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스보이 기사(newsboy.kr)/시사

주말의 명화 '41년만의 the end' 바라보며 회고하다

주말의 명화 '41년만의 the end' 바라보다
무성영화 '발렌티노'로 시작, '조폭마누라3'으로 끝

주말의 명화가 2010년 10월 29일, 오늘부로 그 영광의 역사를 마무리한다.
1969년 첫 전파를 타고, 41살이 된 2010년에 폐지되는 주말의 명화다.


1969년 8월9일, MBC TV개국 다음날 무성영화 스타의 일대기 다룬 '바렌티노'로 시작

주말의 명화는 1969년 8월 9일 막을 올렸다. 첫 영화는 전설적인 무성영화 스타 루돌프 바렌티노'의 일대기를 다뤘던 전기 영화 '바렌티노'인데, 당대 최고의 세계적 미남 스타였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서도 자료를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물론 이 영화 역시 딱히 데이터베이스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재밌는건 MBC의 텔레비전 방송이 8월8일 시작했다는 사실. 즉, 주말의 명화는 그 다음날 시작했으니 사실상 MBC TV의 시작과 함께 호흡해 온 초대이자 현역 파트너였다.


굴곡진 영욕의 열차, 40년을 달리다 

주말의 명화는 그야말로 굴곡진 40년의 역사를 거침없이 달렸다. 70년대부터 2010년까지. 그야말로 영화가 미디어시대를 맞아 보여준 숱한 변혁을 그대로 체감케 한 바로미터였다.

주말의명화의 영욕은 여러가지와 함께 운명을 함께 했다. 하나는 영화산업이고, 또 하나가 TV의 변혁, 그리고 한국에서의 미디어 변화, 마지막으로 성우계의 변천사가 있겠다.

얼마전 충무로 국제 영화제를 통해 리뷰한 '백만달러 인어'란 1951년작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쇼 중심으로 돌아가던 미국 연예계가 '영화'라는 미디어로 대세를 바꾸어가던 시대를 살짝 언급한다. "촉망받는 뉴미디어"라 소개되는 영화. 실제로 미국에 있어 50년대는 극장에서의 엔터테인먼트가 쇼에서 영화필름으로 대체되던 시대며, 이것이 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다시 TV의 시대로 들어서던 격변기였다. 그리고 70년대 들어 TV는 컬러시대를 맞는다. 물론 컬러TV는 70년 초입때도 일반 가정에 있어 요원했지만 (1971년을 다룬 드라마 '케빈은 12살'에서 컬러TV는 이집 아버지의 두달치 월급과 맞먹는 가격임이 나왔었다) 흑백 수상기는 선진국이라는 미국에 있어 당대 미디어의 현주소였다. 물론, 영화계는 이미 컬러 영화의 중흥기였다.

물론 한국은 이보다 템포가 늦었다. 70년대까지도 흑백 TV 수상기는 부유층의 특권이었고 극장가는 사실상 TV보다 더 친근한 휴식터였다. 이런 상황을 살피면 주말의 명화는 부유층 내지 '얼리어답터'의 상징으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매우 럭셔리한 가치를 띠었다는 말이다.

MBC가 컬러방송을 시작한건 80년. 주말의 명화가 10살을 넘긴 뒤 부터 컬러영화를 볼 수 있게 됐다. 물론 이 역시도 서둘러 컬러TV로 바꾼 세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와는 그 시간적 차이가 있다. 영화는 이미 말이 필요없는 대중 오락이었고, 이것이 TV및 컬러방송의 보급이 맞물렸던 시대. 그 때 주말의 명화가 차지하는 입지가 컸을 거란 짐작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한국은 여전히 학생이 영화관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폐쇄성을 띠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방극장을 열어준 주말의 명화는 극장가의 신작 프로와는 또다른 가치를 지녔다. 온가족이 즐길 수 있는 토요일 밤의 황금시간대를 사수한 것은 그 시대의 가족들에 있어 문화적 기억의 단면이기도 하다.

또 하나. 주말의 명화를 말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성우다. 극장가가 번역된 대사로 영화를 상영하던것과 달리 방송국은 성우의 더빙을 통해 재창조의 작품을 빚어냈다. 이는 아직 문맹률을 무시못하던 그 시절, 지대한 폭발력을 지닐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성우란 직업이 영웅과도 같은 대접을 받던 시대상과도 맞아떨어졌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이어져오는 한국의 성우 역사는 라디오 시대의 전성기에서 외화의 새 전성시대로 이어지는데 그 과도기가 70년대였다. 컬러영상 시대인 80년대 들어서는 성우와 외화프로의 영광이 함께 이어졌다.

그리고, 비디오 시장. 80년대 들어 보급되기 시작한 비디오카세트와 비디오플레이어는 그 레코더 기능을 통해 상생하는 분위기로 흘렀다. 비디오 대여샾이 인기를 끌었지만 이와는 별개로 TV 영화 녹화 또한 인기였다. 그 시절 유년기를 보낸 우리들, 현재 30대 전후의 기억엔 부모님이 명화를 녹화해 다시 돌려보는 모습을 어렵지않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언뜻 생각해선 파이가 나뉠 것 같았지만 '판매 및 소장'의 개념이 엷었던 그 땐 양 쪽을 통해 함께 폭발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즉, 렌탈샵의 전성기는 TV외화를 위협하지는 않았단 말이다.

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90년대 초반까지도 이처럼 주말의 명화가 구축한 아성이 건재한 것은 한국의 컨텐츠 여건과도 이야기가 이어진다. 일전에 유강진 성우(찰스헤스턴 전담으로 유명한 대성우)는 나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당시엔 한국 컨텐츠가 현저히 외국의 것과 격차를 보였기에 외화의 입지가 확실했다"고 밝혔다. 한국영화가 지금처럼 수입영화와 비등한 위치를 차지한건 90년대, 쉬리 (좀더 앞서면 은행나무침대나 서편제같은 작품들) 등이 등장하면서였고 그 전엔 여전히 외국 영화에 비해 밀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서 외화를 전담마크하는 프로그램은 확실한 입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90년대를 넘어 2000년대에 다가오면서 영원할 것만 같던 르네상스시절은 조금씩 위기에 닿는다. 케이블 방송의 시작은 24시간 영화전문채널을 만들어내면서 굳이 지상파 방송의 외화시간대를 기다리지 않아도 괜찮은 상황이 되었다. 이는 과거 방송종료 시간대를 대체한 유선방송의 그것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DVD 판매시장이 열리면서 영화를 소장할 수 있는 편리한 시대도 열렸다. 게다가 한국영화 및 드라마의 중흥은 환영할 것이었으나 반대로 그간 한국 방송사에 기여하던 외화프로 및 성우의 입지엔 타격을 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까진 아무래도 좋았다. 주말의명화 역시 한국영화를 틀어주는 일이 이상하지 않게 되었고 DVD매체로 영화를 살 수 있게 되었다 해서 안방 극장의 실체 자체가 무너질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무엇보다도 인터넷 시대의 도래가 가져온 '영화다운'이었다. 아시다시피 이것은 DVD시장도, 고군분투하던 비디오샵 시장도, 케이블채널방송에도 공통된 재앙이었고 극장 및 영화인들부터가 타격을 입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주말의 명화를 비롯한 TV 외화 프로그램의 운명 또한 좌초되고 말았다.

결국 이 모든 요소가 얽히면서 주말의 명화는 급격히 시청률을 잃어갔다. 외부적인 요소라는 것들이 때론 든든한 원군으로, 그리고 지금은 재앙과도 같은 파도로 밀려와 이 프로그램의 흥망성쇠를 결정지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현재의 MBC 수뇌부가 선택한 주말의명화 폐지는 절대 완전한 변명거리가 될 수 없다. 시청률과 광고매출로만 재단할 수 없는 방송사의 또다른 가치, 그 상징성과 여전히 이를 공기처럼 여기던 팬들의 바람을 무참히 베어버렸다. 원작 영화가 아닌, 성우의 입김으로 새롭게 무장한 제2창작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는 더빙팬들 또한 남아있었다. 40년 넘게 이어진 간판을 시청률 하나로 떼어낸 것은 이제 주말의명화를 폐지로 내몬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으로 남게 됐다. 방송을 상업적 잣대로만 재는 천박한 성과주의의 폐단이 만연한 시대 말이다.


토요명화라는 그리운 라이벌의 존재, 3년 차로 사라지는 부부같은 인연
    
주말의명화를 이야기하는데 있어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가 있으니 토요명화다. 한국엔 3대 외화프로가 있었으니 토요일 밤 KBS2채널과 MBC로 외화팬들을 양분했던 토요명화와 주말의 명화, 그리고 일요일 밤 KBS1으로 흘러나온 명화극장이 그것인데. 이 중 방영일을 같이 잡았던 주말의명화와 토요명화는 그 와중에서도 각별한 연을 지녔다.

이들은 한때 9시뉴스와 더불어 대표적인 방송사간 전쟁의 타이틀이었다. 똑같이 토요일밤에 편성되어 시소게임을 벌인 것. 어떤땐 5분차로 동시간대 방영해 시청률 유혈사태를 벌였다. MBC와 KBS의 대표적 경쟁의 모습이다.

그리고 어떤 땐 서로 시간대를 달리하기도 했다. 90년대 초반엔 토요명화가 9시50분 쯤 일찍 편성되어 전파를 내보내고, 주말의명화는 뒤를 이어 11시를 넘긴 시점에서 방영을 시작했다. 덕분에 런닝타임이 긴 ET를 주말의명화가 내보낼 땐 새벽 2시가 넘어서도 방송이 계속된 적이 있었다.


             
              2007년 토요명화 폐지 당시 만난 유강진 성우. 성우로서 너무 아쉬운 일이라고 밝혔었다.



유강진 성우는 당시 토요명화의 시청률이 두자리대를 계속 이어갔다고 술회했다. 라이벌인 주말의 명화 또한 비슷한 점유율을 보였을 걸로 추정된다. 두 프로그램 사이에서 어떤 일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숱한 뒷담화를 만들었을지도 궁금하다. 

그러나 외화프로의 황혼기에 들면서 먼저, 토요명화가 운명을 달리한다. 2007년, 토요명화는 폐지되고 주말의 명화 혼자 남았다. 주말의 명화 또한 토요일 시간을 사수하지 못해 금요일대로 시간을 옮겼는데, 재밌는건 명화극장 또한 어느샌가 금요일로 시간대를 옮겼다는 사실. 뒤늦게 두 프로그램이 같은 시간대에 만나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 역시도 지금은 명화극장이 토요일로 시간을 옮겨 지난 토요명화의 느낌을 가져가고 있는데다 주말의명화는 더이상 볼 수가 없게 됐으니 말 그대로 지난날의 추억이 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주말의명화와 토요명화. 양 프로는 3년의 시간차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나게 됐다. 사이좋은 노부부가 3년의 차를 두고 떠나간다더니 딱 그 모습이다. 라이벌같기도 했고, 때론 연인같았던 그들. 이젠 주말의 명화도 떠나보낼 때가 됐다.


마지막 프로그램이 '조폭마누라3'로 결정된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주말의 명화가 내보내는 마지막 영화가 무엇인가 봤더니 조폭마누라3다. 이걸보고 순간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사실 토요명화도 마지막 영화로 레딕을 내보낼 때 말이 많았다. 그 역사적 프로그램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엔 사실 작품성에 의문부호가 붙지 않느냐는 거였다. 조폭마누라3 역시 주말의명화 최후의 프로그램으로 걸리기엔 여러모로 말이 많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외화가 아니라 한국영화라는 점이었다.
처음엔 외화의 전당이었고, 무엇보다도 외화가 주전문이었던 주말의명화란 작품에 걸맞게 외화더빙프로그램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사실 이같은 생각이 더 격하게 발전되면 그 땐 토요명화 때 이상의 섭섭함이 묻어나올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 만난 유강진 성우의 '이젠 한국 콘텐츠도 엄청 발전을 했다'는 말에 생각이 미치자, 또다른 견해를 내놓게 됐다. 어느샌가 발전한 한국영화로 인해 주말의명화도 한국영화를 자주 선보이게 됐다. 그 사실 자체는 또 그 나름 대견하고 가치있는 일이 아닐까. 시작할 땐 외화로 시작했지만 끝날 땐 국산영화가 그 마지막 바턴을 받는다는 건 비록 주말의명화가 은퇴해야 하는 아쉬운 시대의 변화를 맞았지만, 그래도 그 변화 속에선 꽤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요소가 아니겠는가, 결국 한국영화로의 끝맺음은 나름 긍정적 변화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하고 말이다. 물론 외화와 함께 전성기를 맞이했고 또 그 산 증인이며, 그렇게 대성우로서 영욕을 함께 한 그 분이 이에 대해 동감할지 아니면 그래도 주말의명화의 끝은 우리들 성우가 마중나가는 외화여야 했다고 반발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물론 한켠으로는 많이 아쉽다. 그 본래의 색깔을 생각한다면 외화로 가는 편이 좋았을지도.  
   

참조할 글
(유강진 성우 인터뷰 참조 http://newsboy.kr/news/articleView.html?idxno=1162)
(다음 백과사전 'MBC' 참조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8m0921a)


권근택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