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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태지, 기억하시나요?

염태지, 기억하시나요? 
염종석, 찬란한 슈퍼루키의 추억 남기고 퇴장


▲ 출처 스포츠코리아  
 


92년, 염태지를 기억하는가.

"서태지가 아니고?"란 반문 속에서 고개를 끄덕인다면 당신은 롯데자이언츠의 십수년지기임을 보증한다. 가판대 스포츠신문 1면에 '염태지'가 커다랗게 인쇄됐던 과거, 이젠 정말로 과거형이 된 오늘이다.

롯데자이언츠의 염종석 투수가 은퇴했다. 구단이 1일 그가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코치연수를 떠난다고 밝힌 것. 관련기사는 포털 메인을 장식했고 롯데자이언츠 홈페이지(http://www.lotte-giants.co.kr/)에선 "영구결번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롯데자이언츠 갈매기마당 홈페이지. 영구결번 목소리가 길게 이어진다  
 


92년 즈음 태어난 소년 야구팬들에겐 '저 아저씨가 대체 누군데'란 반응이 나올 법 하다. 그러나 그 해 롯데의 우승을 지켜본 청장년 팬들에겐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 프로야구 역사를 통틀어 '슈퍼루키'라는 별명이 그만큼 어울릴 투수가 얼마나 더 있을까. 내게 어린이 야구팬이 '그가 누구냐'라 물어온다면 "17년 전의 류현진 형"이란 답이 꺼내보일 수 있는 최선이다.

부산시민의 롯데자이언츠를 향한 애정이야 한결같지만 특히나 92년의 야도 부산은 뜨거웠다. 그 시즌 롯데 자이언츠의 V2는 더할나위 없는 드라마 각본이다. 지난 몇년간의 부진을 털고(8년만의 가을야구가 화제가 된 올해지만 앞서 80년대후반에도 오래도록 부진을 겪었다) 91년 박동희를 위시해 분위기를 고조, 돌풍을 예고한 롯데는 92년 금자탑을 쌓는다. 기존 스타들의 맹활약은 물론이요 눈물의 빵으로 기억되는 무명고참들의 재기, 샛별처럼 등장한 신인들의 분전 등 팀 전체가 뉴스메이커였다.

박정태를 비롯 팀 전원의 응집력과 팀웍은 스타 플레이어에 의존하는 강팀의 것과는 또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전준호는 '대도'로서 악명을 떨쳤다. 홈런이 유독 적은 팀이었지만 그래도 '자갈치포' 김민호가 있었으며 소총부대로 불리던 타선의 스타일은 그 나름대로 흥미로웠다. 그리고 최고 자랑이던 투수진.

그 해 구축됐던 막강 트로이카 박동희-윤학길-염종석의 라인업은 투수 왕국 해태 타이거즈가 부럽지 않았다. 윤학길은 견고했고 '160km' 박동희는 절정기에 있었다. 그리고, 염종석.

'고졸루키' 염종석은 이 팀에서도 최고 관심사였다. 믿기지 않는 배짱에 기인한 147km 투구는 현란하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각 팀 강타자들을 능욕했다. 그에게 있어 '풋내기' 시절이란 처음부터 없었던 셈이다. 좀체 흔들리지 않는 막내의 분투는 선배들에게 옮겨붙는 바이러스와도 같았다.

그에겐 언젠가부터 '염태지'란 별명이 붙었다. 소녀팬들에 싸여 사인공세를 받는 이 소년의 사진을 1면에 게재한 스포츠신문의 데스크는 '염태지'를 메인 제목에 걸어 웃음을 자아냈다. 같은 해 연예계에 핵폭풍을 일으킨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따온 별명. 혜성처럼 등장한 스타, '무서운 아이'라는 타이틀, 그리고 은테 안경의 분위기까지 엇비슷한 점이 많았기에 가능했던 별명이다.

데뷔 시즌 그는 17승 투수가 됐다. 방어율 1위에 다승 3위, 그리고 신인상과 골든글러브를 움켜쥐었다. 이만하면 루키를 넘어 또 하나의 에이스. 그해 MVP 박동희와 동일 승수의 윤학길하고 나란히 둔 채 굳이 에이스를 고르는건 무의미한 작업일지 모른다. 포스트시즌에서도 그는 백전노장처럼 던졌고 팀의 우승에 있어 1등공신이 됐다.

    

  
  ▲ 2001년 SK전에서 프로통산 40번째 1000이닝 투구를 기록했을 때의 염종석(출처 스포츠코리아)  
 


'초딩의 추억'을 꺼낸다.(우리땐 국민학교로 불렸지만) 사직구장에서 봤던 해태타이거즈와의 플레이오프 4차전을. 높은 1루측 관중석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투구는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빨라 보였다. 그의 공은 살아있는 듯 방망이를 비껴갔다. 경기장서 미아가 됐던 아이를 되찾은 한 관중은 "염종석의 투구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 아이가 없어진지도 몰랐다"고 밝히기도. 당대 최강의 해태타이거즈는 그에게 완봉으로 묶였고 만원관중은 그를 영웅으로 대접했다. 어쩜 그 기억 때문에 오늘의 은퇴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지 모른다.

그 시점에서 그는 한국야구의 보배였다. 앞으로 용이 될지 사자가 될지 알 수 없는, 이미 처음부터 '완성된 투수'였다. 그 때만해도 그가 롱런하며 대투수가 될 것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후의 내리막길은 롯데 뿐 아니라 모든 야구팬들에게 더할나위 없는 아쉬움. "그가 언제 부상에서 돌아오나", "수술은 어떻게 됐나"라며 부산 팬들이 '92년 염태지'를 줄곧 그리워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제 염종석은 마운드에서 이름을 지운다. 그러나 롯데 팬들은 영구결번을 외치며 영원히 이름을 기억하고자 한다. 입단 후 지금까지 한번도 팀을 떠나지 않고 같은 구장에서 은퇴하는 롯데맨이란 사실도 그 각별한 애정의 또다른 사유다. 그 누구보다도 강렬했던 첫인상의 프랜차이즈 스타에게 부산갈매기들은 지금, 기립박수로 배웅에 나섰다.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