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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보이 기사(newsboy.kr)/칼럼

베르테르 효과를 깨닫다 [오아시스]

[오아시스] 베르테르 효과를 깨닫다

# 여기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선, 네티즌과 시티즌의 담소터.


쇼생크 탈출의 레드가 꺼내던 대사, 잠시 빌려 각색해볼까.

내가 잘 아는 녀석이 하나 있다. 친근하지만 빌어먹을 자식이다.

재능은 개뿔도 없는 게 꿈은 원대하게 가졌다. 그래, 꿈을 먹는 건 좋다 이거다. 그럼 남보다 배로 노력을 하던가. 이 빌어먹을 새키야.

이번에도 헛주먹을 날렸다. 또 자학을 시작한다.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후회를 읊조리고...

그래, 그러다가 이번에도 며칠 안가 훌훌 털어버리겠지. 그리고 다시 희망 고문. 그렇게 또 다시 1년을 기약하고...

야 이 말도 안 들어 처먹는 새키야.

...너무 각색해서 마치 오리지널같군.

 

44. 베르테르 효과를 깨닫다

 

실의에 빠졌다. '죽고 싶다'라... 그래, 한국인들이 너무 많이 남발한다는 그 말, 이번만큼은 남용해도 뭐라 할 사람 없겠지.

뭔가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다. 그렇다. 현재진행형이다. 20대의 객기로 "꿈도 없는 녀석보단 자신있게 목표를 떠벌이는 내가 훨씬 대단해"라고 자신했다. 꿈만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조금은 더 허용되겠지라며 모르핀을 심장에다 한번 더 꽂아넣는다.

너무 과한 꿈이었다. 반면 노력은 빈곤했다. 노력하는 자가 웃는다는 세상의 법도에 맞게 이번에도 좌절을 맛봤다. 더이상은 "아직 젊으니까..."란 자위를 편히 할 수 없다. 짧은 듯 보낸 수년의 시간이 이젠 차가운 족쇄처럼 냉기어린 무게를 전달해 온다.

난 언젠가부터 일부러 입버릇 하나를 만들었다. "서른번째 생일을 맞을 때까지 이루리라, 혹 실현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란 자기 암시, 그리고 실제로 몇몇 사람에게 이를 잘도 지껄였다.

물론 진심으로 실행여부를 검토하고 꺼낸 말은 아니었다. "이 정도 각오는 해야 그 '타임리미트' 때문에라도 각성할 것이다"란 채찍질의 계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건 불교의 윤회사상 때문. "가능성이 없다면 빨리 죽고, 또 빨리 환생해 새 삶에서 다시 도전하겠다"는 말을 언제나 저 뒤에 덧붙였다.

그리고 그 제한선은 점차 나를 옥죄어온다. 시간은 너무나 빨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이를 다시 곱씹게 된 오늘, 다른 사람의 비보가 남일같지 않게 전해졌다. 어제, 이서현 씨의 사망 소식. "하느님 곁으로 가고 싶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맨 청년의 이야기. 여기서 현시대에 드리워진 고리의 그림자를 본다.

'인생은 바람같은 것'이라며 두달전 사라져간 모델 김지후. '하느님 곁으로 가고 싶다'는 어제의 이서현. 그리고 그 외에도 계속 떠오르는 이름들. '베르테르 효과'란 말은 이 끝자락을 잡고 뒤따른다.

"안타깝다"란 애도 대신, 한 프레임의 찰나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이건 또다른 모르핀이었다. "...이 섬뜩할 게 뭐 있나, 저들도..."란 생각.

그런데 역시 한두 프레임의 찰나, '이건 아니지'라며 섬뜩함을 느낀다. '이것이 베르테르 효과인가'란 자문은 곧 '무섭다'란 답변으로 성질을 달리 했다.   

난 여기서 자살이 죄악이라 주장하고 삶을 강변하는게 아니다. "이 좋은 세상 놔두고 왜 가느냐"란 어느 누구의 낙천적 말도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라며 힘든 삶을 포기않는 누군가(예를 들면 지난주 만난 이영학씨)의 말도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르테르의 "몸의 불치병으로 죽어가듯 마음의 불치병으로 인한 죽음이 자살인 것을, 그 누가 무슨 자격으로 비난하느냐"는 외침 또한 진지하게 고민한다.

세상을 등진 저들의 것이 베르테르의 외침과 같은지, 아니면 베르테르 효과라 명명된 지금의 어두운 시류에 동승한것인지, 혹 내 것의 변형된 형태인지는 본인들만 안다. 그래서 저들의 죽음은 거론하지 않는다. 말하고자 함은 이것 뿐. 이번에 깨달은 베르테르 효과의 실체가 그저 '당신들도 그랬으니까'란 실행의 촉진제라면 난 그것이 공포 그 자체임을 자각한다. 어느새인가 무엇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그 원문조차 망각하고 사회에 깔린 저 슬픈 흐름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는 무서운 시대다. 악마의 속삭임과 다를 게 뭔가.

나 역시 죽음을 입 밖에 내고(설령 그것이 삶과 꿈을 위한 수단일지라도) 베르테르의 외침에 고민한다. 그래도 이것은 안다. 그저 망설이다 "남들도 하는데 나도 하겠다"며 내린 결정이라면? 자신의 결론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타인들의 저것이 요소로 작용했다면 그건 "대체 넌 왜 죽었느냐"란 질책을 면할 수가 없다. 베르테르의 외침을 꺼낼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베르테르는 철저히 자신의 삶을 놓고 고민했고 마지막까지 꿈을 꿨다. 마음의 불치는 남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내린 판정이었다.

진정한 베르테르 효과란 그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고뇌하고 바라마지않는 것을 찾아 헤매는 이가 늘어나는 것이지(어쩜 결말은 그와 다를지도 모른다), 그저 죽음의 공기에 심취해 동행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내가 깨달은 의미는 이 쪽.      

삶의 스위치를 내리는 판단엔 수많은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삶에 절망하는 이유는? 죽음까지 생각하는 이유는? 그건 바람 때문이다. 이는 여러가지로 표현될 수 있다. 각 단어마다 어감도 극과 극이다. 과연 꿈과 욕망의 차이는 무엇인가. 헛된 야망과 궁극의 신념은 또 어디서 갈리는가.

삶과 죽음의 선을 고민할만큼 이것은 가치있는 것일까. 어째서 이것은 이토록 강하고도 지독하며 또 매혹적일까. 이루지 못해 삶에 무감하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 삶의 목적인 것인가. 어째서 이것은 광범위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각자에게 찾아와 저마다 다른 모양새의 꿈을 꾸게 하는가. 베르테르처럼 그 대상은 여인일수도, 혹은 나처럼 유년시절부터의 오랜 여정일수도, 또다른 것일수도 있지 않은가.

생명을 약동케 하는 원천인가 아님 죽음의 씨앗인가. 당신에겐 이 중 어디로 작용하고 있는가. 혹 이것은 당신 스스로에 기인한 것인가. 행복은 정녕 선택된 이들만의 것이며 고통이 그렇지 못한 다수를 얽매는 것은 무엇을 위함인가. 혹 스스로 쟁취할수 있진 않을까. 최선이라 부를 노력은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난 내 꿈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는가. 이룬 뒤의 것이 허망함인지 진정 찾아 헤매던 것인지 여부는 행복한 이의 고민으로 제쳐두도록 하더라도...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 이렇듯 인간은 답을 내릴 수 없기에 신이 주신 생명을 함부로 내버리지 말라는 주장이 가능한지도 모른다. 반면 이 모든 질문을 스스로 꺼내 마주할 수 있기에 마지막 판단조차 자신의 권한이라 주장함이 허용될지도 모른다.

이 모든 자문자답을 선행하고서 베르테르와 마주앉았는가. 해답은 스스로 내릴 수 밖에. 다만 철저히 자신의 삶과, 여기까지 닿게 한 고통의 실체를 꺼내어 마주하고 답하라. 그 답이 무엇이든 주체는 시류가 아니라 자신이어야 한다. 번복의 기회가 없는 단 한번의 것이니까. 남이 자신의 삶을 사는게 아니듯 죽음 또한 남이 정해주지 않으니까. 그 조차 삶의 선택지 중 일부니까.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