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저널리스트의 이야기] 4. 기자, 챔피언에 바친 진혼곡
'최요삼, 미안합니다'... 이충원 연합뉴스 체육기자의 이야기
# 인터넷 시대를 맞아 언론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인터넷 저널리스트들의 이야기. 인터넷 기자, 블로거 기자들이 털어놓는 오늘날의 좌충우돌 스토리를 들어본다.
"최요삼, 미안합니다."
이것은, 기자가 블로그에 담은 참회록. 그가, 챔피언에 띄워보낸 진혼곡의 서장이다.
▲ 출처 스포츠코리아
4. 기자, 챔피언에 바친 진혼곡
오늘(25일)로부터 1년전, 2007년 12월 25일의 서울 광진구민체육센터 특설링. 인터컨티넨탈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최요삼은 도전자 해리 아몰을 맞아 1차 타이틀 방어전에 성공했다. 12라운드 사투 끝에 거둔 심판전원 판정승. 크리스마스 선물로 약속했던 승리의 벨트를 지켜냈다.
그러나 챔피언은 자신의 발로 링을 내려오지 못했다. 곧장 실신해 들것에 옮겨져 병원으로 향했고, 그 때부턴 그의 삶에 있어 열흘간의 마지막 사투였다. 이 나라, 이 시대 마지막 챔피언의 최종전.
팬들은 그 어느 경기보다 열심히 그를 응원했다. 뇌수술과 '의식 회복 가능성 10%'의 절망적인 의사 소견, 그리고 뇌사 판정까지 이어지는 절망의 파노라마에서 팬들은 끝까지 희망을 노래했다. 네티즌들은 댓글로 챔피언을 연호했다. 그러나 기적은 없었고, 결국 그는 여섯명에게 새 생명을 주고 인생에서 은퇴했다.
그 열흘간의 처절한 사투 속에,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드스토리가 하나 있다. 지금 밝히는 것은, 한 기자가 챔피언에게 띄워보낸 블로그 속 고백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라는 표현은 피 냄새가 싫다는 말 앞에 쓰여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최요삼, 아니 요삼아... 형님이라고 부를 때 다정하게 응답해 주지도 않고... 정말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 본문 中 (원문 http://blog.yonhapnews.co.kr/chungwon/post/109321/)
연합뉴스의 이충원 체육기자는 2007년 마지막 날, 그러니까 그가 사망하기 사흘 전 '최요삼, 죄송합니다'란 글을 등록했다. 데스크에 건네는 송고 기사가 아니었다. 자신의 블로그에 등록한 비공식 기록,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사자가 직접 건네 읽지 못할 비망록이었다.
그가 최요삼을 처음 만난건 그 해 5월.
"왜 다시 링에 올라가지요?"
2005년 은퇴, 그리고 2006년 복귀한 전 세계챔피언에게 그는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매달 2~300만원의 월급을 약속받는 직장을 가졌음에도 다시 링에 오른 것은 돈 때문이라 보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런 그의 질문에 최요삼은 웃으며 답했다.
"기자님은 공부 열심히 해 좋은 대학 나오고 기자가 되셨겠지만 전 잘 하는게 복싱 밖에 없습니다. 인기가 없어진 복싱이지만 전 거기 올라야만 사람들이 알아줍니다..."
그는 이해했다. 하지만 이어진 두 가지 말은 이해하지 못했다. "돈보다 중요한게 있다"와 "저 푸른 초원위에 집을 짓고..."라는 게 그것이다. 이를 이해한 것은, 한참 후 그의 일기를 보고나서였다.
"최요삼은 제가 재미있는 기자라 생각했는지 형님으로 부르겠다, 가끔 전화해도 되겠느냐, 스폰서 딸 때 도움 좀 주시라 등으로 살갑게 대했습니다. '이 녀석 보통 단수는 아닌 걸'이라고 느꼈습니다." - 본문 中 이충원 기자
이 기자는 이후 그의 말을 곧이 믿지 않고 의심하려 들었다고 술회했다. 스폰서 딸 때 도와달라던 그였지만 정작 후원 계약 보도자료가 나왔을 시엔 기사를 쓰지 않았다. 상대선수인 오니시 겐이치가 일본 랭킹 10위 밖인 것을 확인했을 땐 그 사실을 명기했다. 인터콘티넨탈 챔피언에 올랐을땐 세계챔피언이 아니라 동양챔피언에 해당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최요삼이 재미있는 경기를 한다는 생각에 꼭 그의 경기는 링을 찾아가 확인 후 기사로 내보냈다. 모든 것이 팩트에 의거하는 기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게 '그는 이런 선수'란 편견이었다.
꼭 옆에서 최요삼의 경기를 봤다는 그가, 25일 그날만큼은 링을 찾지 않고 TV중계로 지켜봤다. 승리 후 쓴 첫 기사는 이거였다.
'가까스로 방어.'
이후 그는 사실대로 쓴다고 했던 자신의 기사가 너무 시니컬했음을 고백했다. 그의 뇌수술 후 다시 읽어보니 돌팔매질과 다름 없었다고.
▲ 최요삼의 2007년 12월 25일 1차 방어전. 링 위에서의 이 마지막 경기로 그는 영원한 챔피언이 됐다. 출처 스포츠코리아
사고가 벌어지고, 병원엔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이 기자 역시 병원에서 그의 현황을 연일 내보냈다. 담당기자로서 많은 회한이 몰아쳤다.
"최요삼이 나한테 뭘 잘못했다고... 싹싹하게 굴었을 뿐인데...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설마..." - 본문 中
깊은 밤, 사람들 대부분이 돌아간 뒤에도 남아있던 그는 동생 최경호 씨와 만나 이같은 일들을 털어놨다. 그의 '미안하다'는 말에 최 씨는 "정치나 사회부가 어울릴 차가운 기자"라고 답했다. 27일 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촌지라도 받길 원했는데 안 줘서 그런 겁니까... 열심히 산 것 뿐인데... 다이어리가 있기에 들춰 봤더니 형 일기예요. 맞는게 무섭다는 글에 울었습니다."
다음날 일기에 관한 기사를 내보내면서 그는 그제서야 "저 푸른 초원 위에"라던 말의 뜻을 깨달았다. 그것은 "피 냄새가 싫다"는 말의 앞에 쓰여져 있었다.
"최요삼이 진짜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은 '무서워요, 그래도 참고 올라가요. 나 좀 봐주세요'가 아니었을까. 사람들이 그에 듣고 싶은 진심도 저것이었나... 의사소통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생각합니다. 난 최요삼을 이해하려 않고 내려다보며 판단했고 재단하려 했구나. 스포츠부에 오기전 스포츠기사에 가진 불만이 이것이었건만!" - 본문 中
그는 "기적이 없어 뇌사판정이 내려지면 이런 반성을 그에 전달할 수 없다"며 "너무 늦었다"라고, "그가 쓰러진 뒤에야 이런 반성을 하게 됐다"고 토로했다.
"최요삼, 요삼아. 형님이라 부를 때 다정히 응답해주지도 않고... 정말 미안하다." - 본문 마지막
기적은 없었다. 그의 글이 오르고 사흘 후 챔피언은 생애 마지막 라운드를 끝내고 안식에 들었다.
글을 읽고서 기자는 그에 회신을 건넸다.
"이 이야기, 알려도 괜찮겠습니까..."
며칠 후 그의 답신.
"블로그의 글은 공개하고자 쓴 것입니다."
이미 작년 일이다. "얼마든 써도 좋다"는 수락을 받았지만, 정작 기사는 1년이 지나서 이제야 내보내게 됐다. 잊혀져 가는 이 시대 마지막 챔피언, 고 최요삼의 1주기를 앞두고 그 최종라운드를 또 한번 기억하며.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