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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보이 기사(newsboy.kr)/시사

말더듬, 그 비애에 바친다 (아연이 아버지 앞에 부쳐)

말더듬, 그 비애에 바친다 (아연이 아버지 앞에 부쳐)  

 
 
전화통화 중, 갑자기 대화에 장애가 생긴다.

"그런데 기자님... 그그그그그그.... 그그그... 그러니까..."

단 하나 남은 치아로 차마 통제되지 못하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통증이 순간 턱을 마비시킨 것일까. 아니면 이 또한 숨겨진 장애인가.

'7억짜리 희망'이라고 내가 새로 붙여주었던 아연이의 별명. 네티즌들도 이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지난 11월(http://kwon.newsboy.kr/1012), 그리고 어제(http://kwon.newsboy.kr/1305)... 두번에 걸쳐 말이다. 

이들의 비운은, 남들이 당연히 여기는 것을 가지지 못한 것에 있다. 곧장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운명임이 저릴듯 전해져온다.

이미 이들은 운명의 장난에 잃을만큼 잃었다. 세계에서 다섯명만이 앓고 있다는 희귀병, 이들 부녀가 이 중에 포함돼 있다. 너무나 희귀해 유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의사 말을 믿고 아연이를 얻었건만 그 희박한 가능성이 현실로 나왔다. 사진에서 보여지듯 일곱살짜리 아이의 입엔 치아가 없다. 계속해 수술받지 않으면 얼굴이 어긋난다. . 증세가 멈춘 아버지 역시 입을 열어보이면 어금니 하나만 남아 있다. 그래서 어금니 아빠. 치통보다 더한 고통을 평생 달고 살아야 함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것. 치아로 음식을 씹을 수 있는 타인의 능력이 그렇게도 부럽다는 이 씨다. 짊어진 무게는 어떠한가. 아연이의 증세가 멈출 스무살까진 계속될 수술에 필요한 비용이 7억.

다른 이들은 너무도 당연히 여기는 것을 상실해 버린 슬픔.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부족했던가. 또 다른 핸디캡이 남아 있다. 이들 가족의 아픔을 맨먼저 전해 오는 것은 아연이의 저 아픈 얼굴이 아니다. 부녀의 운명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슬픈 얼굴도 아니다. 내 글을 통해 이들을 접한 사람이라면 미처 몰랐을 사실 하나.

마주할 때나, 혹은 전화통화를 할 때나. 아연이보다 앞서 '상실'을 알려오는 것이 아버지 이영학 씨다. 그와 대화하면 상실의 증표가 곧장 전해져 온다. 이영학 씨에겐 또다른 저주가 걸려 있다. '말'을 통해 이뤄지는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그 원초적 권리마저 상실해버린 이 씨다.

     
  
처음 만났을 땐 모른다. 치아가 없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을 구사하기에. 그러나 잠시 후면 그것이 대단한 노력의 결과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그 노력으로도 미처 커버하지 못한 핸디캡의 발생으로 불거진다. 일정 시간 이상 대화를 나누다보면 갑자기 말을 더듬기 시작하는 이 씨. 툭하면 빠져 버린다는 턱이 갑작스레 덜덜 떨리며 여섯번이고, 일곱번이고 같은 부분에서 말이 멈춰 버린다.

'말더듬'. 남녀노소, 동서고금, 빈자와 부자를 불문하고 크나큰 상실감에 빠지도록 하는 그것마저 이 씨에겐 붙어있다. 어찌된 일인지 잃을만큼 잃은 자에게 하늘은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오래도록 대화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나로선 그에 대한 배려다. 그러나 그는 멈출 수가 없다. 알리고픈 이야기가 너무도 많다. 덜그럭거리는 턱으로 행하는 커뮤니케이션. 이는 그의 인생역경을 함축해 보여주는 상징일지도 모른다.

그를 생각하자니 또 한사람. 수년전의 오거돈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기억 위로 떠오른다. 지금은 해양대 총장인가.

잠깐 부산시장 대리를 지내다 차기 시장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 이후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된 그는 언젠가 국회에서 곤욕을 치뤄야 했다. 선천적으로 말더듬 장애가 있던 그는 국감장에서 발표 도중 어려움을 겪었고, 모 의원은 이를 조롱하는 언사로 조소의 대상에 그를 올렸다. 그런데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후폭풍이 일었다. 아마 아직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논란이 이는 도중에, 갑자기 그의 미니홈피가 함께 화제에 올랐다. 몇개월전 장애인의 날을 맞아 "내가 바로 장애인입니다. 말을 더듬습니다"라고 밝혔던 글이 국감장 일과 맞물린 것.

그는 글에서 "말더듬이였지만 군복무를 무사히 마쳤고 아름다운 반려자를 얻었으며, 같은 처지의 여대생에게 '말더듬이도 장관이 될 수 있음에 기뻤다'는 말을 듣게 됐다"고 밝혔었다. 말더듬의 핸디캡을 숨기지 않고 인생의 극복 대상으로 자신있게 밝힌 것에 여론은 감동적 반응을 보였고 반면 국감장 일엔 분노를 표출했다.

갑자기 생각난 김에 그의 미니홈피(http://www.cyworld.com/okbabe)를 방문해 봤다. "말은 더듬어도 양심은 더듬지 않겠습니다"란 인사말이 올라 있다. 자신의 핸디캡을 역이용, 멋지게 트레이드마크로 바꿔 놓았다. 

언어소통을 하는데 있어 타인에 경외시되고, 장애와 상실의 증표처럼 남는 말더듬의 운명은 자기자신을 외부로 드러내는 사회인에 있어 자신감을 갉아먹는 재앙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순간 숨죽일 수 밖에 없는 비애. 그러나 자신의 삶과 신념에 있어 그것이 아무 장애가 되지 않음을 몸소 보여주는 이들이 있다.

오 전 장관은 말더듬 장애가 행복한 삶에 문제되지 않음을 자신의 결과물로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아연이 아버지는 자신이 그간 짊어졌던 것들에 비해 말더듬은 아무것도 아님을 지금도 소리없이 증명해 보이고 있다.

"남들에겐 없는 것이 왜 내게 달려 있는가", "남은 멀쩡한데 왜 나는 이런가"하며 좌절케 하는 것들은 많다. 하나쯤 없는 사람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이 중에서도 말더듬의 비애는 빠뜨릴 수 없는 것. 그러나 운명을 개척함에 있어 그것을 얼마든지 거뜬히 짊어져 보이는 이들 앞에, 그 핸디캡은 존경할 수 밖에 없는 증표로서 달리 보이는 것이었다. 젊은 아버지의 부정 앞에 고개 숙이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다.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