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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류인생의 소우주, 구로 아울렛 상권

잔류인생의 소우주, 구로 아울렛 상권을 가다
'쨍' 했던 과거와 '땡'처리의 오늘, 인간사 옮겨놓은 시장
           
 
           

 

서울 지하철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내리면 찾아들 수 있는 아울렛 단지, 소위 '구로 아울렛 상권'으로 불리는 그 곳은 인간사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날의 평일 오후지만 쇼핑 나온 사람들의 발길은 분주하다. 살 만한 물건이 있다는 말이다.

이 장소는 내게 있어 숱한 상념을 몰고 오는 장소다. 패션지에서 수습기자로 수업을 할 때, 참 많이도 드나들던 장소. SG 같은 회사도 이 곳에 위치해 있고, 조금 걸어들면 아파트공장단지에 에스티코나 예작 같은 브랜드라던지 숱한 섬유업체 사무실이 들어 있기도 했다. 마리오아울렛을 위시해 당시로선 신참급이었던 원신 등 크고 작은 아울렛점이 포진한 장소는 상권 동향을 알 때도, 업체나 업계 기사 소스를 얻을 때도 늘 유용한 장소였다.

           
 
           
 


같은 날 입사해 함께 다녔던 동갑내기 동기가 있었다. 그는 이 곳을 바라보며 동대문의 쇠락과 아울렛의 성황을 점쳤다. 땡처리에 가까운 세일가로 신사복의 가격이 동대문패션상권의 물건과 거의 비슷한 수준을 이루는 것에 "자신이라도 여기를 택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 우연찮게 흘러들어온 곳은, 놀랄만큼 변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 때문에 더한 건지도 모른다. 지금 꺼내는 상념은.

이 장소를 잘 아는 쇼핑객들은 언제나 수비 범주에 올려놓을 만치 이월상품의 물동량이 많다. 브랜드 상품들에 있어선 제2의 인생과도 같은 곳이다. 그냥 지나치던 시선에도 순간 멈칫할 알림표가 여기저기서 손짓한다. 중저가 브랜드서부터 해외 명품 브랜드까지, 이름쯤은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것들이 60퍼센트, 80퍼센트 세일을 얼굴에 붙이고 있으니까.

신상품도 더러 있지만 역시나 이 곳의 백미는 이월상품 고르기다. 몇십만원 하던 신사복은 5만원에 내걸린다. 캘빈클라인 선글라스는 45000원에 손을 오르내린다. 버커루나 자라 같은 메이커가 절반 이하가의 세일 퍼센트를 내걸고, 보다 명확하게 가격을 제시한 코너에선 1만원짜리 바지, 5천원짜리 티셔츠를 쉽게 볼 수 있다. 여긴 그런 곳이다. 이월상품이라지만 엄연한 메이커기에 고객에겐 묘한 신뢰감을 준다. 동대문과는 비교되는 아울렛만의 장점이다.

           
 
          

 

쇼핑에 들어서면, 잔류인생을 그대로 엿볼 수 있는 순간이 열린다. 본래의 몸값에서 과도한 살을 깎아낸 상품들을 보고 있자면 대개의 인간이 언젠가 맞딱뜨리게 되는 그 때와 닮아 있다. 누구나 "좋은 시절이 있었다"고 말한다. 한 때는 나도 귀한 몸이었다고, 이렇게 살지 않았다고. 그건 "꿈이 있었다"라고 푸념하는 젊은 실업자나, "왕년엔 나도"를 레퍼토리로 읊는 중년 내지 초로의 회상에서 너무도 많이 듣고 보지 않았던가.

그들은 한 때 귀한 몸이었다. 브랜드였고, 물건너 온 상품이었다. 그러나 철이 지나 '이월상품' 딱지 붙는데는 장사 없다. 베스트셀러였고 재판 삼판을 찍어내던 모델이라도 일절 없이 같은 신세다. 나이에 장사없는 인간들과 진배 없다. 그래서 한켠으로는 묘한 한숨이 배어나오기도 한다. 인간과 상품의 절묘한 공감대다.

상품이 출시되는건 으례히 S/S, F/W 시즌이다. 그 시즌, 한창 잘 팔리던 상품들은 시즌 아웃과 더불어 이월상품이 된다. 6개월이 지나고, 1년이 지나면 이들을 본 매장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 물론, 아울렛이나 상설할인매장 애호가들에겐 그 때부터가 진짜 시즌이니 이 곳은 물건들에 있어 제2의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과거의 그 영광은 사라지고 한참 깎인 몸값을 감내해야 한다. 과거엔 만져보는 것마저 조심스럽더니 여기선 이 사람 저 사람의 억척스런 손길을 타게 된다.

다시 세월이 흘러 출시 2년째가 지나면 이들의 행보는 둘 중 하나다. 조금 일찍 우리보다 트렌드가 늦는 동남아 등의 해외시장으로 팔려가던지, 그나마도 티켓을 놓쳤다면 소각 처리된다. 업계와 전문지계의 정설이다. 인간으로 치면 퇴역 내지 사망의 시점. 그래서 팔리지 않는, 상품 상태의 패션 아이템들이 지닌 평균 수명은 2년이다. 그 중간에 위치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 곳은 정년퇴직이나 앞서 퇴사해 새 삶을 찾는 요새 사람들의 그 시절과 꼭 닮지 않았는가.

           
 

           
 
나도 생각치 않게 1만원짜리 선글라스를 하나 집었다. 본디부터 3만원에 팔리던 저가 제품이지만 그래도 1만원에 집기는 쉽지 않은 법이지. 한 때 잘나가던 이들이 이렇듯 뜻밖의 수요자들과 만남을 갖고, 그렇게 새 인생을 살게 되는 모습들. 어느샌가 '잔류인생'이 늘어만 가는 현대 사회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았다.

그래서 한편으론 구슬프고, 또 한편으로는 가끔이라도 찾게되는 그런 곳이다. 어쩜 우린 우리를 비추는 거울을 사러 이 곳에 들어서는 지 모르겠다.

아참, 여기서도 실내 촬영은 금기시된다. 그 점은 백화점과 마찬가지다. 아무리 몸값이 깍이고 곧 죽어도 자존심 하나는 남았다는 사람의 그것과도 꼭 닮지 않았느냔 말이다. 



ⓒ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