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 내가 2년째 앓는 촛불집회 후유증
# 여기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선, 네티즌과 시티즌의 담소터.
지금이... 딱 5시네. 오전 다섯시.
굿모닝 에브리원~? 천만에요.
나 아직 잠 못 들었어.
68. 내가 2년째 앓는 촛불집회 후유증
어쩔까 하다가... 결국 침소에 드는 걸 포기했다. 옥체가 상할까 걱정이로다.
그냥 커피물을 올린다. 배가 고파서 커팅안된 식빵도 한 덩이 꺼내어 든다. 참 치유되기 어려운 후유증이로다. 오늘도 밤잠을 놓치네 그냥.
"촛불이 승리한다"는 신부님들의 서울광장 현장 시국미사 때 그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다. 벌써 2년이다.
다시 과거 기사를 찾아 봤다. 역시 가장 아끼게 되는 기사는 12시간동안 경복궁 앞에서 물대포 맞으며 지샜던 그날의 기사다. (http://www.newsboy.kr/news/articleView.html?idxno=3381)
지금 생각해면 어떻게 그리 취재했을까 싶게 만드는 휴대폰카메라의 작업물들. 하지만 지금 보니 뭐랄까, 저 열악한 화질의 사진은 지금의 하이엔드와는 또다른 느낌이 있다. 귓전엔 저들의 함성이 여전히 맴돈다. 내 잠을 방해하는 건 그 기억 속 공감각때문일지도.
2년새 참 많이 변했다. 광화문은 소위 '문화의 장'이 되어 이제 집회가 어렵게 됐다. 말 그대로 '미명'이란 이름, 그 아름답다는 의미를 여러 관점에서 곱씹게 한다.
대통령 각하의 기억력 감퇴가 심히 염려된다. 2년전 두번씩이나 대국민사과에 나서며 아침이슬 노래를 들었고 또 뼈저린 반성을 했다더니, 이젠 과장된 촛불에 반성하는 이 없다며 사회적 책임을 물으신다. 손바닥 뒤집듯 2년새 참 많이도 변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2008년의 5월부터 6월까지. 그 한달안팎의 내 인체 시계가 아직도 거기에 맞춰져 있다. 이젠 광화문이나 경복궁 앞에 야간취재 안 나가도 되는데, 밤이 되면 눈이 말똥말똥하다. 머리까지 맑다. 그 때 한시적으로 맞춰놨던 밤낮 뒤집기 신공이 이젠 벗어날수 없는 마법인양 풀리질 않는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출퇴근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데 그 또한 한몫했다. 그 촛불의 현장 이후부터는 어느새 불면증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밤낮이 바뀌었다고 할지 여튼 다른사람들과는 다른 시간 운용을 하고 있다. 밤에 깨어있는 날이 어지간한 사람보다 훨씬 많다.
나도 언젠간 10시에 잠드는 삶을 한 적 있었지. 군대 생활. 하지만 이제 10시라면 당신의 아침 10시나 내 밤 10시나 별 차이가 없다. 새벽녘이 밝아오는 걸 보며 밤이란게 참 짧다는 걸 느꼈다. 해가 떠서 노을이 지는 것보다 석양부터 일출까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더 늘어서 그런가?
글 쓰는 직업이란게 밤을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밤이 되면, 내 신체감각은 상당히 민감해 진다. 편안해야 할 그 시각이 되면 내게 다가오는 바깥의 소리에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마치 2년전 그 광장에서처럼.
밤엔 시민과 경찰의 충돌현장에서 방어자세를 취하곤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어댔다. 날이 밝아온 여명 땐 물대포 진압에 함께 물벼락을 맞고, 뒹굴며 심호흡했다. 참... 지금 보니 기도 안차는데 이거?
각하의 기억력에 섭섭함을 떠나 분노가 느껴질 정도로 말이야. 설마 저 사람들더러 사과하라는 말은 아니겠지?
직업병이라고 해야할까. 난 2년이 지난 지금도 밤낮이 뒤틀린 생활을 하고 있다. 밤에 나가 철야 르포를 시작하고, 아침에 돌아와 속보성 기사를 내보낸뒤 잠들고, 다시 일어나 장문의 르포 리포트를 쓰고. 어찌된게 지금까지도 그때의 생활이 지워지지 않고 남은 것이냐. 어쩜 나 역시 일종의 피해자일지도.
벌써 2년. 당시 이들을 조명했던 언론인들은 여전히 후유증을 앓고 있다. MBC와 한겨레는 지금도 고군분투 중이다. 어느덧 보수진영에게 수없이 받은 '좌빨 매체'란 말이 이젠 친근하게까지 느껴질테지. 그리고 당시 카메라도, 기자증도 없이 그저 명함과 수첩과 볼펜과 200만화소 카메라 달린 휴대폰만으로 겁도없이 근거리 취재를 했던 햇병아리 저널리스트는 이제 촛불집회 후유증으로 새벽 5시부터 이렇듯 이 글을 쓴다.
덕분에 좋은 일도 있었다. 이후 노무현,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 정국을 비롯 새벽 현장에 나가 있어야 하거나, 원거리서 전해지는 소식을 밤에도 쉴새없이 캐치해야 할땐 속보성을 다투는 기사를 낼 수 있었다. 또 늦게 돌아와 새벽까지 집중력을 키우며 쓴 기사가 좋은 반응을 얻어낸 적도 많았다. 김대중 전대통령 국장 때 시청 앞에서 세트가 휘어지는 사고가 벌어졌을땐 현장서 일간지보다 한발 빠르게 급보를 냈었고(http://kwon.newsboy.kr/1385), PD수첩에서 대형사고를 칠때면 실시간 모니터링과 더불어 펜을 휘갈겼다.
야행성에 길들여져 있지 않았다면 이 광경은 놓쳤을지도 모른다.
아연이네 가족을 조명하며 30만명의 조회객을 내 블로그에서만 기록했던 그 글도 새벽 밤을 지새우며 만든 작품이었다.(http://kwon.newsboy.kr/1012) 본의 아니게 심야의 파수꾼으로, 또 밤의 라이터로 활약할 수 있었던 것.
인연도 많이 만났다. 한글로 님, 미디어몽구 님 그리고 그외 많은 사람들. 실력있는 야인 저널리스트들과 '동지'라는 단어를 나눌 수 있게 됐으니. 이게 곧 배고픈 프리랜서의 일상을 지탱해준 또하나의 힘이다.(다른 하나는 비밀)
하나 더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건 내가 그 때, 정말 현장에서 발로 뛰며 저널리스트로 살았다는 걸 증명하는 증표같은 거다. 나쁘지만은 않은 그런 후유증이고 직업병인 거지. 너무 강렬하게 각인을 했기에 2년씩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도.
이젠 좀 다시 돌아가고 싶은데. 정작 주간에 활동할 땐 흐릿한 머리로 고전하는 건 고욕이란 말이다. 아아, 이 길고 긴 촛불집회 후유증이여.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