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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연출사진, 개조와 조작의 선에서

중앙일보 연출사진, 개조와 조작의 선에서
포토저널리즘에 비춰 내릴 평가는?


중앙일보가 연출사진을 지면에 실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 5일자로 나간 미국산 쇠고기 음식점의 기사가 그것. 사진에 손님으로 찍혔던 이들이 실은 취재에 나섰던 기자들이었다고. 중앙일보는 8일자 기사로 독자 사과에 나섰다. 그러나 미디어스가 이전 취재에서 처음엔 당사자들이 극구 사실을 부인했음을 밝혀 사과는 빛을 잃었다. 네티즌들은 즉각 비난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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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들이 직접 모델이 되어 찍은 "중앙일보 조작사진"

마감 때문에 먼저 연출된 사진을 찍었고, 이후 손님들이 들어서자 촬영협조를 시도했지만 거부당했다는 것. 중앙일보는 이에 대해 시인했으나 손님들은 분명 미국산 쇠고기를 주문했고 이를 전달하고자 잘못을 저질렀다고 밝혀 정황은 사실임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사진기자의 윤리관에 있어선 이번 연출사진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포토저널리즘 역사에서의 지난 선례들을 찾아봤다. 아래는 케네스 코브레의 저서에서 발췌, 인용한 기록이다.

연출 사진에 허용여부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이는 '개조'와 '조작'으로 나뉜다. 연출사진에서 허용되는 '개조'의 선, 그리고 폐기해야 할 '조작'을 놓고 세계 포토저널리즘 역사는 오랜기간 고민해 왔다.

1961년, 로스엔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교 언론학과장 월터 윌콕스는 독자와 사진기자, 편집자의 세 그룹을 대상으로 세 가지 상황을 설정한 설문을 돌렸다. 각 상황의 답변은 3지 선다. '명백히 비윤리적 상황', '분명치 않은 상황', '비윤리적이지 않은 상황'이 그것이다.

첫번째는 실제대상이 아닌 대역이 등장한 설정. 살인사건 재판으로 한 사진기자가 피고 사진을 촬영하려 하지만 그녀가 얼굴을 가리거나 호위교도관 뒤에 숨는 등 촬영을 못하게 해 유사한 외모의 다른 여자를 데려다 빛을 분산시키고 초점을 흐리게 해 그럴듯한 사진을 촬영한 시나리오다.

두번째는 해당 대상에게 상황을 반복하게 한 예. 신축교회 기공식을 찾은 사진기자는 도착 전 이미 고위성직자가 첫 흙을 뒤집는 기공식 의식을 끝내버림에 따라 그 의식을 한번 더 반복해 주길 요청했다. 성직자들은 협조했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세번째는 상황을 유도한 사례. 귀뚜라미 전염병이 오지를 황폐화시키는 사건을 다루고자 달려간 사진기자가 촬영대상이 너무 멀고 작아 어려움에 빠졌다. 그들을 모으고자 장치를 설치했고 귀뚜라미가 떼로 몰려들자 이를 촬영했다.

일반대중과 편집자, 현직 사진기자의 세 그룹은 놀랍게도 윤리적 행동과 그렇지 못한 행동에 상당정도까지 일치된 의견을 보였다. 첫번째 사례에선 일반대중의 92%, 사진기자의 93%, 편집자의 99%가 아무리 닮은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의 사진 촬영은 옳지 못하다라 응답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두번째 기공식의식 재현에 대해선 각각 동일 순서대로 83%, 88%, 94%가 그리 비윤리적 일이 아니란 반응을 보였다. 추측컨대 세 그룹은 '연출한 사진'운 허용하되 완전 거짓 사진은 배제시키는 동일한 윤리적 틀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번째는 완전히 상이한 응답이 나왔다. 일반독자 중 29%는 명백히 비윤리적이라고, 39%는 확실치 않다고 답했으며 32%가 비윤리적이지 않다라 답했다. 편집자 역시 순서대로 23%, 34%, 44%로 유사하게 삼분됐다. 다만 유사 상황을 겪은 사진기자들은 이를 일상적 업무의 일부로 간주, 7%만이 명백히 비윤리적이라 답한 반면 30%는 확실치 않다라 답했고 63%가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응답했다. 바꿔 말하면 조사대상 중 2/3가 같은 상황에서 사진을 연출할 것이라 가정할 수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가치관이 변하기 시작했다. 사진기자의 윤리가 보다 엄격해진 것. 1987년 NPPA 조사에서 벤 브링크는 조사 대상 사진기자 중 1/3 이상이 상황 재창조를 수용함을 발견한 반면 모든 장면을 연출하는 건 단 2%만이 수용함을 발견했다. 폭풍에 대한 어사인먼트를 받은 사진기자가 지나가던 아이에게 물 속에 뒤집힌 공중전화박스의 전화기를 집어 전화를 거는 척 해달라 부탁하고 이를 편집자에 알리지 않은 채 사진을 넘겨주는 기본적 장면 연출에 관한 조사에선 2%만이 용인된다 응답했으며 91%가 절대 편집자에 얘기 않고 사진을 조작해선 안된다고 응답했다.

시나리오를 재창조하는 것은 조금 결과가 다르다. 농촌 지역 방문 간호사를 대상으로 작업하는 사진가의 이야기로, 간호사가 농가로 가고자 들판을 가로지르는 사진으로 작업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실제 상황은 시간과 장소가 촬영에 적합치 않았다. 해서 그녀에게  들판을 걷게 한 뒤 두세번 같은 행동을 반복시켜 적합한 모습을 포착했다. 사진기자 중 38%는 연출된 장면이라 답했고 28%는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겠다 답했으며 나머지 34%가 단지 촬영을 위해 간호사가 들판을 가로지르게 하진 않을 것이라 응답했다.

여기서 윤리가 세월에 따라 엄격해졌음은 들판을 가로지르는 간호사의 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다. 61년 기공식 행사 반복 행위를 꺼리는 사람이 없었던 것과 달리 26년 후엔 1/3 이상이 사진을 반복하거나 개조하지 않음을 발견한 것. 기공식과 촬영을 위해 들판을 가로지르는 건 동일 상황은 아니나 시간에 따라 기본적 차이가 달라졌음이 확인된다. 60년대엔 대부분이 수용한 실제대상의 반복 상황 개조 조차도 80년대엔 많은 보도사진 단체에 있어 비난대상에 올랐다.

중앙일보의 연출사진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일단 실제 취재대상인 손님이 아니라 기자가 직접 카메라 앞에 섰으니, 다른 사람이 찍혔다는 점에 있어선(기자냐 제3자냐의 차이는 있지만) 61년 조사의 첫번째 시나리오와 동일하다. 앞서 밝혔듯 독자는 물론 편집자와 사진기자 조차도 대다수가 비윤리적 행태로 지적했다. 지탄에서 벗어나기 힘든 대목이다.

중앙일보의 주장대로 실제사진은 찍지 못했으나 돌아가는 상황은 연출사진으로 전하고자 한 내용과 일치했다고 가정해보자. 세번째 시나리오인 귀뚜라미 유도 때와 유사하다. 당시 사진기자 그룹의 2/3 가량은 용인한다는 답변을 던졌다. 반면 편집자와 일반독자는 응답이 삼분되면서 애매해졌다. 다만 확실한 것은 촬영 및 취재 당사자에 비해 독자와 편집자의 견해는 그를 묵과하는 비율이 분명 달랐다는 점이다.

세월에 따라 사진기자 스스로도 엄격하게 허용의 선을 끌어올려 포토저널리즘의 수비범위가 축약된 데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타인이 아닌 실제 대상의 허가가 나온 사진임에도 불구, 시간이 흐르면서 이에 따른 반복의 개조 조차 쉽게 허용하고 있지 않다. 하물며 대상이 아닌 이가, 그것도 기자 본인이 카메라 앞에 나섰다면 이야기는 한층 복잡해진다. 더구나 현재 국가 최대 이슈인 쇠고기 문제를 다루면서 이같은 상황이 빚어진 데 따른 것은 현재 해당매체의 논조 경향까지 맞물리면서 논란이 확대될 수 밖에 없는 상황. 비난을 면할 수 없는 과오라는 점에 대해 반론의 여지는 찾기 힘들다.

라이프지 사진기자로 명성을 날린 유진 스미스는 1948년 이런 글을 남겼다. "대부분 사진 기자는 사진에 대한 회화적, 기사적 일관성을 갖추고자 어느정도 조작과 재배열 및 무대 지시가 필요하다"라고. 그러나 여기에 이같은 말이 추가로 붙었다. "그러한 변화가 보다 극적이거나 잘팔리는 사진을 만들려는 목적을 위한 것으로 현실을 오도한다면 그 사진가는 시적 파격어법에 탐닉한 것 뿐"이라고.

여기에 보도 매체 당국의 시국적 입장과 이해관계를 추가한다면 너무 큰 비약일까. 그리고 하나 더, 그가 지적한 '극적', '잘팔리는 사진'의 범주에서 이번 상황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워드 챕닉은 '진실은 동맹자를 필요치 않는다'라는 저서에서 "1990년대에 들어서자 카메라와 필름기술의 발전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을 촬영할 수 있다는 명제를 진부한 문구로 만들어버렸다"라 지적했다. 그는 이제 현실에서 사람을 기만하는 사진기자에겐 어떤 변명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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