으로 소식을 전했다. 사실 지난 십수년 활동하면서도 정작 '오리지날' 혹은 '진퉁' 짱구인 박영남 성우와는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

 

"오디션 결과가 나온 뒤 제가 그 분께 전화를 걸었죠. '선생님, 제가 선생님의 아이를 데려가게 됐습니다'라고요. 그런데 절 기억 못하시더라고요. '누구? 투니버스의?' 라고 물어보시더군요."

 

"짱구를 물려받게 됐다고 할 때 박영남 성우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유 그거 땜에 전화를 준거예요? 고마워요'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그 아이 맡아 잘 해주세요'라고 부탁하시더라고요." 

 

짱구의 바톤 터치는 그렇게 훈훈하게 이뤄졌다.

 

 

 

 

성우 정선혜가 첫 손에 꼽는 마루코

 

자신의 캐릭터 중 가장 아끼는 대표 캐릭터를 하나 꼽아달라고 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대로 마루코였다. 그녀에겐 첫 오디션작이자 주연작이라 가장 애착이 간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있어 몇 안되는 여아다.

 

"여아역은 잘하는 편이 아니거든요. 사실 처음 데뷔했을 때 많이 지적받았어요. 제가 쟁쟁한 4기 중에서 기교가 좋은 편도 아니었지, 게다가 목소리도 안 예뻤지. 처음엔 그래도 여자니까 여아 배역부터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아무리 해봐도 돌아오는 말은 '좀 더 예쁜 소리로 해 봐라', '목소리를 모아서 하라'였어요. 그치만 저한테 일반적 여아는 정말 안 맞는 소리기도 하고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나중에는 배역이 안 돌아오더라고요. 암울한 전속시절이었죠. 그런데 어느날 마루코를 만난 거예요."

 

 

 

출처 다음 영화 마루코는 아홉살 -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트로트도 좋아하는 마성의 여자아이다 

 

 

오디션을 통해 만나게 된 이 여자아이는 남달라도 너무 남달라서 도리어 남다른 여자 성우 정선혜와 코드가 잘 맞는 아이였다. 성우가 바라보는 분신 마루코는 어린 여자애지만 도무지 여자애가 아니었다. 능청맞고, 할머니 같은 아이. 애어른이기도 하고, 떼쟁이기도 한 아무튼 좀 다른 여자아이라 처음부터 지금껏 바라보던 여아와는 다르게 다가왔다. 덕분에 오디션을 보러 갈 때, 평소와는 달리 아주 맘이 편했다고 한다.

 

"붙으러 간 오디션인데'떨어져도 괜찮아'라고 하며 갔어요. 그랬더니 도리어 맘이 너무 편한거예요. 이건 책임 안져도 되니까요. 오디션은 배역을 받을 때와 달리 '못해도 망쳐도 누구한테 피해가 갈 일도 없고 그저 떨어지기밖에 더하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냥 나 자체를 보여줬죠. 편안하게, 꾸밀 것도 없이 마치 평소의 나 자신이 어린애로 돌아간 것처럼요. 절제하느니 차라리 맘껏 오버를 하자고 맘 먹었어요. 예쁜 느낌을 내어야 할 아이가 아니다 보니 도리어 자신이 있었어요. 정말 노는 것처럼 장난치는것처럼 신나게 연기했죠."

 

결과는 알다시피 성공이었다. 무엇보다 자신 그대로의 연기가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기뻤다.

물론 마루코가 쉬웠던 건 아니다. 너무 속도감이 빨랐는데 당시의 내공으로는 애 좀 먹었다. 사실 애니맥스에서 중고신작으로 다시 방영, 새로 더빙하고 있는  요즘도 어렵긴 하다고. 

 

그치만 정작 어려운 것은 연기가 아닌 노래였다 한다.  삽입곡 여자의 순정을 그녀가 불렀는데 이게 잘 안 되어 후배인 5기 현경수 성우한테 1시간 가량 노래 코칭을 받았다. 그 노래, 쉽게 만들어진 곡이 아니다.

 

 

 

 

불꽃 튄 적은 없었지만 즐기면서 출발한 성우 다이어리

 

언제 어떻게 성우가 될 생각을 한 것인지 물었더니 잠시 생각한다. 본인도 잊고 지냈다는 거였다. 사실 반드시 해야 겠다고 불꽃이 파박 튄 적은 없었고 소소한 일상에서 출발했다고. 되감은 기억 속에서 찾아낸 출발점은 중학시절이었다.

 

"중학생 때 임시로 대대장을 한 적 있어요. 조례 때 구호하는거요. 목이 후련한거예요. 그래서 목 쓰는 직업을 의식했죠."

 

이후 구체적으로 성우를 의식하게 된 것은 TV에서 우연히 본 앙케이트쇼였다고 한다. 성우가 등장해서 활약하던 편수였는데 그제사 저런 직업이 있는지 알았단다. 얼굴은 보여주지 않으면서 목소리만으로 끼와 표현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장난스럽고 재미있게 보였다고 말한다. 그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꿈많은 여고생 시절부터 여대생으로 이어지는 황금시대에 어느덧 그녀는 성우 지망생으로 살고 있었다. 사실 지망생 시절 두드러진 실력자는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몇년 안에, 몇살 전에 될지도 가늠하지 못했다. 그저, 여력이 될 때까지는 계속 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집안에서는 막내딸이었던 그녀,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 가족들이 그녀의 지망생활을 배려해줬다는 기억이다.

 

"제가요, 지망생 시절 소리가 독특한 편은 아니었어요. 스스로도 개성적인 목소리가 합격하기도 수월하다 생각했기에 희망을 갖지 못했죠. 수업을 들어도 전 평범한 학생이었고 연기력도 확실히 부족했어요. 그러다 1차 합격을 했고, 한번 찾아온 기회는 운좋게 결실을 맺었어요. 물론 전속 때 다시 빌빌대긴 했습니다."

 

눈에 띄는 지망생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다른 유망주가 1차 합격과 최종 시험 도전을 반복할 때 그녀는 1차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암만 시작이 좋아도 최종까지 붙지 못하면 허무하고, 또 과거 도전사가 화려하지 못했어도 딱 한번만 끝이 좋으면 다 좋은게 성우 시험이다. 한 번의 1차 시험 합격, 그 원 찬스로 끝장을 본게 바로 2000년도 투니버스 4기 공채라고 말한다.

그치만 산넘어 산이라고 전속 때는 그 이상으로 고전했다고도 말한다. '어두운 전속'이라고 까지 표현하는 건 마루코를 소개하기 앞서 밝혔지 아마?

 

"제 강점은 중성적인 부분이고, 나름 부각도 시켰어요. 그러나 초반에 중성적인 캐릭터를 맡다가 줄줄이 실패했죠. 그렇게 전속 시절은 암울했어요. 그치만 마루코 배역을 받게되면서 제 색깔도 찾았고 목표도 뚜렷해 졌어요."

 

"즐기면서 했단 말이죠."

 

"맞아요. 이후엔 이미자 선배님(MBC 은하철도999 철이 등 남아 전문으로 유명)처럼 힘있는 남아 역에 도전하겠다는 목표도 세워졌어요."

 

 

 

녹음이란? 좌절하고 가루가 되어 날아가고 지금도 나와 싸우면서 하는 것

 

 

 

출처 다음 영화 고녀석 맛나겠다 게시판

 

 

정작 인터뷰 때는 잊고 말하지 않았었지만 그녀의 작품 중 인상깊었던 작품 '고 녀석 맛나겠다'다. 선배 최재호 성우(투니버스 2기)와 호흡을 맞춘 이 작품은 육식공룡을 아빠라 부르며 따르는 아기 초식공룡 맛나로 출연해 관객들을 웃겼다 울렸다 했다. 롤 모델을 '이미자'로 콕 찍었길래 기억 난 건지도. 은하철도999의 철이처럼 친엄마를 잃고 다른 존재와 성장해 가는 모습이 닮아 있다. 

 

귀여운 캐릭터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짱구에서 피식자와 포식자의 경계까지 초월한 아기공룡 맛나까지. 그리고 멋진 소년의 영역에서는 순정으로 커가는 랜턴에서 이미 완성된 얼음의 무사대장 토시로까지. 그녀가 걸어가고 있는 길은 이제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점점 이어진다. 그러나 목표로 삼은 선배는 철이에서부터 아따맘마의 억척스런 엄마까지 전방위를 소화한다. 심지어 외화에선 섹시한 여인으로도 활약한 바 있다. 본인도 마찬가지다. 남아는 더 잘 하고 싶고, 여성 연기도 두루 잘 하고 싶다. 물론 쉽지는 않다고 말한다.  

 

 

 

 

"성우으로 살아온 13년은 적적하기도, 신나기도 했어요. 정체성 문제도 있었죠. 일이 없을땐 '난 백수인가?' 하고 자문하기도 했어요. 전 원판 성우와 비교하며 늘 좌절했어요. 난 너무 찌질해 보였고, 옵티컬의 정답은 너무 멋졌죠. 지금도 나는 마이크 앞에 설 때마다 나와 싸우면서 해요. 전속 땐 매일 하얗게 불태웠죠. 그렇게 말하니 열정적이었다고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처참히 부서지고 무너져 재가 되는 기분에 가까워요. 사실 지금도 부서지곤 해요. 때론 마이크 앞에서 모든 힘을 소진한 내 몸이 가루가 되어 훌훌 날아가는 기분이에요. 맡는 캐릭터마다 센스가 없어서인지 초반엔 감이 안 잡혀요.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보면 처음과 나중의 캐릭터가 달라요. 때로는 연기가 무성의하게 보여지기까지 하죠. 그런데 말이죠, 그래도 신이 날 땐 즐겁게 해요."

 

그녀에게 있어 앞으로도 연기는 늘 끝없는 도전이다. 은혼에서 캐서린을 할 때는 고양이 귀의 난해한 캐릭터라 한참 고생했다. 결국 눈에는 눈이라고 똑같이 난해한 발성으로 살렸다. 그러나 덕분에 그녀의 연기는 언제나 고민과 불꽃의 산물을 내 놓을 거라 믿어도 좋다. 매너리즘이라던가 똑같은 패턴으로 일관한다 같은 평가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하나가 하얗게 재가 되어 풀풀 날리면서 꺼내놓는 그녀 나름의 고행으로 빚은 역작이다.

 

현재는 카툰네트워크의 '육가네 쌍둥이'를 준비하고 있다. 신작 외에도 기존작들은 계속된다. 앞으로도 세모는 코난과 함께 계속 모험을 할거고 마루코와 짱구도 그렇다. 다만 수년 후, 수십년 후 그들은 성우와 함께 조금씩 달라져 있을 것이다. 어쩜 그녀가 지금도 한창 클 나이의 청소년처럼 잘 먹고, 활달한 것은 계속 성장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지금 데뷔 15년을 앞둔 성우 정선혜는 자신의 경력의 두 배인 30년차 선배를 지향점으로 삼았다. 다시 15년이 지나면 그 땐 또다른 15년차의 누군가가 그녀를 목표 삼을 거다. 확실한 것은 즐기면서 연기할 때 비로소 진가가 나오는 성우라는 사실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배낭여행을 떠날 것 같은 이 사람, 마이크 앞에서 설령 가루가 될지언정 즐겁게 부딪치는 이 활달한 성우는 정말로 여행하고 있다. 여행자는 하루하루를 양분 삼아 성장해 간다. 그렇기에 그 여정은 보는 이에게 늘 감동을 선사한다. 그래서 아름답다. 반드시 짙은 화장에 분내를 풍겨야 아름다운 여인은 아니다. 에너지 충만한 그녀는 그걸로 충분하다.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