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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으로 보는 한·일 야구 준결승, 영화같았던 이모저모

배역으로 보는 한·일 야구 준결승, 영화같았던 이모저모
감독, 각본, 연출, 주연, 조연, 악역, 나레이션 등 결산



감독 - 김경문

'김 작가'라는 별칭이 오늘만큼은 거북치 않을 것 같다. 아슬아슬한 명경기를 연출해 보이면서도 결국 승리를 쟁취, 한국야구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화제작의 명장으로 우뚝 섰다. 대타 성공, 흔들림없는 중용에 따른 최상의 댓가 등 용병술과 혜안 모두에서 찬사를 받게 됐다.

지난 예선 미국전과 일본전에서 그는 승부의 향방을 결정짓는 곳마다 대타를 내보내 성공했다. 미국전 9회말 정근우, 일본전 9회초 김현수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면 시나리오는 대거 변경됐을 것이다. 그리고 이 날 경기에서 그의 부름을 받은 건 이진영. 그는 동점타를 만들어내 또한번 최상의 시나리오를 위한 전주곡을 선사했다.

뚝심의 신뢰와 중용 역시 대성공. 약관 21세(한국나이)의 김광현을 8회까지 올려보내 결국 일본을 두번 울린 것은 강철심장이란 말 밖엔 마땅한 표현이 없다. 여기에 극심한 슬럼프로 이 대회 3안타에 그친 이승엽을 끝까지 4번에 기용, 정말 중요한 마지막 순간 드라마 같은 2점 역전포를 쏘아올리게 했다.

이만하면 이번 대회 및 준결승전은 올해 야구가에 최대 흥행작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지 않을까.


각본 - 청춘 배터리 김광현, 강민호

패배한 일본 입장에선 또한번 경악할 사실이 있다. 이 날 한국 팀을 이끈 배터리는 관록의 콤비가 아닌, 시퍼런(?) 총각들이었던 것. 8회까지 마운드를 지킨 김광현은 88년생으로 올해 성년의 날을 맞은 소년. 그리고 그를 이끈 것은 한국나이로 쳐도 약관 24세인 강민호. 진갑용을 대신해 오른 그는 김광현과 함께 2실점으로 일본을 묶었고 타격에서도 쐐기포를 쐈다.

그렇다고 두 선수가 한솥밥을 먹는 사이도 아니다. 각각 SK와 롯데에 적을 뒀으니 일본 입장에선 "급조된 애송이 콤비한테 당했다고!"를 외칠법도 하다.

최강의 드림팀으로 금메달을 노렸던 일본은 이렇듯 준결승에서 이름도 잘 모르는 두 청년 각본가들에 휘둘려 버렸다.


주연 - 드라마의 사나이 이승엽 

영화 메이저리그를 보면 부두교 신자인 슬러거가 등장한다. 직구는 밥이지만 변화구는 쥐약, 부두신에게 담배를 바치며 "변화구 좀 치게 해달라" 기도를 올려도 진전 없던 그였기에 결승상대 양키스는 철저히 변화구로 승부한다. 7회까지 꽁꽁 묶이며 이름값은 커녕 쉬운 요릿감으로까지 전락하는 강타자. 그러나 정말 결정적 순간 각성, 단 한방으로 경기를 뒤집어 버렸다.

이승엽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것이 없는 배우였다. 이 대회에서 극심한 슬럼프로 마음고생을 했다. 결국 5번 이대호는 고의사구로 내보내면서 4번 이승엽과는 정면승부하는 상대팀의 변칙 플레이도 심심찮게 등장. 뿐만 아니라 국내 팬들조차도 이승엽에 대해 이름값을 하지 못한다는 야유를 보내 더욱 괴로운 입장이었다.

이번 준결승에서도 그는 마지막 승부 직전까지 "정말 못한다"란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첫타석부터 세번째 타석까지 삼진과 병살 등 내내 불운한 모습.

그러나 김 감독은 마지막까지 그에 대한 믿음을 보였다. 8회 네번째이자 마지막 타석이 그에게 돌아왔다. 중계석에서 "이승엽, 여기에선 한 번 해줘야죠"란 말이 흘러나오며 분위기를 띄웠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초반 투낫싱까지 볼카운트가 몰리며 벼랑 끝까지 몰렸다.

그런데 이거야말로 영화 속에서나 나올 극적 설정이었다. 드라마를 위한 모든 구성을 마치고 그는 언제 슬럼프였냐는 듯 담장을 그대로 넘겨버렸다. 역전타이자 이날 결승타였다. 허구연 해설자는 "독도를 넘겨 대마도까지 날아갔다"며 좋아했고 기막히게도 홈런볼은 일본 응원석으로 날아가는 우연을 동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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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종료 후 다음에서 이승엽 홈런 다시보기 서비스를 한 SBS 제공영상은 접속자가 너무 많아 장애를 겪었다.  
 

경기가 끝나자 이승엽은 눈물을 쏟았다. 지금껏 너무 못해줘 미안했다는 말과 함께 터져나온 감정. 그러나 참고 참았던 눈물은 좌절이 아닌 행복한 눈물이었다. 4번타자의 드라마틱한 부활. 십수명의 후배들에게 병역면제 선물을 내리는 홈런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날은 그가 홈런을 칠 때마다 '영양가 없다'며 혹평하던 인터넷 영양사들조차 쥐구멍에 숨어버렸다.    

연출 - 광현, 석민 어린이들

승기를 잡은 한국은 9회초 일본의 마지막 공격에 맞서 호투한 김광현 대신 윤석민을 투입한다. 허구연 해설자는 "우리 어린이들"이라며 두 선수에 대해 애틋함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김광현은 88년생, 윤석민도 86년생으로 이제 스물을 갓 넘긴 파릇파릇한 나이인 것. 일본이 8회까지 구원투수상에 빛나는 74년생 이와세 등 내노라하는 6명의 투수를 올릴 동안 한국은 김광현 한 명으로 틀어막았고 9회에 마무리로 나선 윤석민이 두번째자 마지막 카드였다. 한국의 '두 어린이 연출가'는 이 날의 극적 승리에 더할 나위없이 일조했다.


조연 - 마음 속 짐을 벗은 한기주   

중요한 때마다 구원투수로 기용됐으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한 작가' 한기주는 이 날 경기엔 출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메라가 덕아웃을 비출 때마다 언뜻언뜻 얼굴을 비추며 존재감을 보였다. 한국이 2대 1로 끌려가던 때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표정을 흐리게 한 건 팀의 뒤진 스코어만이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한국이 9회초에서 스물일곱번째 아웃카운트를 외야 플라이로 잡아냈을 때 한기주는 포효했다. 승리가 결정지어지는 그 순간 덕아웃 출구에서 대기중이던 카메라는 그 누구보다 그의 급변하는 표정을 오래도록 잡아냈다. 맨 앞에서 가장 먼저 그라운드로 뛰어나가려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다름 아닌 그였던 것. 이 장면은 승리가 확정된 잠시 후 시간차 슬로우모션으로 방영됐다. 비록 이날 승리에 직접 참여하진 못했지만 덕아웃에서 함께 뛰었던 그 역시 조역으로 한 몫을 담당한 배우였다.


악역(반동인물) - 호시노

"이승엽이 누구냐. 저런 4번타자를 두고 전승을 했다니 대단하다"

호시노 센이치 일본 감독은 여러모로 한국 팀과 팬에 있어 악역이었다. 하다못해 반동인물 중에서도 주동인물을 얄밉게 자극하며 성장을 돕는 형에 속했다. 이치로의 "30년 빠르다" 망언만큼은 아니라도 신경을 긁어놓기엔 충분한 발언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우습게 됐다. 누군지도 모른다고 깔봤던 하필 그 선수에게 역전 홈런을 얻어맞았으니 변명거리도 남지 않은 것.

마지막이 되자 그는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한국을 약팀이라고 하지 말라, 정말 강했다"고 추켜세우는 한편 김경문 감독에게도 우승하라는 덕담을 건넨 것. 마치 주동인물에 지고나면 성격이 좋아지는(?) 어느 만화의 패턴을 보는 듯 했다.


나레이션 - 허구연

이날 경기를 MBC로 관전했던 시청자들은 또 하나의 재미를 얻었다. 허구연 해설자의 중계방송은 종일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들어와 반말 중계 이해바란다"는 담대함부터 "어린이들이 잘해주길 바래요"로 유치원장 모드에 돌입하는 등 그로 인해 듣는 재미가 쏠쏠했던 것. "독도를 넘겼어요"는 두고두고 회자될 명대사. 긴장이 풀리는 순간마다 "고마워요"라며 일본 선수에게 화답하는 것 또한 웃음보를 터뜨리게 했다. 베이징올림픽에서 허 해설자는 3인칭 경기 해설을 넘어 또다른 영역을 제시(?)한 선구자였다.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