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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 다이어리

[성우인터뷰] 이현진 "성우란 나이잊은 영원한 존재"

[성우인터뷰] 8. 이현진 "성우란 나이잊은 신비한 존재, 여러분의 영원한 '그대'로 남고싶어"

 

 

 

 

 

"이제 데뷔하신지가 벌써 17년차인가요. 곧 20주년을 맞으시겠군요."

"우와, 벌써 그렇게 됐다고요?"

 

그녀는 믿기지 않는 듯 한숨인지 웃음인지 묘한 소리를 낸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들려오는 음성의 그것은 여전히 소녀다. 17세 여신, 베르단디.

 

성우란 언제나 신비한 것.

아무리 듣는 내가 나이를 먹고 변해도, 세상이 모두 통째로 변해버려도 그 때 만난 그 목소리와 그 환상은 영원불멸한 것. 그녀는 성우를 그렇게 정의한다. 그것이 자신의 시간마저 조절하는 마법일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고대하던 인터뷰를 시작한다.

 

 

 

 

이현진

1995년 투니버스 1기 입사

 

명탐정코난 유미란 (투니버스)

로도스섬 전기 디드리트 (투니버스)

무시킹 포포 (투니버스)

신기동전기건담W 리리나 도리안 (투니버스)

몬스터 니나 (투니버스)

아즈망가대왕 조지나 선생 (투니버스)

카레이도 스타 (투니버스)

미나미가 하루카 (애니박스)

트리니티 블러드 에스델 (투니버스)

개구리중사 케로로 나라 (투니버스)

블리치 루키아 (투니버스/애니맥스)

눈의여왕 눈의여왕,해설 (오디언 라디오드라마)

 

 

 

 

 

오오, 나의 여신님?

 

오늘은 기자라기 보다는 한사람의 블로거로서 개인 이야기를 많이 할것 같다.

성우 이현진과의 인터뷰는 나에게 있어선 여러 의미를 갖는데, 연예인과 팬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녀는 '누나'고 난 누나를 연호하는 소년 팬이었다. 결혼 소식이 전해졌을 땐 농담 반 진담 반 삼아 '식음전폐'를 모 사이트에다 알리기도 했다. 그 이야길 들려주니 그만 입을 가리고 웃어버린다. 인터뷰 끝나고 "내 인생에서 가장 뜻깊은 두시간"이라고 인사하기도 했다.

 

내가 그녀 이름을 처음 안건 2003년 뉴타입 잡지를 통해서였다. (아스란이 표지인 4월호인가? 그랬을거다) 인터뷰 기사도 아니었고, 원작 애니메이션을 답습하는 명작 소개 연재였는데 로도스섬 전기가 나왔지 뭔가. 투니버스 더빙판 캐스팅에 디드리트 성우 이름에 눈이 갔으니 '이현진'이었다.

투니버스는 그때 볼 수 없었으나 원작 소설은 '마계마인전'이라 번역된 한국판으로 7권 전부 갖고 있었고, 이는 고교시절 나의 양분 중 하나였다.

그 작품의 신령하기까지 했던 여전사 디드리트의 성우라. 처음엔 '이현선'을 잘못 표기한게 아닌가 했다. 그때만 해도 투니버스 성우들 이름은 잘 모른데다가 천사소녀네티의 세인트, 카드캡터체리의 지수로 유명한 이현선(KBS 성우지만 라젠카, 슈퍼K 등 MBC 작품에서도 활동) 성우 이름이 워낙 강렬했기에.  

서울에 올라와 투니버스를 접하며 비로소 그녀 목소리를 만난다. 그런데 만나는 작품마다 '대박'이었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나올법한 목소리란 목소리는 전부 그녀 것이었고 실제로도 그 목소리는 '쟁반에 구르는 은방울 소리'란 표현에 딱이었다. 어쩌다 보니, 부끄럽게도 사심 가득 담아 팬이 됐다.

 

그랬다.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정말 많이도 여주인공을 꿰찼다. 본인 역시 "좋은 작품을 많이 했고 역할 복이 많다"고 인정한다. 실제로 그녀가 맡은 역할을 보면 애니메이션 좀 안다 싶은 친구들은 마음속의 히로인으로 새겨놓을 인물들을 '골라잡아' 할 수 있을 정도다. 오 나의 여신님에서는 17세 여신 베르단디를 맡았다. 로도스도전기에서는 판타지계의 요정인 하이엘프 디드리트였다. 만화책과 애니 모두 열성적인 팬을 보유한 걸작 몬스터에선 신비한 매력의 니나로 운명에 저항했고, 그리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만인의 추리명작으로 자리잡은 명탐정 코난에서 미란이 누나가 바로 그녀다. 소년 역도 맡아 숲속의 전설 무시킹에서는 사랑스러운 포포로 활약했다.

  

팬들은 그녀를 보고 나이 먹지 않는 아름다움이라 설명한다. 마침 베르단디를 맡았던 원작의 성우 이노우에키쿠코는 여사님 호칭을 거부하고 지금도 '방년 17세'라고 자신을 소개해 '17세 여신 교주님'으로 불리는데 묘하게 겹쳐 보이네. 중요한 건 그 작품 이름 그대로 나에게 그녀는 '오 마이 갓디스'라는 거.

 

 

 

출처 티스토리 블로거 포스힐러 bgm zone (http://forcealer.tistory.com/282)

 

 

숲의 요정 하이엘프 - 레이피어의 고고한 전설 디드리트

 

역시 로도스섬전기 이야기부터 꺼내게 된다.

판타지소설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구미권에선 '반지의제왕', 일본에선 '로도스섬전기'를 각자 대표작으로 꼽으며 이들은 동서양을 통틀어 세계 판타지 고전의 양대산맥으로도 불린다. 국내서 반지의 제왕은 3부작 영화로도 널리 알려졌고 로도스섬전기는 소설판과 애니메이션으로 골수팬을 모았다.

 

판타지 소년에게 있어 디드리트는 특별한 존재다. 불로와 아름다움을 겸비한 요정 엘프 중에서도 1000년을 산다는 하이엘프 소녀. 극중 인물들에겐 십수년이 흘러도 16살의 소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는 그 녹색 옷의 요정은 연상이자 동갑이요 연하로서 세대와 연령을 모두 아우르는 여성의 매력을 어필했다. 정작 투니버스에서 방영할 때 보지 못한게 한이다. 참고로 남주인공 판은 구자형 성우가 맡았다.

 

디드리트 이야길 꺼냈더니 그녀가 '비밀'을 공개한다.

 

"저 진짜로 엘프예요."

 

 

뾰족한 귀를 들춰보이며 지인들에게 종종 그런 말을 한다고 한다. 정말일까? 그래서 동안인 것인가.

디드리트는 개인적으로도 애정이 담긴 소녀다. 그 이름을 자기 예명으로 쓸까도 했다고.

 

"작품 후 영어학원 다닐때예요. 원어민 선생님이 수강생들에게 영어 이름을 하나씩 지어오라고 해요. 수업 때는 그 이름으로 불리죠. 저는 '디드리트'라 불러달라고 청했죠. 그런데 원어민 선생님이 생소한 듯 '뒤드릿?' 뭐 그렇게 부르며 고개를 갸웃하더라고요. 그 이름이 영어권에선 잘 안쓰이나 봐요. 게다가 막상 원어민의 발음을 들어보니 디드리트란 이름이 우리가 부를 때처럼 예쁘게 들리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뒤드릿?"

 

"뒤드렛이랬나?"

 

 

 

 

이중인격은 아니지만 다양한 모습이 공존하는 내 모습, 캐릭터마다 담았다

 

포털에서 이름을 검색하니 인터넷 인물사전이 화면에 걸린다. 본문 중 '이중인격 캐릭터 전문'이란 소개가 나온다. 개구리중사 케로로에서 나라로 등장했을때 그 소녀는 수줍은 소녀와 감정을 분출시키는 야성녀의 두 모습을 보였고 다다다의 크리스도 비슷한 케이스로 순간 목소리의 캐릭터가 확연히 달라지는 게 듣는 이들에겐 인상적이었나 보다.

 

실제로 나라처럼 성격이 확확 달라지느냐 물었다.

 

"그럴리가요."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나라를 연기할 때 자신의 경험과 공유하는 부분이 있던건 맞다고.

 

"나라의 우주를 향한 짝사랑은 내 경험과 같아요. 저도 비슷한 사연이 있었답니다. 연기하다보니 그녀가 갖는 감정선이 은근히 그때의 저와 비슷한 느낌이라 도움이 됐어요."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대표 캐릭터를 꼽으라면 역시 미란이 누나

 

 

가끔 방과후수업을 하다 초등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명탐정코난은 그들에 있어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다. 작품 중 그녀가 맡은 미란이에 대해서도 "다양한 모습을 가진 캐릭터"라 말한다. 혼자는 그냥 두지 못할 아버지를 챙기는 똑순이 딸이자 엄마가 하루빨리 돌아오길 기다리는 여고생, 부재 중인 남자친구를 향한 순애보의 소녀, 코난을 돌보면서 순간순간 눈물도 보이고 보호받기도 하지만 때론 쏟아지는 총격에서 코난을 감싸고 보호하기도 하는 어머니 같은 누나, 남자보다 뛰어난 무술 유단자 등 이런저런 모습을 미란이 하나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밝힌다.

 

 

 

몬스터는 이번에도 출연자에게 특별했던 투니버스의 걸작

 

그녀는 비단 미란이나 나라 같은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맡은 역할 하나하나가 자신의 단면적 모습 하나 둘은 다 갖고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몬스터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번 최승훈 성우와 김현지 성우 때부터 줄곧 이야기 나오는 작품 몬스터는 그 두사람에겐 '데뷔작'으로서 잊지못할 추억이었지만 1기 선배 이현진에겐 주연작이라는 또다른 의미로 남는다. 거기서 맡은 니나는 "나의 상념이 많던 시절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고 말한다.

 

"니나, 베르단디, 나라, 조지나, 미란... 다 좋았던 친구들이지만 이 중에서 니나는 가장 어려웠던 인물이기도 해요. 약한 듯 무너질 듯 보이면서도 끝까지 단서 하나하나를 희망처럼 부여잡으며 자기 운명을 스스로 열어가던 당찬 소녀죠."

 

가장 어려웠던 연기가 니나였구나. 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블리치의 루키아나, 캐릭터가 '독특하다'란 선을 살짝 넘은 미나미가의 하루카, 혹은 귀여운 가성으로 연기해야 한 닌자펭귄 땡글이 정도로 후보군을 잡았는데. 이들에 대해선 "모두 재밌게 연기한 캐릭터였고 루키아는 좀 힘들었던 정도, 땡글이는 의외로 쉬웠다"고 말했다. 

 

어째서 니나였던 걸까. 섬세한 심리 터치로 걸작 반열에 든 몬스터. 작품 자체도 그렇거니와 이 중에서도 니나는 연기하는 성우에게 있어 고도의 집중력을 요했다고 정답을 밝힌다.

 

"속내를 들어내는 신들이 하나같이 어쩜 그리 매력적인지. 집중해서 감정을 쫙 끌어내면 녹음후엔 피곤이 몰려와요. 그러나 제 능력을 '다 끌어냈다'고 자평할만큼 발휘하고 나면 시험끝낸 학생처럼 뿌듯했어요."

 

녹음이 진행될수록 성우 개인으로서도 흥미로웠다고 밝힌다. "니나가 이후 선생님(그러고보면 판과 디드리트 커플에 이어 이번에도 구자형 성우와 콤비다!)과 어찌될지 결말은 나도 궁금했었다"는 그녀. "좋은 캐릭터가 화수마다 등장하고 그 때마다 성우들이 새로 등장하는데 한편 한편마다 외화 더빙을 방불케 했다"고 밝힌다.

 

"단편적으로 출연했던 성우진 중엔 타 방송사의 대선배님들도 많았어요. 출연한 분들마다 이 작품은 좋은 작품으로 기억하지 않을까요."

 

연기자로 하여금 성우 본연의 잠재력을 모두 끌어내게 했던 몬스터. 투니버스가 이 작품을 다시 재방영해줄 기회가 있길 바랄 뿐이다.

 

 

 

 

연기란 답이 없어... 후배에게서 배우고 신선함을 채워간다 

 

인터뷰 연재 어느덧 8회차. 그녀는 지금껏 만난 성우 중에서는 최고참이다. 내일모레면 20년차 고지를 앞두고 있으니 이젠 중견급으로 무게를 달리할 만 한데, "연기는 답이 없다"며 아직 배울게 많다고 밝혔다.

 

"나이 어린 후배의 한마디가 신선하게 와 닿곤 해요. 때로는 나보다 훌륭하기도 하죠. 그럴 때면 스스로 상념에 젖길 '난 무늬만 선배인가'하고 탄식해요. 연기는 단순히 경륜이나 노하우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항시 여러 답에 문을 열어놓는 세계라고 답 아닌 답을 내놓아요."

 

앞서도 말했지만 내게 있어 이 여신은 실제로도 여신 캐릭터를 도맡았다. 그러나 "난 여신이라도 제법 소신있는 고집쟁이였다"고 말한다. 끝내 인간남자의 손을 놓지 않은 베르단디가 그랬고, 테러리스트에게 "왜 날 죽이러 오지 않는거야"라 외치면서도 비폭력 평화주의자의 공주님이었던 윙건담의 리리나도 그랬다. 여신이나 공주 뿐 아니라 어떤 캐릭터도 돌아보면 다 한 고집했다는 특징이 있다. 나라의 바보스러울만치 순박한 순애보도, 손에 꼽을만치 괴팍한 선생님이던 아즈망가대왕의 조지나 선생도 모두 그렇다. 포포는 신념 하나로 운명을 개척했고 니나 역시 언제 멎을지 모를 약한 심장을 가진 듯 하면서도 집념 하나로 해피엔딩을 맞는다. 그게 그녀가 맡은 분신들의 매력이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던 블리치의 사신소녀 루키아도 그 고집스러움이 매력이었지.

 

결국 그녀가 추구해 온 연기와 인물이란, 신선함과 신비로움으로 무장하면서도 우직할만치 고집스럽고 독특하면서도 당위성 있는 개성적 산물로 정의해도 될까. 중성적인 강인함과 사랑스러움을 겸비한 그것은, 불안정하지만 그렇기에 완벽에 가까운 매력덩어리가 아니던가.

 

 

 

 

얼음공주라니, 난 따스한 사람이라구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 팬들은 "얼음공주"라는 별명을 지어 불러주기도 한다. 가만 들어보면 때로는 차가운 얼음수정을 연상케도 하는 보이스. 1호선 지하철 중 하루 네번 운행하는 '민원전철999'에서 받은 무료 오디오북 다운서비스 작품이 우연히도 그녀가 출연한 '눈의 여왕'임을 깨달았을땐 "정말 눈의 여왕과 잘 어울린다"는 감상을 받기도 했다. 얼음조각이 잘게 부수어지듯 예쁘게 부서지는 그런 음색이랄까.

 

그러나 본인은 "난 평상시 따스한 역할을 많이 하지 않았느냐"고 밝힌다.

 

그러게. 생각해보니 그녀는 차갑고 냉혹한 악역보다는 옆 사람을 챙겨주는 선인으로 접한 기억이 압도적으로 많다. "리리나 도리안은 평소의 나보다 차가웠던 느낌으로 연기했다"고 밝히지만 그녀 역시 도도함 속엔 깊은 애정을 담은 인류통합의 지도자였지. (물론 건담 팬들에겐 여러 이유로 건담계 3대 악녀로 꼽히긴 하지만 --;)

 

그녀의 목소리에 대해 '차갑다'고 느낀다면, 그 차가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꺼내보자. 내가 느끼기로 그 차가움은 흔히 말하는 냉정, 비정, 냉혹의 성질이 아니라 아프고 열나는 이를 식혀주고 기분좋게 해 주는 청량함이다. 아이스크림처럼 기분좋은 차가움 말이다.

 

오늘따라 너무 애정과 주관을 담아 감상적으로 글이 향하는것을 어찌할 수가 없구나.

 

 

 

 

황금세대 사이에서 피어난 투니버스1기의 전설, "내가 소리를 만드는게 재밌어 시작했다" 

 

투니버스 극회는 지난해 8기 성우를 새식구로 맞이하며 이제 웬만해선 타 극회와 만나도 숫적으로 부족함이 없다. 케이블 방송 원년이던 1995년 개국한 투니버스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는 성우들의 활약도 한 몫했으며 특히 1기 성우는 상징적인 존재로 인식되기 충분하다. 지금은 '전설의 1기 선배'로 대접받지만 그 당시로서는 어려움도 많았으리라.

 

"현재의 후배님들은 투입 전에 선배나 PD하고 연구할 기회가 있지만 우리 1기는 그 때 그 때 필요가 있으면 곧장 투입됐어요. 본사에는 더빙스튜디오도 없었죠. 주변 녹음실 신세를 졌는데 주로 밤에 일했어요."

 

그녀에게도, 투니버스에게도 잊을 수 없는 초년병 시절의 작품이 있다. '뽀빠이'에서 조카 '펫빠이'로 나온 것이 전속 때 그녀가 처음 맡았던 비중있는 캐릭터였다고. '입을 뗀' 최초의 작품은 아마도 고인돌가족 프린스톤의 '레코드판 돌리는 새'였을 것이라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럼 그녀는 어떤 계기로 성우를 꿈꾸게 됐는가.

 

"중학교 2학년때, 그러니까 리리나와 동갑인 15세때네요. 초등학교때부터 웅변을 했고, 중학교 들어와서도 필요할 때마다 말하는 일을 도왔어요. 중2가 되면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스트레스 없이 살고 싶다'고 생각하잖아요? 와중에 어느 성우의 라디오 속 멘트를 듣고 '이거다'하고 깨달았죠. 사실 그 전부터 내가 소리를 만드는게 재밌긴 했거든요. 순간 느낌표가 딴!딴!딴!하고 세워지는 느낌이랄까. 즉흥적이었던 깨달음과 결심이에요."

 

MBC아카데미 방송문화원에서 성우반을 수료하며 지망생 시절을 열었다. 당시 같은 기수로 40명의 수강생 중 10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합격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놀라울 정도의 수치다. 그야말로 황금세대였던 셈이다.

 

"정남, 이철용, 안현서, 이장우,  박선영, 김승태... 그 때 함께 수학한 동문들이죠. 만나면 학교친구처럼 친근해요."

 

골든 제네레이션 중에서도 대표적인 꽃으로 활짝 핀 이현진 성우다.

 

 

 

내 스마트폰 속에 담긴 출연작 '눈의여왕'을 들어보며 자신의 목소리를 확인하던 그녀, 사진속엔 담지 못했지만 환히 웃었다 

 

성우는 언제나 그 자리에 추억 그대로 남아있는 존재, 난 그렇게 남고 싶다

 

"본인 목소리 맞으시죠?"

"맞아요."

 

출연진 소개 없는 라디오드라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본인 소리를 확인하고선 "제 소린 제가 잘 안다"고 웃는 그녀. 일전엔 엘리베이터에서 흘러나오는 안내목소리가 자신의 것임을 알고 "아 참 내가 전에 안내 녹음을 했었지"하고 혼자 웃기도 했다고.

 

이 인터뷰는 성우 개인의 이야기 뿐 아니라 하나하나 조각을 맞추어 가며 '성우란?' 이란 대명제의 거대한 퍼즐 하나하나를 맞춘다는 실로 거창한 플랜을 담고 있다. 성우 이현진에게 있어 성우는 어떤 존재인 것일까. 또 그녀는 어떤 성우로 거듭나고자 할까.

 

사실 그녀는 인터뷰를 하면서도 약간의 망설임을 가졌다고 밝힌다. 너무 내가 드러나지 않겠냐는 두려움이었다.

 

"저는 생각해요. 얼굴을 드러내는 일반 연기자는 자연스레 나이를 먹어가지만 그와 달리 성우는 늘 나이를 먹지 않는 존재라고. 어릴 때 그사람이 들었던 그 목소리의 아이가 수십년 지나 어른이 되어서도 그때 모습 그대로 곁에 있잖아요?"

 

그녀는 "성우란 그렇게 신비함을 간직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성우는 나이가 들어도 하이틴 역할이 많지 않느냐"면서 가능하다면 대중들에게, 팬들에게 그 때 감동을 주었던 환상을 그대로 간직하게끔 해주는게 소명이라고. 조금은 신비한 거리감을 두면서 영원한 청춘으로 낭만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성우의 퍼즐 중 하나였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도전해 보라"

 

이제 성우데뷔 20년차를 앞두고 있음을 말하니 스스로도 "우와"하며 감탄인지 탄성인지 탄식인지 묘한 한숨을 터뜨린다.

 

"실감이 안나요."

 

얼마전 들어온 투니버스 8기 전속성우들을 보았음에도 아직까지 실감이 안 나나 보다. 아울러 "선배와 후배는 동반자적인 존재"라며 본디 성우세계란 수평이 아닌 평행과 무한의 조합과 창조성을 가진 곳임을 암시했다.  

 

"성우가 되어 좋은 일이요? 중학교 때 기대했던 대로 너무 좋아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인컴'도 있으니 기쁘죠." 

 

최근 행복한 강아지 마사 3기 녹음을 마쳤지만 앞으로도 기존 작품의 새 시리즈며 해서 이어질 스케줄은 새해에도 많다. 꿈꾸던 이상의 만족을 느끼고 앞으로도 계속될 미래가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녀도 한번에 목표를 이룬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 때의 자신과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안다고 한다.

 

"그 마음 저도 알죠. 성우가 되고 싶다는 마음. 되기 전의 일이예요. 저도 그땐 정보를 얻을데가 없었어요. 그런데 은행에서 우연히 펼쳐든 잡지책에 어느 성우분 인터뷰가 실려 있는 거예요. 두근대며 그 자리서 그걸 읽었을 때 기쁨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물론 현실이란 것을 배제할 순 없겠죠.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사람은 그것을 이루고자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도전하시고 부딪혀보시고, 물론 깨질 때도 있겠지만 그렇게 앞으로 달려나가는 모습이 아름다운거 같아요."

 

마지막으로 그녀는 피터팬의 한 장면을 이야기한다.

 

"제가 조카들의 피터팬 책을 우연히 읽은 적이 있어요. 내용 중에 어떤 아빠가 나와요. 엄마가 아이들에게 '아빠는 하고픈 일이 있었는데 가족을 위해 그걸 희생하고 생계유지에 힘썼다'며 훌륭한 아빠임을 밝히죠. 그런데 전 공감이 안 가는거예요. 그럼 아빠의 인간으로서의 삶은 대체 무엇인가. 꿈꾸는 인간으로서의 매력은 느낄 수가 없었죠. 차라리 목표하고 도전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봐요."   

 

 

 

시간에 변하지 않는 존재. 그 때 난 메텔을 떠올렸다. 은하철도999에서 메텔은 철이와 헤어질 때 "안녕, 난 네 청춘의 환영"이라고 작별하며 여운을 남긴 바 있다. 성우 이현진 또한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남아 있을까. 한번 믿어보고 싶어졌다.

도전해보라. 깨지더라도 이루어보라. 그 이야기를 들을 때는 또 철이가 떠올랐다. 확약 없는 여행 속에서 끝까지 달려가던 소년은 어느덧 남자로 성장해 있었지. 역시나, 그것을 오늘도 믿는다. 성우 이현진이 맞추는 퍼즐 조각이 눈부시게 느껴졌다.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