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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일 서울, 청와대 앞에서의 기록

2008년 6월 1일 서울, 청와대 앞에서의 기록
 
10시간에 걸친 물과 불의 만가


 


자정을 넘기며 날짜도, 달력도 바뀌었다. 2008년의 6월 1일. 이 나라의 거리에서 뭔가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2008년 6월 1일 서울, 청와대 앞에서의 기록 - 10시간에 걸친 물과 불의 만가


0시. 초여름밤, 물줄기, 촛불과 사다리

경복궁 효자로를 버스로 막아선 경찰들. 시민들은 사다리를 꺼내 버스 위로 지나가려 시도했고 버스 위의 경찰들은 이를 제지했다. 밀려드는 시민들에 경찰이 꺼낸 방법은 살수.  

 

시민들 손에 들린 촛불을 끄기엔 역부족이었다. "수도세가 아깝다"를 외치며 비난하는 시민들. 곧이어 구호는 "독재 타도"로 달라졌다. 어느새인가 청와대 앞은 독재정권 시대의 항쟁을 방불케 하는 모습으로 화했다. 연이어지는 살수. 그러나 물대포 공세에 시민들은 "시원해, 시원해"를 외치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이크가 켜지면 어김없이 야유가 쏟아졌다. 경찰의 해산 요구, 그리고 시민의 진로 확보 요구. 이미 처음부터 타협의 길은 없었다. 그렇게 하룻밤동안 끊이지 않는 외침이 길게 이어졌다.

   
 
  ▲ 새벽 1시 상황. 살수는 강력했다. 그러나 진짜 무서움은 한참 후에야 느낄 수 있었다.  
 
 

1시. 젖은 연인들

청와대로 진입하는 길은 효자로 뿐 아니라 사직로도, 동십자각 거리도 모두 막혀 있었다. 이 중에서도 동십자각 거리는 특히 긴장감이 컸던 대치장소. 이중 삼중의 전경버스엔 연행된 집회자도 들어있었다. 경찰 측의 경고방송에도 불구,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길을 열라' 요구했다. 결국 쏟아지는 물대포. 고공에서 살포되는 살수의 위력은 앞서 효자로의 것보다 더 강력해 보였다. 시민들은 순간 비명을 지르며 한발씩 물러섰다.

그러나 역효과였다. 물줄기가 끊기자 마자 흠뻑 젖은 시민들은 분노를 터뜨렸고 "물 껐네"를 외쳤다. 사진 취재에 협조한 어느 남녀는 "방금 물 뿌리던 동영상도 반드시 공개해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외침이 커지자 경찰은 연거푸 물줄기를 쏘아댔다. 물대포 위력 앞에서 거리는 사각지대 없는 좁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미 한번 얻어맞은 시민들 역시 이골이 났다는 듯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근거리에 들어가면 조준거리에서 벗어난다며 전진을 외치는 이들이 보였다. 한켠에서는 머리를 꼬옥 끌어안고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애틋한 연인도 있었다. 나홀로 샤워 두번에 세수 한번을 해야 했던 나는 왜 뜬금없이 센티멘털해진걸까.

   
 
  ▲ 물에 젖은 남녀. 사진 게재를 허락하며 살수 동영상도 함께 올려줄 것을 부탁했다.  
 

1시 20분. '에어 서플라이!' 시티즌 밴드

갑자기 환호성이 쏟아졌다. 버스 문이 열리더니 안에 있던 연행자들이 하나둘 시위대 쪽으로 하차했다. 노성에서 환호로 한순간이나마 성격을 달리한 분위기.

어디선가 클래식한 연주음이 들려왔다.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시민들은 일제히 1절부터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군중 속에서 주목을 끌기 시작하는 시민 악단. 촛불도, 피켓도 아닌 트럼펫과 탬버린 등의 조금은 묘한 무장이었다. 연주는 박수소리를 끌어냈고 연주자들은 그와 동시에 손을 들어 보였다.

   
 
  ▲ 시민들로 조직된 citizen band. 애국가 연주는 큰 호응을 얻었다.  
 

연주자들에게 말을 건넸다. 호흡을 맞춘지는 불과 사흘이라 밝혔다. 닉네임 '벌레'의 여성이 대표를 맡은 시민악단 '시티즌 밴드'가 그들의 정체. 언젠가부터 다음에서 집회 속 시민악단의 필요성을 말하는 의견이 늘자 연주 가능한 네티즌들끼리 모여 구성된 즉석 팀이었다. 급조된 팀이었지만 호흡은 예사롭지 않다. 시민들의 반응이 좋자 앵콜 송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잠시나마 묘한 안정감이 흐르던 시간이었다.

1시 40분. "아악! 어떡해!!"

다시 몰려드는 긴장. 이번에도 살수 타워가 문제였다. 그러나 이번 것은 예전의 무작위 살포와 성질이 달랐다. 경찰버스 위로 올라서는 데 성공한 한 청년이 쏟아지는 살수 타워 아래에서 항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러나 곧바로 물줄기는 그대로 아래의 남자를 직격했고 남자는 차 위에서 쓰러져버렸다.

   
 
  살수의 광역성은 길목을 좁게 느끼도록 만들 정도.  
 

   
 
  쏟아지는 물대포에 한 남자가 아래에서 항의 퍼포먼스를 펼치다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다  
 


























일순간 시야에서 사라지자 비명과 함께 "떨어진 것 아니냐"는 놀란 목소리가 아우성쳤다. 잠시 후, 방금 전 남자로 보이는 실신자와 그를 급하게 바깥으로 이송하는 시민들이 군중들을 가로질렀고 이에 시민들은 다시 노기를 드러냈다. 너나할것없이 "살인자" 구호를 꺼냈다. 어느새인가 살수는 광역성 위협 도구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경찰 역시 살수는 가급적 삼가는 모습이었다.

   
 
  이 스님은 이후 아침이 되어 동아일보 앞에서 다시 보게 됐다.  
 
 

2시. 물과 불의 만가

동십자각은 잠시 소강상태를 맞았다. 정부중앙청사 앞 도로를 걸으며 다시 효자로와 사직로 상황을 확인했다. 효자로는 여전히 물안개 속이었다. 사직로는 앉은 상태로 대치한 학생들과 저지선을 유지한 경찰 모두 상당 거리를 두고 비교적 조용히 마주 대한 상태.

3곳의 통로를 잇는 경복궁 역 위 도로에선 붉은 불길이 여기저기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물에 흠뻑 젖은 상태로 새벽을 맞아 체온이 급감한 참여자들끼리 불을 피워올리고 마주 앉아 있었다. 물과 불은 그렇게 인간의 체온을 두고서 기이한 경합 중이었다.

   
 
  ▲ 물에 젖어 체온이 급감하자 시민들은 불을 지피며 하룻밤을 보냈다.  
 

자원 의료팀은 타박상 입은 이들을 불러모으며 바쁘게 스프레이를 뿌렸다. 많은 군중들 속에서 생채기 입은 이들이 저토록 많았나 싶을 만큼 "나도요"를 말하며 다가오는 걸음들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까지는' 의료 지원을 받을 계획이 전혀 없던 나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갈증은 없었다. 벌써 물대포를 몇 방 먹었던가.

하지만 허기가 졌다. 기사로만 접했던 블로거기자 박형준 씨가 "집회 다이어트로 5킬로를 감량했다"더니, 역시 빈 말은 아닌가 보다. 마침 샌드위치 판매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메뉴판을 보고 잠깐 멈칫.

"재료에 뭘 넣은 거요?"

'탄핵 샌드위치'. 탄핵을 넣은 샌드위치라는 건가. 이상한 아이디어 상품을 홍보하는 판매원과 잠깐 서로를 쳐다보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앗"하고 메뉴판 삼은 칠판 뒤로 숨는다. 동료가 다가와 머리를 누르고 거듭 철저히 숨겨준다. 샌드위치에 캔커피, 3천원을 지불하고 아무데나 앉아서 이를 위장에 밀어넣었다. 품질은 양호.

   
 
  ▲ 아이디어 아이템 탄핵 샌드위치. 재료는 별다를 것 없는 샌드위치.  
 
   

3시 20분. 촛불 앞에서

인도 한 측에 촛불 여러개가 놓여있다. 그 앞엔 어린 아기를 두 손에 안아든 어머니가 있었다.

"이거 덮이세요. 아이 추울텐데."

앞에 있던 참여자가 윗옷을 벗어 건네자 어머니는 두어번 사양하다 성의를 받아든다. 다가가 사진 한장 찍을수 있겠느냐 청하자 머뭇대던 그녀는 허락했다.

"아이한테 보여주긴 좀 험한 모습들 아닌가요?"

나는 "이것도 혹 아이를 위한 산 교육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아직 젖도 떼지 못했을 아이지만 혹 부모님의 뜻을 체감하고 있을지 모른다란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

"저는 교사예요."

전교조에 소속된 중학교 교사라 자신을 소개하는 아이 어머니. 갑갑한 기분에 나왔다고 밝혔다. 그녀는 쇠고기 수입문제보단 현 정부의 교육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다.

"중학교에선 7교시 자율학습이 부활했어요. 어찌된 일인지 교사들은 이에 반론을 제기할 권한도 없는 상황이나 다름없어요. 이에 반하면 사실상 교편을 내려놔야 한다고 생각해야 하죠."  

어머니이자 교사로서 촛불에 불을 붙인 셈이다. "저 쪽 상황 어떻냐"고 궁금해 하는 그녀에게 물대포 영상을 보여줬더니 "아이들이 있는데도 이렇게 쏘아올렸냐"고 반문했다.

   
 
  ▲ 어머니는 아기를 끌어안고 촛불을 밝혔다. 중학 교사인 어머니는 "이게 아이를 위한 삶의 공부"라고 말했다.  
 


3시 40분. 부상자 전경 이송

"비켜주세요!"

"전경 때리지 마요!"

갑자기 도로를 가로질러 몇 사람의 청년이 사직로 방향으로 향한다. 전경 두명과 집회자 두어명이다. 전경 하나는 부상을 입은 듯 동료의 부축을 받고 있고 집회자들은 이를 호위하고 있었다. 행여나 전경에게 성난 군중이 접근할세라 목소리를 높였다. 뒤에서 한 중년남성은 따라오며 "그냥 보내지 마"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다른 군중들은 "비폭력!"을 외치며 이를 제지한다. 또다른 중년 남성 역시 "그냥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군중들의 관심은 집중될 수 밖에 없다. 카메라를 들고 함께 따르는 이도 늘었다. 그럴 수록 외침은 점점 커져갔다.

다행히도 큰 문제없이 전경은 사직로 쪽에 대치하던 경찰쪽에 인도됐다. 인도하던 청년들은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이탈했다"고 상황을 알렸다. 지켜보던 남자는 경찰들에 "우리 맘이 이러니 너희도 우릴 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도 전경 출신이야. 여기 전경 출신들도 수백명 와 있어. 다 선배들이라고."

이에 눈물로 호소하는 여성도 보인다. 마주하는 전경들은 곤혹스런 표정. 다들 나이가 어려보였다. 아직 소년티가 묻어나는 친구들도 여럿. 머리의 헬멧이 어째 크고 무거워 보인다.

그들이 지난 자리에서 한 여성은 "왜 그냥 보냈냐"고 질책의 목소리를 높인다. "보내면 또 우리에게 물대포를 쏴대고 두들겨팰 것 아니냐"며 지금 연행된 자들과 교환하던지 해야지 왜 그렇게 사람들이 좋냐고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비폭력을 외치고, 부상자에겐 어떤 위해도 가하지 말라며 외치던 청년들의 목소리는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었다.

   
 
   
 

4시. 사랑해요 MBC!

다시 동십자각으로 향하던 길에 몇몇 젊은이가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워다 담고 있었다. 이를 보던 예비군 청년도 손을 거들었다. 그저 여느때와 다름 없는 고요한 새벽이란 착각을 가져올 법한 정적.

그런데 동십자각에 다가서자 갑자기 환호성이 울린다. 달려가 봤더니 "사랑해요 MBC"를 외치는 목소리. 대치중인 버스 앞에선 MBC 카메라맨이 상황을 담고 있었다. 아까 일부 방송 기자엔 비난을 쏟아대던 이들, "조중동 죽어!"까지 외치던 그들이 이순간만큼은 "국민 방송"을 연호하며 기자들에 환영을 표했다.

그리고, 그 바로 앞 버스 위에서 취재하던 기자들에겐 뭔가가 던져지고 있다. 먹을 것, 마실 것들이다. 민중의 소리와 외신기자, 그리고 젊어보이는 청년(이후 말을 걸어본 그는 단국대학교 다큐멘터리 기자였다) 등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웃어보이며 화답했다. 메이저 신문엔 좌파 선동, 반미 세력으로 비쳐지고, 또 한편으로는 촛불집회의 언론 보도를 목말라하던 이들이 해갈하는 장면이었다.

   
 
   
 

4시 30분. 다시 긴장감 속에

"김밥 드세요"

허기진 이들에게 김밥을 한 줄씩 건네는 이들이 보였다. 받아든 김밥은 더 깊숙한 곳으로 전달됐다. 아울러 생수통도 전달됐다. 누구의 성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둠이 한자락씩 걷혀가면서 저들도 조금씩 공복감과 갈증을 느끼는 것일까.

그런데 갑자기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학생이 실명했대요!"

"진중권교수가 연행됐어요!"

   
 
   
 

이 두 가지 소식은 숨을 고르던 이들을 다시 폭발케 하기 충분했다. 군중들은 다시 "실명됐다 책임져"와 "진 교수를 석방하라"를 외치며 버스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맨 앞의 버스는 마구 흔들렸고 누군가가 차창의 철장 하나를 뜯어내버렸다. 조금 전까지 환영받던 기자들에게도 "차를 흔들거니 내려오라"는 요구를 꺼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당신들 혹시 프락치야?" 등 좋지 않은 반응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차체를 흔드는 이도 보였다. 흥분에 못이겨 경찰에 시위의 뜻을 나타내려던 이들은 하나둘 언성을 높였고 또 한편에선 "위험하니 그만두라"며 비폭력을 외치는 군중들의 목소리도 커져 갑자기 군중 간에 불협화음이 일었다.

급기야 던진 물통에 맞은 민중의 소리 기자가 사람들에게 외쳤다.

"이 차 흔들거예요?"

차를 흔들던 남자들이 그렇다고 외치자 그는 "이 앞에 사람이 있다"며 위험함을 알렸다. 그러자 이를 모르고 있던 이들은 곧장 "미안해"를 외쳐댔고 기자들에 언성을 높이던 이들에겐 "자중하라"는 말이 전달됐다. 일순간 흔들리던 차체들은 안정을 찾았다. 한 고비를 넘기는 순간이었다.

(돌아와 확인하니 실명된 학생 이야기는 아직 미확인, 반면 진 교수의 연행은 사실이었다)

   
 
  ▲ "연행자를 석방하라"를 외치며 가로막힌 버스를 두드리는 젊은 군중들.  
 

5시 "연행자를 석방하라!" 목소리 빗발

날이 밝아오면서 군중들은 "일어나라 아침이다", "예배 가야지" 등 조소 섞인 구호를 외쳤다. "배고프니 청와대에서 아침달라"는 구호엔 "미국산 쇠고기 주겠지"라며 실소하기도.

연행자를 석방하라는 외침도 일었다. 버스 차체를 탬버린치듯 두드리며 젊은이들은 연행자 석방을 요구했다.

나는 아침이 밝아오면서 해산 시간을 의식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연장전을 예감케 하는 순간. 그러나 이 때만해도 곧이어 찾아올 상황이 최악의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 날이 밝았다. 그러나 군중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5시 30분. 경찰 스피커 다시, 야유하는 집회자들

날이 밝자 한동안 잠잠하던 경찰 스피커가 다시 울려퍼졌다. "여러분은 불법집회를 하고 있다", "이건 국위선양에 도움이 되질 않는다", "여러분 뜻은 충분히 각 매체로 전달됐으니 해산하라"는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군중들은 자신들이 밤새도록 외친 것들에 대한 저러한 말들이 듣기 싫은 듯 다시 야유를 퍼부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위험한 조짐이 감지됐다.

   
 
  ▲ 진보신당 티셔츠를 입고 하룻밤동안 집회를 함께 한 외국인들. 영어 소통은 '영 아니올시다'인 본인, 선촬영 사진 및 명함을 보여주고 "땡큐" 답변을 듣는 것으로 사진 협조를 구했다.  
 

6시. 1차 해산 진압 시작... '아비규환'

정작 최대 고비는 해가 뜬 뒤 찾아왔다.

정부중앙청사 앞에 집결한 경찰들은 연이은 해산 방송에 이어 다시 '살수 경고 방송'을 실시했다. 이에 시민들은 "온수를 뿌려줘!"를 외치며 회답했다. 내 옆엔 아침 운동을 위해 나온 듯 자전거를 끌고 "뭐야, 물 뿌린대?"하며 의아한 듯 질문을 주고 받는 남자들도 있었다.

경찰은 거듭 도로점거 위반을 주장하며 해산을 요구했다. 아침이 되어서도 집회자들이 해산하지 않는 것에 강경 대응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민들 역시 강수를 두고 있었다. 물러서지 말 것을 저마다 전하며 방패 앞에 모였다. 순간 이들이 야간집회를 넘어 시간을 연장할 것을 눈치챘다.

아침 6시, 경찰은 기자들에 경고메시지를 전했다. "물에 장비가 젖을 수 있으니 철수하라"는 경고였다. 그리고, 물대포가 쏘아올려졌다. 연속되는 물줄기. 세개의 살수 줄기가 큰 도로를 교차했다.

잠시 후, 이 물줄기는 지난 밤 저지선 접근에 경고하고자 쏘던 것과는 상황이 다른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줄기는 점차 군중들을 향해 멀리 날아들었고 전경들은 방패를 일렬로 세워 전진해 왔다.  

   
 
  ▲ 오전 6시 해산 진압 시작. 1차 진압으로 정부중앙청사 앞 사거리부터 동십자각 사거리 사이의 집회 참여자들은 인사동 거리까지 밀려났다. 대규모 살수와 방패부대 진격이 진행됐고 최루탄도 사용됐다. 살수개시부터 불과 20여분의 과정에서 20~30여명의 부상자가 속출했다.  
 

우산을 꺼내들고, 또 우비를 쓰고서 뒷사람들의 방패막이가 되던 전방의 사람들. 그러나 경찰들은 본격적인 해산 진압을 나섰다. 저 너머 공사벽 측면에서 카메라를 빼꼼 내밀던 기자들에게도 물세례가 가차없이 퍼부어졌고, 땅을 울리는 방패소리가 가까워졌다.

예상보다 빠른 경찰의 진격에 전방에 있던 예비군들은 "천천히 와라, 뒤에 아이들도 있다"고 외쳤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밀려넘어지는 군중들이 생기면서 "밀지 말라"는 요구가 나왔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살수 경고에 상당히 뒤로 물러섰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시민들은 어느새인가 비명과 함께 달리며 후퇴하기 시작했고 남은 이들은 상황이 심각함을 깨닫고 "여성들 뒤로, 남성들 앞으로"를 외쳤다. 어느새인가 나 역시 예비군들과 함께 경찰 방패에 밀려나오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전경들도 피로감과 스트레스 누적에 민감해진 듯 했다. 바로 앞에서 선임으로 보이는 젊은이 하나가 당황해하는 후임에게 "열 제대로 맞추지 못하냐! 이XX야"라 윽박질렀고 후임은 당황감을 감추지 못한채 "시정하겠습니다!"를 반복했다. 게다가 최전방에 선 전경들은 우리와 함께 살수에 얻어맞는 브로큰 애로우 상황이었다.

양 측 접선이 무너지면서 일순간 상황은 최악에 직면했다. 경찰과 시민측의 일렬 선이 서로 뒤섞이며 혼란이 가중됐다. 넘어진 채 깔려버리는 사람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경찰 저지선과 어느정도 거리가 떨어진 사람에겐 물대포가 날아왔다. 도로 가장자리를 통해 뒤돌아 후퇴하고 있던 나 역시 그대로 직격, 일순간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일어서며 생각했다. 짧은 순간인데도 불구 "이 정도 위력면 아까 이야기처럼 직격 시 실명도 무리는 아니겠다"고 되뇌었다. 이와 함께 직전의 상황 파악 시작. 나는 다른 이들과 순간 거리가 떨어진 상황에 있었다. 의심의 여지 없는 타겟 록온이다. 경찰 측에겐 "이미 경고를 했다"란 사유가, 시민 측에겐 다시 한번 밤새 외치던 "살인무기" 주장의 당위성이 주어지는 순간이었다.

   
 
  ▲ 이 사진 직후 기자의 촬영장비는 물에 젖어 1시간여 사용 불가능.  
 

일어섰지만 어느새 한데 몰려 뒤엉킨 채 무너지는 사람들 아래로 다시 깔렸다.

"에이 이게 뭐야, 밀지 말라니까요!"

방패막이 된 예비군복 청년 하나가 경찰에 투덜대다 나더러 빨리 일어나라 했다. 하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하필이면 운동화가 거의 벗겨지며 왼 발목이 접질려 순간 기동성을 잃었다. 팔을 짚고 일어서려니 이번엔 부어오른 왼 팔꿈치가 비명을 지른다.

나도 불완전한 사람인지라 다른건 제쳐두고 연거푸 나뒹군것에 화가 치밀었다. 해선 안될 말임을 알면서도 뒤돌아 버럭 화를 내며 "이 자식들아!"하고 살수차와 방패부대에 고성을 질렀다.

방패부대가 전진하기 시작한지 5 ~10여분만에 정부중앙청사 앞 경찰 전방선은 동십자각 앞 란스튜디오 사거리까지 몰려들었다. 예비군 청년은 내가 왼 팔을 붙들고 있는 걸 보고 "저기 의료팀으로 가 처치 받으라" 위해 줬다.

란스튜디오 앞에 위치한 의료팀에서 응급처치를 받으며 '이제 끝났나' 하고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러나 이 역시 착각. 이번엔 최대 접전지였던 동십자각에서 경찰들이 일제히 몰려왔다. 버스 위에서 사진을 찍던 기자들 역시 황급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퇴각로는 딱 하나, 인사동 방향 도로로 내달리는 것 뿐.

그러나 또다시 예기치 못했던 절박한 상황. 란 스튜디오 쪽 의료팀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쓰러져 거동할 수 없는 환자들을 의료진은 남성 여성 할 거 없이 감쌌다. 그리고 그 앞을 스치던 후미의 퇴각 인파에 다시 한번 최후 방어선을 인간띠로 쳐 달라 도움을 요청했다. 나 역시 치료 직후 앞을 봉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 앞에서 의료진과 함께 "여긴 의료 중이니 오지 말라"고 외쳤다. 앞 쪽에서 밀고 오던 경찰들 역시 이 쪽으로는 발길을 멈췄다.

그런데 이번엔 동십자각 쪽 진영이 문제였다. 시각적 사각선상에 있어 달려나오던 저들 눈엔 적십자 마크도 보이지 않았나 보다. 게다가 하필 그 날 처음 구경해보는 최루탄이 의료진영 코앞에서 터졌다. 경찰 측 최루탄을 접한 적 없던 나는 순간 현역 시절 유격훈련장에서 맡았던 독가스를 떠올렸고 급하게 "최루탄이 들어와요!"라며 사람들에게 안으로 더 들어가라 외쳤다. 그러나 피해 들어갈 장소가 없었다. 게다가 시야가 순간 가려져 달려오는 경찰들에겐 앞의 의료진 인식조차 어려울 지경. 방법은 하나. 그저 바깥에다 "여긴 다친 사람들이 있어요"를 외칠 수 밖에 없었다.

급작스런 상황에 여성 의료진이 비명에 가까운 소프라노로 "여긴 아니예요!"라고 반복해 외쳐댔다. 적십자 표식을 갖다대고 사람들이 손을 내젓고 다급해지자 "야! 여긴 아니라니까!"하고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도 상황 파악이 제때에 이뤄진듯 경찰 측도 우리 앞에 약간 원형으로 포지셔닝, 자리를 확보해주었다.

화가 난 한 자원봉사자는 확성기에 대고 "여러분은 부상자 앞에서 최루탄을 터뜨리셨습니다"라고 항의했다. 최루탄이 하필 여기서 터진 것엔 경찰 관계자도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항의하듯 터지는 기침소리. 그러나 다행히도 그 매캐함은 내 예상과 달리 약했다. 또다른 자원봉사자는 "방패는 그렇다치고 곤봉은 다친 사람 앞에서 내려달라"고 청했다. 그렇게 대개의 군중은 고개 넘어길로 밀려 내려가고 여기엔 의료진과 몇몇 사람만이 남았다.    

갑자기 다시 다급한 외침이 연이어진다. 한바탕 물안개 속 폭풍이 지난 자리에서 여기저기 다친 이들이 옮겨져 눕혀졌다. 이내 "한 환자가 다리가 부러진 것 같다"며 들 것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터졌다. 상황을 보니 의료진엔 들 것이 없는 모양. 경찰 측에 들것을 요청한다. 옆에선 한 여성이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를 달래줄 사람도 없었다. 울음소리는 공허했다.

나는 휴대폰카메라로 취재 중이었다. 물에 젖은 오작동(갑작스런 배터리 부족종료)으로 촬영과 통신이 동시에 마비된 나는 급한 김에 가까이 있던 남자에게 휴대폰을 빌려썼다. 이른 휴일아침임에도 불구, 데스크에다 단신 속보를 알렸다. 감정의 파장이 고르지 못한 상황에서 이런저런 것을 억누르고 말을 전하는데 낯선 전화기라 그런지 아니면 마음속 파동 때문인지 순간순간 전화감을 놓쳤다. 몇 마디 대답을 놓치고 "여보세요?"를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러자 데스크 역시 기분이 좋지 않은 듯 "살수차야 새벽부터..."라고 역시 퉁명스럽게 시작. 나 역시 아수라장 속에서 제어되지 않는 감정으로 "이번 살수는..."하고 외치며 다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젠 서 있을 자리도 부족한 상황. 그 자리를 나와 절뚝이며 인파가 빠진 인사동 방향으로 향했다.

조용해진 뒤 MBC 차량 한대가 멈춰섰다. 촬영도구를 꺼내는 이들에게 다가가 약간의 패닉상태에서 "한 발 늦으셨군요"라 말을 거니 한 사람이 인사를 건넨다. 상황 질문에 대략의 상황을 말하고 다시 걸었다.

걸어가는 도중, 상황을 지켜본 골목길 사람들은 경찰들에 "고생한다"라고 말을 건넸다. 이에 인사를 하는 전경들이지만 얼굴은 밝지 못하다. 진심인지 이죽거림인지 복잡미묘한 표정이 여럿 잡혔던 탓. 이 중엔 "폭력진압하느라 욕봤다"며 대놓고 이죽거리는 이도 있었다.

걷다가 간부로 보이는 몇 사람에게 말을 건네보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들은 "저기 건물이 중앙청사 맞느냐"고 슬쩍 건네는 질문에도 고개를 저으며 답변을 회피했다.  

   
 
   
 

7시 10분. 잠깐 휴식

인사동 르노삼성자동차 건물 앞 편의점에서 배터리 급속 충전에 들어갔다. 한 편으로는 "나도 카메라 하나 있으면"하는 아쉬움을 꺼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휴대폰 카메라의 요긴함에 감탄했다. 내가 물폭탄에 날아가는 그 상황 속에서도 순간 주머니에 넣고 파손을 막아낼 수 있는 게 신통하다. 결국 오작동을 일으켰지만 물에 몇번씩 젖었어도 제 역할을 해준 것 또한 감사하다.

충전 후 확인하니 배터리는 한 칸만 들어온다. 역시 문제가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부를 손으로 쓰윽 닦아주고 다시 기다리니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침해가 완전히 뜬 상황에서 고갯길 한 쪽은 경찰이, 또 한 쪽은 시민들이 차지하고 있다. 인사동 거리 앞에서 "집결"을 외치는 시민. 그러나 도로점거 해산은 다시 시작될 것이 자명했다.

의료진 상황이 궁금해 다시 내려가 봤다. 환자들은 구급차로 이송된 상태였다. 유일하게 의사 가운을 입은 이에게 말을 걸려 은근슬쩍 상처를 내보였다. 며칠 경과를 지켜보라는 그에게 대략의 부상자를 물었더니 하룻밤 통틀어 50에서 60명의 환자를 받았고, 이 중 방금 아침 상황에서만 20에서 30명 가량 부상자가 나왔다고 밝혔다. 타박상이 거의 다냐 묻자 "천식 환자도 상당수"였다 밝힌다. 응급환자를 묻자 피묻은 의사가운을 보여준다.

"한 아가씨는 방패에 맞고 머리가 깨졌더군요."

이야기를 나누다 가운을 보니 '치과' 자수가 보인다. 치과 의사냐고 물었더니 웃는다. 타 의료자원 의사를 묻자 10여명 가량이 참여했는데 현재는 다른 곳으로 나뉘었다고.

   
 
   
 

7시 40분. 경찰, 집회측 2차 해산 시도 개시

1차 진압에서 경복궁 앞 집회측을 인사동까지 후퇴시킨 경찰은 1시간여 후 다시 해산을 시도했다. 밀려내려온 길과 이름 알지 못하는 또하나의 도로, 양 곳에서 다가오는 경찰 저지선. 리드미컬한 방패와 아스팔트와의 마찰음이 긴장감을 증폭시킨다.

이번엔 달려나오기 시작했다. 달리다 넘어져 버린 한 집회자는 그대로 전경들 발에 차였다. 반대 편에서도 물리력이 가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한순간 시민들은 경찰들이 밀려오는데도 독이 올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규탄했다. 그들은 그냥 두고 대규모 병력이 도로를 가득 메워 압박해 온다. 이번엔 살수차 없이 병력만으로 이뤄진 해산 시도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뛰면서 안국역까지 빠져나갔다.

   
 
  ▲ 7시40분 2차 진압 개시. 인사동 거리에서 안국역까지 밀고 올라오는 경찰.  
 

안국역에서 경찰들은 멈춰섰다. 불과 수분여만의 일. 참가자들은 아래 지하 상가로 빠져나갔다. 남은 건 집회자들 뒤를 따르는 프레스 진영. 그런데, 여기서 또 한번 마찰이 빚어졌다. 이번엔 참가자가 아니라 이를 지켜보던 행인들과 경찰간의 다툼.

한 초로의 남자가 전경 하나와 말다툼을 하다 상황이 악화됐다. 전경은 감정이 상한 듯 뒤돌아 서 방패를 땅에다 쳤고, 이를 4번출구 앞에서 지켜보던 행인들은 갑자기 전경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니가 MB아들이냐"며 날아드는 육두문자. 그러나 전경은 이 상황에서 더 이상의 표현을 할 수 없었다. 한편 이번에는 경찰 뿐 아니라 다른 시민까지 흥분한 남자에게 "그만 하라"고 자중할 것을 요청했다. 한 시민기자는 "전경이나 시민이나 다 못 할 질 아니냐"며 양측을 달래려 했다.

   
 
  ▲ 경찰은 10여분만에 안국역 4번출구 앞까지 내려왔다. 군중들은 지하도로 아래로 후퇴. 한편 이 곳 거리에선 도보에서 지켜보던 아침 행인들이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9시. 다시 광화문.

시민들은 산발적으로 흩어진 채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산한 거냐"고 물으면 "아니다"라며 종로, 혹은 시청을 행선지로 밝혔다.

오는 길도 순탄치는 않았다. 몇몇 길은 경찰에 통제됐고 지하도가 공사로 통제된 곳도 있었다. 집회에 휘말려 부상을 입은 뒤 갈 곳없는 분노를 뿌려대다 젊은 참가자들과 교통경찰들의 도움을 받아 앰뷸런스로 후송되는 노인도 있었다.

광화문으로 향하니 소수의 참여자들이 보였다. 동아일보 앞에선 예비군 복장을 한 청년을 비롯 몇 사람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다들 "결국은 다시 여기로 돌아왔냐"고 한마디씩 꺼낸다. 서른 두살의 김 아무개 씨는 "민방위인데 군복 다시 사서 갖고 있던 표식을 다시 붙여 입었다"고. 해골 마크를 언급하니 "그럼 뭐해요? 경찰한테 맞기나 하지"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서른 살 청년은 전경들에게 섭섭함을 표했다. 자신이 전경 출신임에도 불구, 지금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라 밝혔다.

"이해야 하죠. 하지만 위에서 시킨다 해도 지금 저렇게까지 하는 건 정상이..."

그들은 잠시 눈을 붙였다 다시 돌아와 일요일 집회에 참석하겠다며 흩어졌다.

   
 
  ▲ 오전 10시 상황. 시민들은 다시 출발점인 광화문 및 시청 광장으로 돌아왔다. 경찰도, 시민도 잠깐 휴식에 들어갔다. 오후까지의 짧은 평화였다.  
 
 

10시. 시청에서

아직 해산하지 않은 시민들은 시청 광장에 집결해 있었다. 밤샘 집회에 고단한 몸을 풀밭에 내려놓은 이들도 상당수.

전경도 마찬가지였다. 인근에 위치한 버스에선 그들 역시 죽은 듯 자리에서 취침 중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밤새 밀고 당기는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결국은 휴식조차 인근 장소에서 함께 취해야 하는 묘한 광경, 6월 1일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씁쓸한 모습이다.

이들은 몇시간 후 다시 대립하게 된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한동안은 계속될 것이다. 그저 지금은 다음번까지 남겨진 수시간여가 서로 빼앗기고 싶지 않은 순간일 터. 잠깐의 숨고르는 시간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야 할 상황이다.

나는 시청 광장 분수대에 들어가 일부러 물세례를 받았다. 옆에서 사람들이 쳐다보던 말던 거의 다 말랐던 옷을 다시 적셨다. 샤워 두번에 세수 한번, 거기다 말그대로 물'폭탄' 몇방을 맞았는데도 또다시 흠뻑 젖고 싶었다. 일종의 갈증. 순간 증오에 휩싸이면서도 또 한 순간 함부로 미워할 수 만은 없는 서로간의 마주함.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몸에선 수분이 말랐다.

어젯밤 나설 때, 현장에선 꼭 한번 '꽃'과 '물'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얼마전 경찰들에게 생수를 나눠주는 시민들의 동영상을 바라보며 직접 그 모습을 확인해보고도 싶었고, 경찰에게 꽃을 달아주자는 캠페인 역시 현실로 자리할지 기대했었다. 그런데 네티즌들 유행어처럼 현실은 시궁창이더라.

그래도 경찰의 방송 중에선 "경찰은 여러분의 적이 아닙니다"란 말이 거듭 들려왔다. 시민들도 부상당한 전경을 무사히 수행하며 "저들을 함부로 건들지 말라"고 외쳤다. 희망 하나씩은 본 셈이다. 하지만 아직은 서로가 서로에 적이 아님을 규정하면서도 서로 무언가 하나씩을 부정하면서 대립해야만 한다. 그저 이들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전하는게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일 터. 그것을 전하는게 마침표를 빨리 찍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설령 그것이 시궁창이라 해도.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