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골목, 달콤한 추억, 그리고 상인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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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명소 중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보수동 책방골목. 부산의 겨울은 포근했지만 여기만큼은 얼어붙어있었다. | ||
"많이 달라져 보이는데..."
책방골목의 중앙공터가 허전하다. 꽤 컸던 아동서적 매장이 사라져 버리고 커피숍이 들어서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쓸쓸한 저녁 - 얼어붙은 골목, 달콤한 추억, 그리고 상인들의 이야기
챕터 1 - 활기잃은 골목
30일 찾은 부산 보수동의 책방골목은 조용했다. 비가 막 그친 저녁이라서일까. 하지만 금요일인데. 방학에도 활기 넘치던 과거의 활기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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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골목의 중추신경인 긴 통로. 지금은 저녁 6시. | ||
책방을 지키며 신문을 보던 초로의 남자는 나를 안경너머로 흘깃보더니 이내 관심이 없는 듯 시선을 거뒀다. 구매의사가 희박한 일본인 관광객이거나 별볼일없는 찍새 정도로 생각했나보다.
빗물에 젖은 바닥 덕에(?) 사진은 기름기가 흐른다. 활보하기 좋게 뻥 뚫린 공간. 마치 촬영 협조라도 구하고 나온 듯 했다. 다만 제일 중요한 사람냄새는 딱 끊겨 버렸다.
챕터 2 - 과거 회상 전편, 반백년 역사의 명소
기억 속 필름을 돌리고자 태엽을 감는다. 대학시절 추억이 스물스물 떠올랐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40계단, 용두산공원 등과 더불어 부산의 명소 중 '올드'에 위치한다. 거닐 때 누리마루나 피프광장 등 신흥 명소와는 또다른 맛이 있다.
대학시절 팀별 영상과제에서 이 골목은 매 학기 단골 메뉴였다. 행여나 중복될까 학생들이나 교수진이나 신경깨나 썼던 걸로 기억한다. 인기요인은 간단하다. 찾아가기 용이했고, 부산의 20세기를 상징하는 데 있어 더할나위 없었던 성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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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전집, 사전, 아동서적... 세상 모든 책들의 무비자 직통 코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중고책의 메카라지만 신제품 또한 대형매장을 통해 공존하는 장소, 이 보수동 책방골목의 역사는 50여년전으로 회자된다. 6.25 때 미군부대에서 나온 중고서적 등이 여기서 순환되며 상권이 조성됐다고. 학구열의 시대를 맞아 온갖 참고서와 학습지, 교과서가 들어찼고 한편엔 정식판 해적판 가릴 것 없이 만화책의 천국이 마련됐다. 일반서점에선 구할 수 없는 '레어아이템'의 습득처기도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에서 다시 푼다.
챕터 3 - 초저녁에 셔터문 내리는 소리
드르륵하고 셔터가 내려진다. 내외로 보이는 두 사람은 입구를 정리하고 나선다. 이제 저녁 6시경. 통로 한 축이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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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 이른 시간에 장삿짐을 묶는 점포가 눈에 띈다. | ||
셔터 닫히는 소리 뒤에 따르는 적막. 파장의 쓸쓸함을 미리 맛보게 한다.
챕터 4 - 줄어드는 책가게들, 중앙 공터의 바람개비
골목을 쭈욱 올라가다 보면 꽤 넓은 공터가 나온다. 아래엔 학습지 전문서점이 있고 가운데엔 아동서적 전문집이 있었다. 매장 중에서도 덩치가 큰 편이었다. 맞은편에도 동업자 내지 경쟁자가 이웃했고 다른 한켠엔 쉬었다 가는 분식집이 있었다.
그래, 과거형이다. 이젠 아동서적 가게가 증발하고 커피숍이 들어섰다. 그 한가지 변화가 크게 다가오며 마치 다른 공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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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아직 건재하다. 여기서 참고서 깨나 사 갔던 기억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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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안 쪽의 아동서적 전문 매장은 커피숍으로 변했다. 골목을 찾은 이들의 쉼터로서 활용되길 바라는 한편으론 사라져버린 가게가 이 골목 불황을 상징하는것 같아 내심 아쉽기도 하다. | ||
고개를 돌려 주거지로 통하는 계단을 올려다보니 어느샌가 책방골목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바람개비가 흔들린다.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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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가 여기저기서 포착된다. | ||
챕터 5 - "2년 전? 그 때하고 지금은 달라요"
공터를 지나 반대편 끝자락을 향해 걸어갔다. 장편만화 중고품을 전집으로 묶어 파는 가게, '청산서점'. 언제나 이곳을 지나칠 때면 한참이나 눈길을 주곤 했다. 가까이 다가갔다가 2년 전 만났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초로의 아주머니한테 사진 촬영을 부탁하자 곧바로 '그러세요'란 허락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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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만화 매니아들에겐 추억의 가게. 절판된 만화책 '마법기사 레이어스' 찾는다고 한참 뒤졌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 ||
"2년전 여기서 유리가면 전권 사들고 갔었는데..."
"아하, 그러셨어요..."
당시 아주머니는 "사모님한테 선물하시려느냐"고 물었었다. 여러모로 신선하고도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은근슬쩍 "장사 잘 되세요?"라 물어봤다. 예상했던대로 "갈 수록 안된다"는 답변이 들어온다.
"2년전... 하고 지금은 또 틀리지. 점점 더 책이 나가질 않아요."
놀러왔던 옆집 가게 여주인도 한마디 거든다.
"요샌 인터넷이다 뭐다 해서 책 사러 오는 사람이 없어. 가면 갈 수록 더 심해져..."
"옆에 집 하나도 커피숍으로 바뀌었더라고요."
"그러니까. 서울 출판사부터 문 닫는 형국이니 우린 말 다했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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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골목 너머가 보수동 책방골목의 반환점. | ||
챕터 6 - 회상 후편, 10여년전 여기는 보물섬, 난 보물찾기 나선 선장이었다
고교시절 때, 여기는 내게 신천지였다. 재밌는 것들이 무진장 많은 호기심의 보고였다. 주말이면 교복을 입고 '쇼핑'에 나섰다. 애니메이션 화보집을 비롯 못 보던 해외서적과 숱한 만화책들이 날 유혹했다. PC통신이 생소하던 그 시절, 일본 애니메이션의 비디오테입 녹화판이나 OST 오디오테입 녹음판을 파는 가게는 신대륙의 보물을 진열한 박물관처럼 여겨졌다. 구입했던 기동전사건담 F-91의 자막판, 슬레이어즈OST의 녹음판은 책상서랍 속 깊숙히 숨겨놓고 살았었다. 물론 2000년을 전후해 비디오나 음반을 모으던 재미는 인터넷 활성과 함께 소멸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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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애니메이션 화보집들은 98, 99년도에도 봤던 물건들. 마리, 레이, 세일러문, 카미유 비단, 카드캡터 체리... 쿠사나기 쿄까지. 모두들 여전히 그 자리를 고스란히 지키고 있었다. | ||
고3시절엔 '노스트라다무스' 구독권을 여기서 끊었고, 수능 전 몇달 동안은 이 곳을 애써 잊고 살았다. 그리고 수능이 끝난 다음날 오전,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와 '축구황제 강슛돌'(원제 캡틴츠바사)의 낱권을 목표로 보물찾기 놀이에 나섰었다.
이 외에도 말 못할 아이템들이 많았다. 롤플레잉 게임에서 아이템 습득을 즐기듯 그렇게 난 이 골목을 즐겨찾았다.
그래서 지금, 가슴 속에 찬 바람이 이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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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인 만화책들. 어떤 이들의 손길과 영혼이 거쳐간 영물들일까. | ||
챕터 7 - "10년전은 정말 활황기였지... IMF 때부터 하강곡선이야"
"여기도 청산서점이예요?"
"아아, 가게가 3개라..."
그나마 이 가게는 건재한 터줏대감인 모양. "책은 찍고 사람은 찍지 마"라며 웃는 주인이 쉬고 있는 이 매장은 영어사전을 한데 쌓아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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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아올려진 사전, 전집, 소설... 중고서점의 전형적인 모습. | ||
"제가 고교생일 땐 여기 참 북적였는데."
"그 때는 정말 달랐지요. 장사 참 잘 됐어. IMF 터지면서부터 무너진거야."
10여년 전의 영화는 이제 기억에서도 점차 가물해질 시기를 맞았다. 책방 상인들의 공통된 바람은 '더도말고 그 때만 같아라'가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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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해진 골목, 그래도 '책방골목 매니아'는 마냥 옛 추억의 잔상을 사진에 담느라 즐겁다. 바람개비가 신나게 돌 때, 또한번 골목엔 신바람이 몰아칠까. | ||
챕터 8 - 남은 '줄기' 골목 답사
골목의 '후문' 내지 반환점의 한 측엔 일부 중고만화서점이 작은 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살펴보니 이 줄기는 완전히 '전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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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년 전만해도 책방이 있던 지점이었으나 이젠 타 서비스 매장 골목으로 변했다. | ||
중앙 공터를 넘어 청산서점이 있는 곳으로 들어서기 전, 윗 측 골목에도 또다른 줄기가 형성돼 있다. 이 부근은 아직 책방골목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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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골목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줄기를 친 '새끼 골목'. 왼 편에 게임샵도 있었던 기억이 난다. | ||
챕터 9 - 돌아오는 길
다행인 점 하나. 보수동 책방골목은 아직까지 전체적인 모양새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십수년의 불황을 잘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무너지는 형국이 조금씩이나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상당수 가게가 사라졌고 골목은 얼어붙은 채 휑하다. 살아있는 명소가 조금씩 박물관 액자 속으로 들어가는 듯해 아쉬운 탄성이 터졌다.
온라인의 창고가 거대해다 못해 비대해진 작금이지만, 이 골목은 오프라인의 창고로서 그 나름의 정취를 잘 간직해 왔다. 디지털 시대에 남은 아날로그의 향수라고 하면 너무 멋부린 표현일까. 그저 매일마다 사람이 문을 열고 닫으며 사람을 맞이하는 이 자리의 온기가 좀 더 그대로 머물 수 있길 기대하며.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