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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보이 기사(newsboy.kr)/스포츠

차라리 잘된 박태환 부진, 우리에게 '달의 카드'를 제시하다

박태환 부진, 내겐 자만의 거울 깨뜨릴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 나타난 박태환 선수의 부진. 결국 자신의 주종목에서 힘을 쓰지 못했던 그는 마지막 자유형 1500미터에서도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자유형 200m에서 준결승 무대를 밟은 것이 이번 대회에서 가장 선전한 대목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한국 선수단 전원을 통틀어 가장 세계무대에 근접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남자 여덟명, 여자 여덟명. 총 16명 중 준결승을 치룬 것은 그와 정다래 선수, 단 두명. 그리고 한국 신기록 2개 달성 정도가 위안거리. 결승 진출자는 없었고 당연히 메달도 없다.

스포츠 섹션에서 언론들은 '로마쇼크', '박태환쇼크', '로마악몽'에 입을 모았다. 박태환의 신기루가 걷히고 한국 수영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며 분발을 요하는 칼럼도 이어졌다. 일주일간 심야 중계를 책임졌던 KBS의 한 캐스터는 최종일 중계에서 "한국 수영계엔 씁쓸한 기억으로 남게 된 올 대회"라고 자조했다. '아쉬운 교훈'이라며 의미를 찾는 이야기도 있다. 현재까지 나온 이야기들 중에선 그래도 가장 '포지티브'한 평가랄까.

글쎄. 그래도 내가 받아들인 것만큼 긍정적이진 않다. 난 오히려 '고마운 일'이라고 감사까지 하니까.

무더운 여름날 밤, 물살을 가르는 비주얼로 시원함을 선사해 준 대회중계지만 시청자는 그것을 곧대로 즐길 수 없었다. 한국의 부진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 저기서 '한국'을 지우고 '박태환'을 넣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나마 몇몇 선수들이 예선에서 조 1위로 들어오던 모습이 가뭄의 단비였다. 자기 기록을 15초가량 단축시키며 활짝 웃던 한 남자 선수의 미소는 개인적으로 꼽는 한국의 최대 성과다.

다행히 난 지난 한 주간 보다 편한 마음으로 시청할 수 있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수신'할 수 있었다는게 맞는 표현일거다. 나는 애태우다 못해 속이 타들어갔건만 넌 뭔 개뼉다구같은 소리냐고?

중계진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었다. "우린 그간 한국을 수영 강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라고. 박태환 선수 혼자서 만들어낸 엄청난 신기루였다. 그런데 우리 현주소는 이거다. 불모지에 떠오른 기적과도 같은 천재 하나를 빼 놓으면 세계의 벽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더라. 박태환은 '대들보' 정도가 아니라, '주인공' 정도가 아니라 거진 한국수영의 전부였다. 

덕분에 우린 멋진 꿈을 꿀 수 있었지만, 엄청난 착각도 동반했다. 한국이 언제부터 수영 강국이었지? 그러나 이번 대회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세계대회 메달을 의식하지 않았던가.

만일 박태환이 여기서도 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왔다고 가정해 보자. 설령 그것이 원맨쇼와 다름없는 결과였다 해도 우린 역시나 '한국은 틀림없는 수영 강국이다'라고 무의식중에 결론 내려버리지 않았을까. 박태환이 사라져버리는 순간 완전히 걷혀버릴 신기루임을 체감할 수 없었을 터.

수영만이 아니다. 이 대회를 보고 있자니 우린 정말이지 많은 곳에서 허상을 보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같은 스포츠 영역을 놓고 보자면 피겨의 김연아 선수가 그렇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지난 수년간 그녀 한사람 덕분에 '피겨 강국'이라는 엄청난 자부심을 얻지 않았느냔 말이다. 연아 없으면 세계 수준에 걸맞는 선수가 어디에 있지?

그리고 이를 넘어서 우리들 자신, 개인의 면목 하나하나를 들춰보자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면 당신도 나와 동지다. 평소 때 '내가 이거 하난 자신있다'며 은근히 속으로 자신하는 것들이 저마다 있었을 터. 물론 그것을 뒷받침 하는데는 과거에 있었던 멋진 경험이나 결과의 기억이 수반될 것이다. 그건 틀림없이 부정할 수 없는 각자의 보물이다. 다만, 한두번 정도 성공한 기억을 잠시 치워두면 곧장 그 믿음이 흔들려 버릴 때, 그건 분명 문제이지 않을까. 당장 시련이 닥치면 '그건 우연이었어'하고 자조할지도 모르는, 각자의 신기루 말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정도는 쌓아 둬야 진짜 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지"라며 일정한 기준을 갖고 꾸준히 정진해 온 것이 얼마나 될까.

박태환은 '초심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우리로선 격려의 박수부터 보내야 할 각오다. 이미 몇차례에 걸쳐 절대 우연이 아님을 연거푸 증명해버린 젊은 챔피언의 다짐. 우린 한번의 실패로 저런 마음가짐을 쉽게 가질 수 있는가?  헌데 뉴스댓글란엔 악플이 벌써 저만치 쌓여있다. "돈맛을 알았다"라던가 하며 깎아내리기 시작한 글들. 악플 아니고 뭔가? 악플은 꾸준히 정진하지 않아도 좋을텐데.

타로트 카드 중 '문'(moon) 카드가 있다. 스물두장의 메이저 카드 중 하나다. 달을 상징하는 이 카드의 정위치 의미는 사실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에너지가 넘치는 태양의 카드와 달리 이 카드에 깃든 달빛은 불안감과 초조함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카드는 방향이 바뀌는 순간 사뭇 달라진 분위기를 연출한다.

'달은 거울. 자신의 진짜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는 용기의 순간, 해답이 나올 것이다'

오만하고 자만에 빠져 있던, 혹은 애써 외면하거나 망각하고 있던 실제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용기. 자만에 얼룩진 거울을 깨고 참된 거울을 마주하는 그것은 만인, 만사, 만물의 시작이다. 그래서 나는 이 카드를 좋아한다. 아프지만 기꺼이 감수할 가치가 넘쳐나는 성장통이 아닌가.



아울러 이번 대회를 보며 '그럼 그렇지'라고 쓴 맛만 느낄 필요도 없다. 우린 이렇듯 얻을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다. 박태환과 더불어 당신 역시 다시 출발선상으로 돌아갈 여유가 풍족한 젊은이라면 더할 나위없는 축복이다.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