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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영화제 리뷰-2] 죄의 천사들, 천사는 숨결로 구원한다

[리뷰] 죄의 천사들, 천사는 숨결로 죄를 구원할 수 있는가 
충무로 국제 영화제 상영작 - 2 

 
 
40년대 영화를 봤다.

프랑스 영화.

흑백 영화.

종교 영화.

빈 좌석이 좀 있는 영화.

이만하면 대충 결론 나오지 않는가. 결정하라. 리뷰를 볼 것인지, 돌아갈 것인지.

       
 


     
 
[리뷰] 죄의 천사들, 천사의 숨결은 죄를 구원할 수 있는가

- 충무로 국제 영화제 상영작 2

 

스토리다이제스트 - 죄의 천사들 속으로 들어선 죄없는 천사

독특한 수녀원이 있다. 이곳 수녀들의 상당수는 과거 범죄경력이 있던 이들로, 교도소 출소 후 수녀로서의 새로운 삶을 택해 이곳에 찾아왔다. 절도에서 살인까지 죄목은 각자 다르다. 이들은 출소 후 참사회의 승인을 거쳐 수녀복을 입고 신의 길을 걷는다.

그런 장소에 부족함 없는 집안에서 지낸 아름다운 여인 마리가 찾아온다. 어머니마저 죄인들과 함께 있을 수 없다며 만류하러 오지만 요지부동. 견습 수녀로 시작하는 그녀는 마침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리던 여인 테레즈를 만나게 되고, 그녀를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는다.

그러나 테레즈는 오직 고독한 침묵만을 원할 뿐, 누구에게도 간섭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출소 후엔 연인을 살해한 뒤, 은거를 위해 수도원으로 들어오는데...

 

편견과 온정을 전파하지만 역시나 전근대적 편견이 공존하는, 그러나 결국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던' 작품

작품이 특이하다. 스토리에서 보듯 이 작품은 범죄경력이 있는 자에 대한 편견과 그것을 부정하고 만인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종교적 자애를 전파한다. 그 중심엔 천사같은 마리가 있다. 자신감이 충만하고 자애로움으로 가득찬 그녀. 죄를 지은 경력이 있는 이들조차 어질게 대하는 그녀. 영화의 기본 틀은 이렇듯 사랑과 성스러운 자비로 짜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에도 보는 이의 시각에 있어 거부감을 느끼게 만드는 편견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마리에게 있다.

마리는 도중에 검은 고양이를 경외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작품의 갈등에 있어 이 고양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여기서 관객은 저 천사같은 마리에게서 하나의 (천사로서) 결격사유를 찾는다. 비록 스토리상에 있어 함정에 빠진 것이 사유이긴 하나, 어쨌거나 그녀는 고양이를 악마라 부르고, 고양이를 쓰다듬던 수녀에게서 고양이를 빼앗아 복도에 내쫓아 버린다. 검은 고양이에 대한 편견, 동물 학대 여부는 마리의 성스러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을 순간 당혹케 하는 부분이다.

또 하나는 작품 스토리라인에서 찾아낸 편견인데, 사실 이건 괜한 트집이라 해도 할말은 없다. 아예 처음부터 인정한다. 다만,  이런 말도 역시 충분히 꺼낼 볼 수 있는 생각이기에 한번 내보이고 제 풀에 접는다.

영화는 죄를 지었던 수녀 사이에서 줄곧 순백하게 살던 마리가 '천사같은 수녀'로서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녀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내는 이들, 특히 테레즈는 그녀의 온정을 거만한 허영으로 본다. 바꿔말하면 아무리 수녀가 되어 신을 모신다 해도 주홍글씨는 지워지지 않는다란 그들의 자조다. 천사를 대행하는 수녀지만 죄인이었던 인간, 그래서 영화 제목은 죄의 천사들이다. 그리고 죄없는 천사는 죄의 천사를 자신의 숨결로 구원한다. 희생 말이다. 

물론 전과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한 인식차는 지금도 존재하며 그 낙인은 앞으로도 '전례'라는 점에 있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 모든 것들을 현실로서 담아내고, 그러나 이를 거부하는 주인공을 통해 편견 타파의 메시지를 대신하는 점에 있어선 흠 잡을 이유가 전혀 없다. 편견을 말하고자 이를 설정한 것을 두고 '왜 그랬냐'고 묻는 건 시비거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 하느냐고?

문제는 '죄를 지은 적 없는 선량한 이'가 그렇지 못한 자들 사이에서 특출한 존재로 남아 '천사'가 되는 레퍼토리 자체가 결국엔 전과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한 편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냐 하는 점이다.

물론 마리를 그녀들과 같이 교도소 출감자로 설정했다면 영화 자체가 아예 진행이 되지 않거나 혹은 상당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 터, 이를 두고서 함부로 말 할 수는 없다. 처음부터 마리와 저들의 갈등노선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니까. 괜한 트집이라 인정하는 점도 이 때문. 다만, 본의 아니게 편견에 대한 의혹 하나가 남았다고 할까.

역시나 두번째 것은 괜한 트집인가 보다. 그러니 여기서 기각하고, 첫번째 것, 고양이 건만 놓고 바라보자. 여기서 나는 역시나 '40년대니까 어쩔수 없나'란 생각을 했다. 당시의 시대상과 지금은 분명 다를 테니까.

그러나 이 영화는 결국 마지막 부분에서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어. 난 결국 너가 생각하는 것처럼 편견덩어리가 아니야"라고 밝히게 된다.

고양이 문제는 수녀 사이에서도 '동물을 학대했다'는 주장과 함께 마리를 옥죄어 온다. 그리고 마리 역시도, 종막에선 '고양이를 복도 밖에 내던진 나를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결국, 마리는 불완전한 성녀였음을 인정하지만 그 덕분에 영화는 결국 검은 고양이에 대한 편견 여부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됐다. 그릇된 구시대의 편견을 타파하는 과정에서 또다른 편견 논란을 제기하게 만들었다가, 결국엔 이 모든 것을 그 과정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만드는, 현대적 윤리관념에 매우 깨어있는 영화다.

 

40년대 고전 흑백 영화를 맛보고 싶다면 정통 코스로 추천한다

영화를 즐기는 관점을 스토리 바깥으로 돌려 기술적 면에 맞춰보자. 이 영화는 당시 작품들에서 사용되던 편집방법을 맛 볼 기회를 제공한다. 대표적인 것이 페이드아웃이다. 시간과 장소가 변할 때 이 영화는 영상과 음향이 페이드아웃된다. 지금은 좀처럼 볼 수 없는 편집기술이다. 그 밖에 그 흔한 회상 신 하나 없이 시간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는 점도 재미있다.

60년도 넘은 프랑스 고전을 접할 수 있는 기회다.

하나 더 사견을 달자면, 주연인 마리가 낯설고도 매우 아름다운 고전적 미인이란 점. 마스크 자체가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임을 상징한다. 선하고 아름다운 눈과 한없이 긴 눈꺼풀이 깜박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동요한다. 검색해 봤지만 제대로 된 프로필 조차 남아있지 않을 만큼 지금의 우리들에겐 철저하게 숨겨진 과거의 여우다.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