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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서울의 꿈 재건" 이계안 민주당 서울시장 출마선언자

[인터뷰] "서울의 꿈 재건할 것" 이계안 민주당 서울시장 출마선언자 


12월 21일 국회 정론관. 천정배 의원을 비롯 민주당의 굵직한 인사들이 한데 모였다. 그리고 한 가운데에 선 한 남자, 몇분간에 걸쳐 발표문을 읽어내려갔다.

"시민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서울은 아이를 낳아 키우기가 너무 힘들다, 서울에 살 수 있는 문턱이 날로 높아만 간다고 말합니다... 서울은 저를 차별하지 않았고, 가난을 벗어날수 있다는 희망과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 서울의 지금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는 발표 후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그는 서울의 현재 모습에 대해 "이게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자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

"이게 아니면 뭡니까?"

기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진다. 그의 이름 때문이다. 평소에도 자기 이름을 가지고 "이계안입니다(이게 아닙니다)"를 즐겨 쓴다고. 그는 한 술 더 뜬다.

"이게 아니고, 이계안인 것이죠. 서울은 '이게 아니고' 답은 '이계안입니다'."

공식 발표를 며칠 앞두고, 그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민주당 경선, 나아가 서울시장 자리를 놓고 내년 6월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한판 승부를 벌일 수도 있는 예비후보자와의 인터뷰다. 민주당 이계안 전 의원과의 조금은 길었던 이야기를 이 자리서 풀어본다.

    

 

[인터뷰] "서울의 꿈 가꿀 것" 이계안 민주당 서울시장 출마선언자 

 

그를 만나기 전, 그를 좀 안다는 어느 파워블로거에게 물었다. 개인감정 제쳐두고, 솔직히 어떤 사람이냐고. 솔직히 나는 정치 쪽 기사를 쓴다는 주제에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답변은 간단했다. "그럭저럭, 인물은 괜찮다, 다만 네임벨류는 약하다"

프로필을 살펴봤다. 현대 그룹 출신의 전문경영인. 현대맨? 일단 이건 나중에 다시 짚기로 하고. 여하튼 1999년 한국의 대표적 전문경영인 50인에 선정된 경제인 출신이다. 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지난 18대 때는 불출마했다. 민주당 전 의원으로 내년 지방선거 때 서울을 노린다.

그리고, 진행된 인터뷰.

그의 명함을 받아보면, '2.1 연구소'가 선명히 찍혀 있다. 며칠 전 출범한 연구소의 이사장. 무슨 연구소길래 2.1 인가.

"사람들이 맨 먼저 궁금해 하죠. 여러 가지 추측을 하는데 못 맞춰요. 이십일세기냐, 남북이 만나서 2.1이냐... 심지어 2ne1이냐고도 묻더라고요? (폭소) 그런데, 딱 한사람, 내 학교 후배인 최재천 교수가 알아 맞추더군요. 형, 그거 출산율이지! 하고요."

그는 현재 한국사회, 특히 서울은 출산율이 바닥을 치다 못해 내전국가 수준까지 떨어졌다며 아직도 많은 정치인들이 신경쓰지 않는 '발등의 불'임을 강조한다. 최소 요건의 이상적 출산율을 '2.1' 수준으로 잡았다고. 그것이 '2.1 연구소' 간판에 담긴 의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연구소가 그냥 출산율 장려를 위한 곳이냐. 그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 출산율이 내려가는 것 자체가 사회 전반에 걸친 악재와 어려움에 의한 결과이며, 출산율이 회복되는 것은 결국 서울을 비롯해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이 총체적으로 나아진 결과가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 즉, 이 연구소는 교육과 보육 문제를 넘어 '삶의 질' 전반을 다루는 셈이 되며 이것을 축약해 대외적으로 내보이는게 2.1이란 수치다.

대화 중 "왜 시장이 되려는가, 정치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대목에 닿는다. 그는 뜻밖에도 "싸우는게 정치인 본분 아닌가"하고 말한다.

"대개 분들이 그래요. 왜 정치인들은 맨날 싸우냐고. 그런데요, 난 정치인 본분이 원래 싸우는거라 생각하거든요? 주먹질 하는 그런 싸움 빼고. 안건을 놓고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곧 정치인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해요. 단, 문제는 그 싸움의 본질이거든요? 그게 잘못됐기에 부정적 시각이 큰 거죠."

서울 시장은 어떤 존재라 생각하는지 물었다. 직설적이고 간단하게 질문했다. "인턴 대통령이냐, 아니냐"라고.

그는 잠시 숙고하더니 말한다. "서울특별시장을 인턴 대통령과 매니지먼트의 두 가지로 나눈다면 자신은 후자"라고.

"인턴 대통령은 아직 생각 안 해 봤어요. 물론 시장을 하다가 도전할 기회가 올 수도 있겠죠. 뭐 그건 그 때 생각해 볼 문제고. 그 가능성을 무작정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걸 의식하는건 아니고요. 진정 '삶에 깊이 들어가는 매니지먼트'로서의 시장을 목표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게 제 적성과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자원배분과 이에 관한 경제적 타당성 선별에 있어 능력이 있다, 그렇게 자평하겠습니다."

서울시장이 되면 무엇을 꼭 해보고 싶은지 물었다.

"주택과 보육에 있어서만큼은 극좌에 가까운 생각입니다. 이 두가지가 없으면 2.1이 안 되거든요. 사실 교육문제에 있어 현재로선 시장에게 마땅한 권한이 없어요. 그래서 만일 제가 시장이 된다면, 교육권에 있어선 시장에게도 주장할만한 고유의 권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제 의견을 피력할 생각입니다."

    
 
    

 


앞서 밝혔듯, 그의 이력을 보면 'CEO'에 시선이 닿는다. 현대자동차 사장,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 회장 등 현대그룹 계열의 두뇌였던 그다.

"난 빌게이츠를 좋아해요. 그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그의 시장원리. 그건 정부지원의 굴곡 없이, 완전경제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실상은 시장의 시스템이 완전치 않아 그게 곤란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돈을 미란다 빌게이츠를 통해 쓰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자기 돈을 사회 약자를 위해 쓰는 것이거든요."

좀 더 직접적으로 질문을 갖다댄다. '현대 그룹 CEO 출신'에 대해서. 현재 대통령을 지내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도 현대 그룹 CEO 출신이 아니던가. 

"실질적으로 나와 이명박 대통령의 차이가 뭐냐 묻는다면, 난 거쳐간 회사가 달랐다는 말 밖엔 할 게 없네요."

"...그 말 밖에?"

"네. 단, 이건 웃을게 아니라 정말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그것이 이명박 대통령과 자신의 결정적 차이라고 단언한다. 같은 현대맨이라도 전혀 다른 성향이라는 것.

"그 양반(대통령)이 손댄 회사들을 떠올려 보세요. 공통점이 뭐지요? 대하는 사람들, 즉 고객이 손에 잡히는 회사였습니다. 손에 꼽을만치 적었다는 거예요. 그가 거친 건설사, 제철사... 생각해 보세요. 상대하는 고객들이 얼마나 되는가. 계약하는 회사, 고객... 정말 손에 꼽아요."

대중을 상대하는 회사냐, 회사를 상대하는 회사냐의 차이를 말하는 것일까. 그럼 당신이 거친 회사는?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상대한 진정한 회사"라는 취지의 답변이 나왔다.

"현대석유화학, 현대자동차사장, 현대카드, 현대캐피탈 사장 등을 해봤습니다. 자, 이들 회사의 공통점이 뭔지 곧장 아시겠지요? 상대해야 할 고객이 너무 많아 일일이 알 수가 없어요.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데, 이는 고객 하나하나를 인지하고 외우는게 아니라 진정 시스템적으로 다뤄야 하는 성질의 경영이었죠. 현대 카드를 보세요. 진짜로 카드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고객의 대상이 아닙니까."

현대맨으로서도, 경영인으로서도 이명박 대통령과는 절대적 차이점이 있다는 이계안 전 의원이었다.

    
 



날이 저물고 어둑해 진다. 오피스텔엔 불이 들어온다. 마라톤 인터뷰가 반환점을 돈다.

"수도 서울에 대한 생각이요? 어디 보자... 난 서울특별시에 대해 다른 도시와는 달리 생각합니다. 단순히 특별시라서는 아닙니다. 난 21세기가 도시의 시대라 생각합니다. 국가간 뿐 아니라 도시간 경쟁도 중요하단 거죠. 한 때 거주자가 1080만까지 갔다 1020만 선에 머무르고 있는 이 도시, 정말 세계적 도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울러 개인적인 소회. 그는 자신의 삶에 있어 서울을 '꿈과 희망의 땅'이었노라고 말한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요. 으음... 난 촌놈이라, 처음 서울에 왔을 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것은, 삶의 기회, 희망을 얻은 기분이었어요. 서울에 입성한 사람은 정말로 거대한 성안에 들어온 기분일 것이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라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서울 드림'인 것인가.

"대학시절, 판자촌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만난 어느 사람은, 예쁜 찻잔에 차를 내어 주더군요. 그 사람은 '비록 지금은 내가 여깄지만 나중엔 더 나은 곳으로 갈 것이다'라는 희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난 사람들에게 내 자신이 곧 희망의 증표임을 보여 주고 싶어요. 시골에서 올라온 놈이 이렇게 현대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사장도 되어보고, 국회의원도 되어보고, 급기야 시장까지 했다고 말입니다. '촌놈이, 이렇게 될 수도 있구나' 하는 희망이죠. 사람들에게 내가 사회와 삶의 역동성을 말하면, ‘아, 저 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입에 은수픈 물고 나온 사람은 아니구나’ 하며,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라 믿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자신이 '서울 드림'을 이룬 주인공이며 곧 증거임을 어필하고 있었다. 며칠 후 출마 발표에서도 그는 희망과 기회의 땅이었던 그 서울을 다시 재현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야기 나온 김에 하나 더. 경영인이 정치인으로 변신할 때 생각할 것은 무엇인가라는 다소 철학적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의 답변은 명료했는데, 바로 '더 피플'의 피플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였다.

"더 피플... 링컨 미합중국 대통령의 명언이죠? 포 더 피플, 오브 더 피플 할 때 그 피플이요. 경영인은 이 피플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그저, 과거 경영에만 익숙했던 이라면 그 피플이 바로, 클라이언트에만 국한될 것입니다. 탁월한 관념이 없는 이상은 말이죠. 정치인이 되어선 그것이 바뀔 것인가. 어려운 문제죠. 하지만 전 이 점에 있어 경영인이었을 때부터 좀 달랐어요. 난, 경영에 손 댈 때도 좀 다른 사람으로 평가 받았습니다. 어떻게 인연이 닿았던 미국인들은 '당신 참, 다른 한국 경영인과는 다르다'라고 평하더군요. 피플은, 피플이죠."

    
 



그의 개인적 이야기를 들어볼까.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외조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꺼낸다.

"외할아버지가 어릴 적 말씀하셨어요. 넌 어디가서 사주 알려주지 말라고. 너에겐 벼슬운이 있다라고요."

이미 국회의원을 지냈으니 대단한 선견지명이다. 그는 그 선견지명의 외할아버지에게서 색다른 교육을 받고 자랐노라 밝힌다.

"언젠가 초등학교때 나와 학급우들이 술을 몰래 퍼 마셨을때, 반장인 내가 선생님한테 벌로 학교 오지 말라고 했어요. 내가 학교 안 가니 할아버지가 자초지종 듣고선 형을 시켜 선생님 모시고 오라는 거예요. 술상 잘 차려 대접하다가 나를 부르더니, 그 앞에서 막걸리 한잔을 퍼 주십니다. 대뜸 마셨죠. 시위하는 거였어요. 내 손자는 이렇게 집에서 대 놓고 술 마시게 하니, 선생님들 내 외손자 건드리지 마쇼라는 거였어요. 그러나 한번은 호되게 맞은 적도 있습니다. 벼꽃 필 때, 논의 물을 퍼다가 안의 물고기를 잡았던 것 때문에 혼이 났죠. 그 때 논물 퍼 버리면 꽃도 지고 농사를 망치거든요. 정말 호되게 야단맞았어요. 그게... 할아버님의 인성교육이었죠."

아버지에 대해선 여러모로 복잡하다. 그는 아버지의 정치활동으로 인해 연좌제에 묶였던 사람이다. 

"어릴 땐 아버지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찾아와선 중학 시험을 보라 했었죠. 그곳이 경기중학교 시험장이었습니다. 아버지라... 사실 내 성장과정에선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죠.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어요. 내가 고교 시험 볼 때, 서울 와서 아버지 신세를 지려고 했더니, 아 글쎄 약속시간이 되어도 오질 않아요. 그래서 문래동에 있던 만삭의 사촌 이모 댁에서 잠을 잤습니다. 결국, 아침에 미역국 먹고 시험을 봤죠. 그런 아버지예요. (웃음) 헌데 말예요, 아버지가 다른 건 몰라도 책은 많이 읽도록 해주었어요. 아마 내가 소년한국의 창간독자일 것입니다. 덕분에 독서에 재미가 붙었죠. 지금도 책을 많이 읽어요. 아, 만화책도 그래요. 남들은 숨겨놓고 보는것이었는데, 우리 형제들은 그걸 봐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책이라는 것은 장르 불문하고 제게 있어, 말 그대로 생활이었죠. 그거 말고? 아버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낭인처럼 사셨죠.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참 어렵더라고요."

연좌제 때문에 대학 시절에도 여러모로 에피소드가 많다.

"71학번이죠. 이리저리해서리(?)... 문성현, 이목희 등과 잘 어울렸는데, 함께 하던 이들을 보면 다 감옥을 갔다 왔죠. 실은 나도 감옥에 갈 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으면 꼭 사람들이 날 거기서 빼 주는 거예요.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로 이중처벌을 받을 거라 생각한 거였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여러모로 재밌는 사람이라 밝힌다. "재벌기업의 사장을 지낸 사람이 노동운동도 했고, 이러다 보니 날 만나는 사람들은 그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곤 한다"는 거였다. 글쎄, 이게 확실한 응원군이 없다는 불리함의 표현인 것인지, 아님 구체적 적군이 없다는 유리함의 표현인 것인지. 진보와 보수의 틀 안에서 비교적 자유로이 자기 뜻을 펼쳐볼 수 있는 사람이란 걸까.

아버지 이야기를 좀 더 물었다.

"얼마 전 공식석상에서 아버지의 연좌제로 피해받은 이야기를 하시던데, 감추고 싶은 부분이라기 보단 오히려 자랑스럽게 말하는거 같았어요. 현대에 들어가서도 연좌제 문제로 피해 본 일이 있을거라 짐작하는데요, 이젠 마음 속으로 화해를 한 건가요?"

"맞아요. 예전엔 정말 미웠어요. 낭인처럼 사셨으니. 헌데, 시간 지나니 이해가 가요. 예전엔 연좌제에 대해 아예 말을 못했죠.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말예요. 아 글쎄 우리 부부는 부르시질 않아요. 내 가족과 내 지인들은 다 부르셨건만. 불만의 표시일까요, 그래서 제겐 직접 유언을 남기신 것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말이죠. 아내는 나보다 큰 여인입니다. 그녀는 이에 대해 다르게 생각을 하라고 하더군요. '아 그럼 당신한테 평생 짐만 주셨는데  그 자리서 불러 무슨 말을 하겠어?'라고요."

이제 다시, 본인의 이야기로 넘어온다. 그는 ‘설명가능한 일’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난 그렇게 생각해요. 설명가능한 일, 설명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이는 정당한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라고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면 아마 대개는 부조리한 것이겠죠."

    


가벼운 이야기를 해 볼까. 스트레스 해소방법을 알려달라 했다. 그는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방법 두가지를 밝힌다.

"가끔가다 재래시장 가서, 생선가게를 들여다 봅니다. 가게 아주머니가 생선을 올려다 놓은 얼음을 봐요. 그것이 녹아내리는 걸 보면 느낍니다. 그게 얼음이 아니라 돈이 녹고, 눈물이 녹는다는 것을. 저걸 보며 아주머니가 무슨 생각을 할까. 그걸 보면서 어려운 일, 골치 아팠던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죠."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라 매우 무거운 이야기가 됐다.

"또 하나는 그저 걷는 겁니다. 등산도 하고요. 이 모든 것이 가능한건 뭔가에 참을 줄 알기 때문이다. 인내력이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같은 면도 있다고 웃는다.

"주판을 두 번 던진적 있어요. 가끔 불같은 면을 보이곤 합니다. 사원 때, 한번은 급박한 전화를 거는데 동료 하나가 분위기를 파악 못하고 장난을 치는 거예요.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미안하죠. 헌데, 내 맘은 알지도 못하고 그냥 전화를 똑 끊어버리네. 그래서 주판을 던졌는데, 맞았으면 죽었을 거예요. ...생각해 보니까, 그 놈 자식이 맞을 짓을 하긴 했네요. (폭소) 또 한번은 과장 때 세무조사받던 이야기입니다. 아 글쎄 제가 준비를 잘 해서 문제가 없으면 인정을 해야지, 그걸 갖고 괜한 시비를 거네요? 냅다 던졌어요. (폭소) 잘릴 수도 있는 사안이었는데, 윗선에서 '내가 아끼는 놈이고, 필시 이유가 있으니 그랬을거 아니냐'고 지켜 준 덕에 살았죠. 그런데 나중엔 제가 또 외나무다리에서 그 양반을 또 만나요. 뭐... 나중엔 화해했습니다."

"그럼 요새는 화나도 참으시나요? 주판을 안 쓰는 세상이잖아요."

"대신 만년필이 있죠. 과거 만년필을 300개씩 갖고 있었어요. 그게 제 수집 취미랄까. 맘에 안드는 사람이 있으면, 이름을 종이에다 적고선 그냥 만년필로 그 이름위에다 찍어 눌러버려요. (폭소) 그래도 요즘엔 제 마음을 추스려요. 오늘은 누굴 원망하지 않았나 하며 반성해 보죠."



노무현 전대통령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노 전대통령에 대해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끝까지 지켰다"고 평가했다.

"재벌총수와는 독대하지 말라, 전 그렇게 생각해요. 독대하면, 부패하기 쉽상인거죠. 그런데 내가 알기로 노무현 전대통령은 독대하지 않았어요. 맞아요, 그거 하나는 확실하게 지켰어요."

우연히도 그가 정치활동을 하다 가장 노했던 일도 노 전대통령과 관한 일이다.

"관습헌법이요. 물론 나도 솔직히 말하면 그것에 반대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게 그런식으로 흘러갈 줄이야. 난 그 때, '노무현 대통령이 정말 미움받는 구나'하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미움을 받는구나... 그는 마이너리티 중의 마이너리티 아니었던가요. 저도 그렇긴 하지만. 나중에 노 전대통령 돌아가셨을때는 이런 생각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선 그가 과연, 몸을 던지는거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고요. 무슨 다른 방법이 있었나요? 서거하신 뒤 저도 부엉이 바위에 올라가 생각해봤어요. 내가 만일 그 때 그런 입장이었다면 과연, 난 무엇을 했을까. 나도 죽었을거 같네요. 그 분은 진정 '죽어서 살았다'라고 할 수 있어요." 

"인터넷은 잘 하시나요?"

"으음, 많이 찾아보고 그래요. 시간이 많진 않지만. 그래도 내가 왕년에 타자기는 잘 쳤어요."

최종 질문에 돌입한다.

"마지막으로, '나란 후보는 정말 이거 하나 만큼은 자랑하고 싶다'라며 어필하고픈 점을 알려주세요."

"뭐가 좋을까요? 내가 정치인으로서 뻥치지 않는, 신뢰감 있는 사람이란 것을 보여드리고 싶네요. 언젠가 지인과 엔지오와 관련한 문제로 이야길 나눈 적이 있는데, '투명성이 필요로 하는 이런 자리엔 너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말해주더군요. 제가 아는 사람이 나를 그렇게 바라봐주고 있다는게 고마워요. 그리고... 여자하고 한 약속 빼곤 다 지킵니다.(웃음)"

"아내에게 좋은 남편은 아니신거였군요."

"그렇...죠? (실소) 선거 한번 하면 됐지 왜 또 하느냐고 볼멘 소리를 아내가 합니다. 과거 국회의원 선거 때도 '여보 나 딱 한번만 선거 나갈게'라고 약속했는데. 뭐 그래서 다음번 국회의원은 불출마 했지만. 그리고, 아들이 제게 이야기해요. 아버진, 정치하기엔 너무 착해라고."

바꿔말하면, "나는 착한 사람"이란 점을 어필하고 싶었던 걸까. '서울의 꿈'을 이뤄낸 장본인이고, 이젠 그것이 어려워진 서울을 다시 만인에게 있어 기회와 희망의 땅, '꿈의 서울'로 만들어주고 싶다는 서울 시장 출마 선언자, 이계안 민주당 전 의원이었다.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