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스보이 기사(newsboy.kr)/시사

프리랜서기자가 전문지기자보다 좋은 백가지 이유

프리랜서기자가 전문지기자보다 좋은 백가지 이유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고개 숙이지 않으니까





다른 매체의 기자들은 백지영 씨가 나오기 전 자리를 잡느라 바빴다. 정면 각도. 매체를 불문하고 국장들이 당연히 요구할 자리다. 그들을 바라보며 난 팔자 좋게 한 컷을 찍는다. 누가 보면 "저 자식은 왜 여기다 필름을 낭비해?"라고 갸웃할 것이다. 그저 편한 자리에 앉아 스트레칭 하는 난 기자 같지 않게 보일 수도 있겠다. 여기선 피사체의 옆모습만 잡아낼 뿐. 그럼 함께 온 일행이 앞에 포진해 있느냐 하면, 그런 일은 없다. 뉴스보이엔 사진부 기자가 따로 없어요. 


9일, 서울 강남의 수상카페 프라디아.
이 날은 나 개인에게 있어 꽤 감흥있는 취재처였다. 거진 4년만에 밟는 패션쇼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가수 백지영 씨가 (주)코웰패션과 손잡고 런칭한 란제리 브랜드 '야르시비'가 선보이는 자리다.

먼저 간략히 내 이력부터 소개한다. 난 어느 패션 전문지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를 제외하고 내게 있어 첫 사회생활이자 기자 수업의 시작이었다. 짧다면 짧은 반년간의 수습기자생활. 그 새 많은 패션쇼 무대를 다녔다. 한 겨울에 휠라 수영복 발표회장을 간 건 이색적인 기억이다. 남성복 담당이었지만 여성복 컬렉션도 두루 경험했다.
만일 사표를 내지 않았다면, 지금도 업계 터줏대감으로 패션소식을 전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간만에 옛 전장에 나서니 기분이 묘하다. 어느덧 옛날, 지금보다 좀 더 젊었던 내가 떠오른다. 회사 하이엔드를 들고서 현지퇴근할 요량으로 찾아가 다른 기자들 틈바구니 속에서 얼떨떨하게 서 있었던 나 말이다. 프리랜서 선언한 지금의 나, 그리고 수습딱지를 달고서 출퇴근하던 그때의 녀석이 함께 업계를 누비고 있었다.


그 때보다 지금이 좋은 첫번째 이유, 눈치보며 굽힐 필요가 없으니까

사실 이 날 취재는 순탄치 않았다. 초대장이랍시고 날아온 것의 약도는 간략하다 못해 신경질이 날 정도다. 알려준 대로 지하철역에 내린건 좋았는데, 여기서 찾아가려니 막막하다. 지하철 안내도를 보니 현장은 600미터 이상 떨어진 바깥에 있다. 그런데 1번출구에 셔틀버스가 있단다.

전화로 문의를 했다. 그런데 상담원은 전화로 "어 셔틀 버스 없는데"라고 한다. 지금은 안 다닌단다. 자, 여기서 나와 4년전 녀석은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다.

먼저 현재의 나. "그럼 안내표를 다시 수정해야죠"란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다시 밀어넣는다. 까짓거 말 못할것도 없지 싶다.
다시 전화로 그럼 일반버스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일반 버스도 안 다닌다"고 답한다. 뒷목잡을 일이다. 걸어서 3번출구방향으로 걸으면 되는 거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대뜸 "걸어서 오기엔 너무 멀다"며 "택시 타고 오면 기본요금밖에 안 나온다"고 생글생글 웃는 목소리로 전해 왔다. 알고보니 차라리 전 역에서 내리면 환승버스가 있었다나.
뭐, 이 사람한테 따질 일이야 아니지만서도, 다른데 놔두고서 버스도 없고 기본요금이나마나 택시타고 가야 할만치 먼 곳을 가타부타 설명없이 약도에 박아 넣은 건 빈말로도 이해해 줄수가 없네.
넷중에 하나다. 강남 사는 사람들은 택시값 그까이거 뭐... 이런 게 상식이거나, 아니면 초대장 쓴 인간이 성격파탄자거나. 본심이 아니었다면 아이큐가 두자리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택시 기본요금조차 내기 싫어 이렇게 역정내고 싶어하는 내가 절라게 비루한 거거나.

4년전의 녀석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허둥지둥 택시를 잡았겠지.

"아이구 지각하겠네 별수 있나 택시가 어디... 어디있지?"

아이쿠 내가 큰 잘못을 했네. 더 일찍 여유를 두고 나올 걸. 지각하면 행여나 주요 프로그램 다 놓치는 거 아니야? 내일 국장님이 물어보면 난 뭐라고 답하지? 뭉게뭉게... 이렇듯 큰 걱정을 이고서 택시를 잡았을 것이다. 택시값 청구? 그런 거 꿈도 못 꾸지.
만일 지각하여 기사가 제대로 안 나오면 국장은 내게 이렇게 호통칠거야. "야 이 반란군노무 새끼야, 저기서 광고가 1년에 하나씩은 족히 나오는데 이따위로 기자질하냐"라고.

무작정 걸어가는 프리랜서는 망상 중에 픽 웃는 것이었다.

"지금이 그 때보다 나온 백가지 이유는 광고 때문에 눈치 볼 필요가 없어서다." 



그 때보다 지금이 좋은 두번째 이유, 눈치보며 굽힐 필요가 없으니까

비가 내리면서 후덥지근한 날씨. 걸어서 거진 40분을 걸었다. 언젠가 내가 차 끌고 다닐만치 성공하게 된다면 그건 이 날의 기억 때문이라고 회고하겠노라.

한참을 걷다 목적지가 보인다. 앞에 택시 한대가 서더니 내려선 어느 여성이 허겁지겁 달려간다. 기자인가 보다. 그 뒤엔 4년전 그 녀석이 함께 뛰고 있다.

저 사람도 그 때의 나와 같을까.

당시 나는 기자 뿐 아니라 광고도 겸해야 하는 처지였다. 당시 백발이 성성하던 국장님 말로는 "전문지는 다 그래"라고 했다. 아니, 일간지도 마찬가지라고 했나. 아마도 영세하고 타겟이 딱 한정된 전문지는 태반이 기자가 영업을 함께 겸하는 것이고, 일간지 역시 광고주 눈치를 보는건 마찬가지라는 뜻이었겠지. "과거 한겨레 정도가 광고에 연연하지 않아 화제가 됐지만 역시나 어렵다"라고 했던가. 

난 기사는 웬만큼 즐겁게 써내려갔지만 광고엔 통 수완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충실히 취재하는 것 뿐. 그러니 취재터에 늦으면 '기사 부실 = 광고 안 돼'란 공식이 절로 튀어나왔다.

지금의 나는 태평하다. 웃으며 저 둘을 바라본다. 광고 영업 뛸 일이 없으니까. 기사? 이거 안 되면 다른 아이템 잡지 뭐...

"지금이 그 때보다 더 나은 백가지 이유는 광고 때문에 눈치 볼 필요가 없어서다."





그 때보다 지금이 좋은 세번째 이유, 눈치보며 굽힐 필요가 없으니까

도착해서는 곧장 안 가고 맞이하는 사람한테 묻는다. 초대장 보여주며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넌지시 물었다. 그는 "어 잠원역에서 걸어오긴 먼데..."하고 말 끝을 흐린다.

난 초대장 누가 쓴거냐고 질문을 이었다. 홍보대행사가 한 거냐고 하니 그렇단다.

"기자질 하면서 이런 초대장은 또 처음보네요"

할 말 다 하는 내 옆에서 지금보다 젊은 녀석이 헤헤거리며 넙죽 고개를 숙인다.

"늦어서 죄송함다, 아! 이거 내 명함인데... 혹시 마케팅 부서신가요? 광고 책정을 직접 하시는지..."

난 싱긋 웃고 먼저 문을 열어젖힌다.

"지금이 그 때보다 더 나은 백가지 이유는 광고 때문에 눈치 볼 필요가 없어서다."



그 때보다 지금이 좋은 네번째 이유, 눈치보며 굽힐 필요가 없으니까

들어가서 카메라를 꺼내들고, 시험 사격을 한다. 옆에선 젊은 놈이 아직 손에 설익은 회사 카메라를 어루만진다.

"오늘도 잘 부탁한다"

"어어, 회사 물품 조심해야 하는데"

사진을 찍는다. 쭉쭉빵빵 여성 모델은 안 찍고 올록볼록 엠보싱 남성 모델만 찍는다. 빨간 꽃무늬 팬티의 짐승돌, 내 취향이다.

내일 국장이 편집하다 말고 따진다. 먼저 젊은 나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니 사진 찍을 줄 모르나? 왜 뒷모습을 찍어? ...하아아, 이래갖고 광고 나오겠나."

그 놈은 무 대리마냥 고개만 숙이고 있다.

이번엔 서른즈음에 닿은 나다.

"왜 남자 사진을 찍냐고요. 난 여자 사진을 원해!"

난 바로 답하길

"내 취향이예요."

그리고 한마디 더 한다.

"기사 썼으니 광고 좀 물어오세요."

프리랜서가 배고파도 나은 백가지 이유.

"지금이 그 때보다 더 나은 백가지 이유는 광고 때문에 눈치 볼 필요가 없어서다."
 



그 때보다 지금이 좋은 다섯번째 이유, 눈치보며 굽힐 필요가 없으니까

홀 안은 꽉 차 있다. 프레스석은 거진 만석. 카메라기자들은 맨 앞에 진을 치고 있는데 그냥저냥 낄 틈이 없다. 하다못해 옆 좌석에 앉을 곳이라도 찾아 안착해야 한다.
이런 자리에 가면 라이벌매체서 오는 기자들은 십중팔구 매번 마주치는 그 사람들. 어쩌다 보니 내가 매체의 대표선수로 와 있다. 자의 반 타의 반 내가 체신을 세워야 한다. 어떻게든 엘레강스한 표정으로 느긋히 앉아 기싸움에서 밀리지 말아야지... 그래, 국장님도 그랬잖아?

"광고 내는 사람도 딱 사람 보고 광고 낸다고. 기사 잘 쓰고, 또 얕잡혀 보이지 않는 기자한테 함부로 못 해."

여기서도 결국은 광고... 아아, 난 기사 쓰러 온 건데 왜 매번 광고에 얽매이는 거지?

애써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연기하는 젊은 놈을 측은하게 바라보던 나는 좌석에 앉은 여성이 "어머나" 하거나 말거나 바닥에 철푸덕 앉는다. 패스트푸드점에 자리 없으면 문 밖에 서서 햄버거 호일을 벗기고 입에 베어물듯, 눈치 안 보고 편한 데 앉아버린다. 체신이 밥 먹여주나.

"내가 저 녀석보다 더 나은 백가지 이유는 광고 때문에 눈치 볼 필요가 없어서지."




그 때보다 지금이 좋은 여섯번째 이유, 눈치보며 굽힐 필요가 없으니까

패션쇼가 끝나고, 이 날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백지영 씨가 등장한다.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진다.

옆을 기웃한다. 아니나 다를까 저 친구는 고민하고 있다.

'신문사명을 또박또박 밝히고, 뭔가 그럴듯한 질문을 꺼내야 할텐데, 그래야 돈 줄을 쥔 사람이 "어디 신문? 저기 광고는 제대로 신경쓰고 있어?" 하고 눈여겨 볼 것이다. 어느순간부터 독자를 위한 질문이 아니라, 광고주가 날 의식케 하는 질문을 하려 애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뭐, "이게 직업이니까"라고 생각해버리면 맘은 편하다. 그저 "우리가 언론인지 광고대행사인지 모르겠다"는 한숨만 들이삼키면 돼...'

그의 머릿속을 다 읽었다. 난 질문을 할까 말까 한두번 망설인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질문 하나 정도 하고 가는게 좋지 않을까...하는 정도. 딱 그 정도의 생각이 날 움직이게 한다. 질문은 이제 시작하는 장소니까 가벼운 걸로 던지자. 손을 들고 질문한다.

"먼저,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얼씨구. 4년전 그 때 국장님이 그리도 원했을 여유가 절로 묻어난다.

"아까 내 하체는 통통하다고 했는데, 네티즌들이 가만 안 있을 걸요? 책임질 수 있어요?"

옆에서 한 여자가 웃는다. 그리고 저 옆엔 그 녀석이 뜨악한 얼굴로 여길 바라본다. 아니, 그런 질문을 던져도 돼? 기사에 그걸 실으면 저 쪽 국장은 읽어보다 뜨악하지 않는거야? 곧장 "이런 질문이 광고주 맘을 움직일 수 있느냐"고 질책하지 않겠어?

"내가 자네보다 더 나은 백가지 이유는 광고 때문에 눈치 볼 필요가 없어서지."

언젠가 미디어몽구님이 코치해 준게 있다. 이런 자리에 나서면 군중들이 좋아할 만한 꺼리를 물으라는 거다. 별 걸 다 닮아가고 있었다. 광고주 눈치는 볼 필요없다. 다만 독자 눈치는 봐야지.


그 때보다 지금이 좋은 첫번째요 마지막이요 백가지의 모든 이유, 눈치보며 굽힐 필요가 없으니까

쇼는 끝났다. 바깥은 폭우가 쏟아진다. 내 어깨를 툭 치며 달려가는 저 녀석이 "실례합니다"하고 허둥지둥 내달린다. 노트북도 없고, 그저 빨리 달려가 기사 마감을 해야 한다. 회사에서 바로 달려나온 지라 우산도 없이 물에 빠진 생쥐꼴로 비를 뚫는다. 난 힘내라고 손을 흔들어 줬다.

또 다시 시바시바 하며 먼 귀가길을 걷는다. 버스를 타니 어느 매체 기자가 급하게 넷북으로 기사 초안을 써낸다. 대강 읽어보니 전형적인 스트레이트다. 몇일 저녁 어디서 전개하고... 괄호 열어 대표 이름 넣고, 거기서 패션쇼가 성료되었다는 내용.

카메라 각도도 그렇고, 기사도 그렇고. 말하자면 이건 정면에서 잡아내는 전형적인 것들이다. 어느정도 독자가 확충된 채널을 지닌 이가 1차적으로 내보내는 미덕인 셈이다.

반면 난 카메라 각도에서도 그랬고, 기사도 그렇고. 다른 모습을 캐치해야 한다. 그걸 즐겁게 머릿속에서 그려낸다. 어차피 시의성과는 무관하기에 천천히 그려내도 된다. 대신 저들은 절대 찍지 않았을 자신들... 아니, 우리들이라고 하지. 취재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찍어낸 컷도 하나 오려내고, 옛 이야기도 회상하며 그렇게 스토리텔링을 해간다. 기사체는 상관없다. 내가 원하는대로 뽑아내면 그게 기사다.

뉴스보이는 기사체를 요하지 않는 매체다. 아마도 국내최초고, 지금도 드문 그런 신문. 바로 이게 그런 기사다. 언젠가, 저 친구가 한번쯤 바라던 바를 지금의 내가 하고 있다. 언젠가 경남도민일보의 편집부장인 김주완 기자가 "기사체는 리미터가 걸린 쓸모없는 형체다"라 정의한 적이 있는데, 그런 점에 있어 난 좋은 매체를 잡고 있는 거겠지.

프리랜서는 많은 애로사항을 꽃피우는 존재다. 아마도 출퇴근 하는 정규기자들 앞에 수십가지가 넘는 단점을 나열해야 할 거다. 하지만, 저들은 갖지 못하는 장점을 백가지 갖고 있는데,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마지막 백번째도 광고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아까 먼저 달려간 저 친구는 수습딱지를 뗄 때, 스스로 사표를 던질 것이다. 회사에서 정식기자로 채용한다고 해도 스스로 광고하는 기자는 스스로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며 그렇게 나갈 것이다. 너무 고지식해서 스스로 지옥과도 같은 감옥에 갇혔던 그 애송이는 그렇게 탈출을 하겠지.

"지금의 내가 그 때의 나보다 더 나은 백가지 이유는 광고 때문에 눈치 볼 필요가 없어서다."

저 친구는 향후 '더 좋은 타이틀'보다 자유를 얻고 싶어할 것이다. '프리랜서'란 허울좋은 직함은 딱이다. 언젠간 그 허울을 들추다 몇번이고 후회할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광고에 이어지는 주객전도의 체제 하에서 숨막히게 살던 그 날을 떠올린다면 단 하나이자 백가지요, 모든 것인 그 선택의 이유 앞에 그 후회감을 기꺼이 씻어낼 것이다.


ⓒ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