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인터뷰] 김희선 "엄마같은 성우이자 선생님이자 저자로"
[성우인터뷰] 15. 김희선 “꼭 해야겠어? 그럼 해야지! 이젠 내가 너의 길라잡이”
지난 회 주자인 윤미나 성우가 별밤지기 언니라 부르던 그 사람.
지금 이 사진만큼 인터뷰 대상을 한눈에 잘 보여주기도 쉽지 않으리라. 실물은 성우, 거울에 비친 또 하나의 모습은 선생님. 길게 풀어낼 이야기 또한 결국은 이를 위한 것이다.
성우로서는 원조 요정이었다. 공주님이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이젠 엄마 역할을 잘 하고 싶단다.
선생님으로선 수년째 후학 양성에 힘써왔다. 그런데 이젠 그것이 여의치 않은 지방의 지망생들까지 헤아려 본격적인 교습서까지 펴냈다. 이번에 소개할 성우 김희선의 이야기다.
인터뷰 당일. 사실 이 날 약속도 강의 직후의 성우아카데미 내부에서 했다. 덕분에 ‘보이스아카데미 성우학과장 김희선’의 모습을 사전에 엿볼 수 있었다.
“좀 더, 좀 더 감정을 쏟아내 봐. 더! 그렇지! 아직 더 할 수 있어!”
토요일 오후의 교실을 들었다 놨다 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 외치는 제자보다 더 격정적인 스승. 연기자와 스승의 모습이 번갈아 나오는 걸 보며 ‘오늘도 여전하시네’ 하고 생각했다.
잠시 후. 방긋 웃으며 마주했다.
“근택아! 우리 그럼 (인터뷰) 시작해볼까?”
개인적으로도 스승인 분이다. 흔쾌히 인터뷰 수락한 그녀, 종례 후 텅 빈 교실에서 방긋 웃는다. 조금 전까지 강해 보이던 인상은 마술사가 카드 감추듯 사라져 버렸다.
아 참, 미리 밝혀둔다. 글로 옮기다 잠깐 고민한 건데, 대개의 스승과 제자가 그러하듯 그녀는 내게 평소처럼 경어가 아닌 편한 말로 대했다. 이 글에서 따옴표로 전할 그 말들, 그래도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전부 경어로 고칠 것인가, 아니면 본래 그대로 전할까 고심 끝에, 이번만큼은 예외로 필자와 1대1로 대화한 날 것 그대로 기록함을 밝혀둔다.
김희선
1990년 평화방송 1기
1992년 KBS 23기
라크스 클라인 - 기동전사건담시드(애니원)
머플러 - 방가방가햄토리(SBS)
문현아 - 카드캡처체리(SBS)
모코나 - XXX홀릭 (챔프)
묵하람 엄마/포이즈니/서다희 - 두사람은프리큐어 (SBS)
가이아 - 러브히나 (애니원)
로스트유니버스 - 니나 (SBS)
팔백서/백룡 - 환상마전 최유기 (애니원)
슬로스/셰스카 - 강철의연금술사 (챔프)
의사 - 나의인생 나의기타 (KBS 토요영화 프리미어)
2002~09 중,고교 영어듣기평가
한국영상대 겸임교수
SBSA 보이스아카데미(서울방송스피치아카데미) 학과장
KBS아카데미 강의
메인에이 강의
저서 김희선의 성우만들기 (2014)
공동저서 ‘성우’ (2013)
기동전사 건담 시드 中
은하에서 제일 강한 공주님 vs 은하에서 가장 커피 잘 쏟는 여경 vs 기타 등등!
“마음만으로도, 힘만으로도 안 돼요.”
2000년대 최고 화제작 기동전사 건담 시드는 한국 방영 때도 많은 반향을 불렀다. 2004년 처음 방영된 애니원에서는 자막과 더빙이 동시 진행됐고, 보기 드물게 다음해 2005년엔 투니버스로도 옮겨와 방영됐다. (당시 이누야사와 비슷한 케이스) 라이벌 채널인 양 사에서 이렇게 작품이 움직인다는 건 그만큼 대작이었단 반증이다.
무려 건담 시리즈의 히로인이다. 게다가 지구권, 대기권 안팎, 좀 더 넓게 잡으면 은하에서 제일 센 공주님이다. 한국에서 라크스 클라인의 배역은 그녀에게 돌아갔다. ‘남친에게 건담을 선물하는 공주님이었다’고 운을 떼자, “그러게”하고 웃는 성우 김희선. 그녀에게 이 작품과 캐릭터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출연한 작품 모두 다 좋아하고 맡은 캐릭터 다 애정을 가지지만, 라크스는 좀 독특했어. 사실 처음엔 왜 나를 라크스에 캐스팅했지? 하고 궁금했어. 원판 성우의 그 귀여운 목소리(원판 성우는 다나카 리에)하고는 좀 다르니까. 그런데, 마지막 편에서 그 애가 온 우주에 혼신을 다해 외치는 웅변 장면을 녹음하면서, ‘아 이걸 위해 날 부른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그 때 이 애를 좀 더 이해하고, 또 좀 더 사랑하게 됐어. 비록 원작의 귀여움을 좋아라 했던 시청자에게 그것은 못 채워줬겠지만 마음을 담은 울림이라던가 다른 부분에선 나만의 라크스가 나왔다고 생각해.”
‘은하’ 이야기를 하면 또 하나 기억이 난다. 15년 전인 1999년 SBS에서 방영된 은하탐정 케인.(원제 로스트유니버스) 거기서 등장 때마다 남자 상사 바지에다 커피를 쏟아버리던 은하경찰이 그녀였을 줄이야.
강철의 연금술사에서도 범상치 않은 배역을 여럿 맡았다. 무려 엘릭 형제의 어머니였다. 게다가 그 모습을 꼭 닮은 호문클루스이자 난적인 슬로스도 그녀 몫이었다. (인체연성을 하면 모습 뿐 아니라 목소리까지 닮나?) 한 번 읽은 책의 내용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옮겨 적는 최강의 기억력을 가진 군부의 사서 셰스카도 그녀였다.
러브히나에선 주인공 커플의 최대 연적이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못 읽을 엉뚱함의 대가 가이아를 맡았다. 어떤 역할을 맡아도 범은하적으로 범상치 않은 인물들 뿐.
카드캡터체리 中
여러 가지 의미에서 어마어마한 인물 설정이 많기로 유명한 카드캡터체리에서는 문현아 선생님이었다. 체리의 오빠인 고교생 도진이와 연인이었고 이별 후엔 초등학생이 된 제자 에리얼과 맺어진다.
클램프와의 인연은 계속됐다. 서로 뒤섞이기로 유명한 클램프 월드에서 최강 캐릭터로 설정됐고 귀엽기로도 최강인 모코나를 XXX홀릭에서 맡았다. 방가방가햄토리에서는 머플러였으니 이래뵈도 그녀 역시 한 귀여움 한다고.
그러나 내 진짜 전문은 엄마!
그러나 소녀, 귀여운 동물, 성숙한 미녀 같은 모습도 좋지만 정말 편안하고 또 앞으로도 쭉 욕심내고 싶은 배역이 바로 엄마란다.
“내가 젤 어울리는게 엄마지 싶어. 엄마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자상한 친모로. 실제로도 그렇지만 말야. 첫째가 경험이니까. 연기자에게 젤 좋은것이지.”
실제로 알게 모르게 애니메이션에선 그녀가 엄마로 등장한 예가 적지 않다. SBS 라즈베리 타임즈에서는 주인공 엄마를 맡았고 KBS와 챔프로 방영됐던 두사람은프리큐어에서도 묵하람의 엄마였다. “내가 정미숙 선배 엄마였다!”하고 말하는건 그 때문이다.
“지금 자제분이 장성하셨지요?”
“큰아들이 방송연예과인데, ‘내 롤모델은 엄마야’라고 해. 성우 일은 글쎄? 성우보단 스텝 일도 잘 맞지 않을까 싶어. 본인이 좋다면야.”
그리고 엄마의 마음으로 지망인을 위한 책을 내다
지난 4월 그녀는 ‘성우만들기’를 펴냈다. 최초의 성우 교습서인 안소연 성우의 저서 ‘성우 되는 법’ 이래 십수년만에 일이다. 이 책도 엄마의 느낌을 간직하고 펴냈다고 밝혔다.
“우리 때는 성우 학원의 개념이 희박했어. 그리고 지금은 상향평준화가 되어 실력 좋은 지망생들이 많아. 일단 내 책은 기초에 기반했지만 심화단계에 이른 친구들도 배려했어. 이제 시작하는 이부터, 기초자, 입을 떼기 시작한 사람, 상상력을 구현해내는 고급자까지 모두. 아울러 공채 시험 치를 때 팁도 담았고. 심지어 성우가 된 이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썼어.”
“뭔가 책을 써야 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나요?”
“내가 강단에 11년째 서는데, 체계화된 교습서가 부재해. A서 Z까지 다루면 참 좋겠다 싶었지. 그걸 10년째 생각하고 또 준비해 왔던 거야. 빨리 써야 겠구나 한건 작년부터 대학 강의를 나가면서인데, 강의 땐 꼭 교재가 있어야 하거든. 정말 체계적이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의 책을 쓰고 싶진 않은데다, 그나마도 그럴만한 책이 없어. 집필 기간은 1년 내로 마무리했지만 실제로는 한 달 여를 밤 지새우며 거의 한 거 같아. 90년 성우 데뷔 이래 24년간의 노하우를 10년간 집필 준비, 1년의 집필 기간, 한 달의 열정으로 담았달까.”
“그럼 정말 이 책을 보면 성우가 될 수 있는건가요?”
“완전히 독파하고 진실되게 한다면. 결국 성우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직업 아니겠어? 난 적어도 이 책 어느 부분을 펴 놔도 자신해. 학생의 마음으로 썼어. 솔직히 학원을 다닐 수만 있어도 행복한 지망생이야. 그러나 수도권 아닌 지방 사람은 힘들지. 온라인 교습도 제한적이야. 꼭 도움이 되면 좋겠어.”
두 번 씩 성우가 되다
“그럼 어떻게 성우를 목표하신 건가요?”
“열살 때 일이야. 서울시립 소년소녀 합창단 때 노래보다도 목소리가 좋다는 칭찬을 받았어. 그리고 열다섯 살에 별이빛나는밤에 방송을 하게 되었지.”
“지난번 윤미나 성우가 참 예뻤던 언니라고 하던데.”
“맞아 나도 그럴 때가 있었단다. (웃음) 그런데 방송 다음 편성이 라디오 드라마였어. 성우가 내 일이라고 직감했고 다른 건 생각도 안했어.”
“연기자라고 하면 다른 분야도 많을텐데요.”
“얼굴이 나오는 건 수줍어서 싫었어. 성우는 그래도 전철, 버스 타도 되잖아.”
1990년 평화방송에서 성우 공채가 있었다. 합격이었다. 그렇게 해서 성우 데뷔를 하게 됐으니 다시 시험을 치를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1년만에 전속 성우를 프리랜서로 풀어버렸다. 말이 성우지 이 곳에선 교통방송 리포팅에 작가, DJ, 캠페인까지 방송인으로서 전 영역을 요구했다. 분명 이 또한 커리어에 도움은 되었다고 밝힌다. 아침에 교통방송 하러 현장에 가 리포터를 하고 녹음을 한뒤 다음 시간에 또 리포터로 나서고 돌아와서 작가일을 하고 밤엔 DJ를 하고 정신없이 살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불안했다. 정작 연기할 일은 없는 성우라니 불안했다. 무엇보다 큰 건 기약이 없다는 것.
“한 DJ는 방송 끝나고 마무리 멘트만 남겼을 때 갑자기 이런 쪽지를 읽으라고 전달받는거야. ‘아쉽지만 여러분, 오늘이 마지막 방송이네요’라는 이별멘트를. 그렇게 준비도 없이 떠나는 일도 있었어. 그래서 KBS에 다시 입사했어. 모두 다시 시작한거지. 역시나 일은 많았지만 여긴 정말 성우 일이었다? 그리고 결혼하면서 아이도 생기고, 뭐 그렇게 전속 기간동안 많은 일을 겪었어.”
그러나 성우가 되어도 끝난 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민도 늘어간다고.
“프리랜서가 된 후? 부던히 노력하는건 지망생만이 아냐. 전속들도 마찬가지지. 당장 일이 없다 하여 무능한 게 아냐. 단 언제 올지 모를 기회를 늘 생각해야 해. 준비가 되어 있는데 불러주지 않아서 생활고 겪는 성우들이 있어. 하지만 내 의지만으로 캐스팅은 되지 않아. 그러나 가장이 되려면 잘 나가야 하는 직업이지. 물론 그건 성우 뿐 아니라 연극배우도 마찬가지인거 같아. 요새 뮤지컬로 많이 전향하는것도 그런 이유일테지? 연기자는 다들 고민이 많아.”
“지금 선생님은 엄마 역할을 잘하는 성우와 엄마 같은 선생님을 모두 목표하시잖아요? 이 또한 그런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인가요?”
“나의 경우 20대 일찍 성우가 됐지만, 마흔살을 전후해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됐어. 내 삶에 터닝 포인트에 대해 고민한거야. 과연 이 직업은 내 천직이 맞을까, 그리고 마흔이 되면 난 뭘 하지 하고 생각이 많았어. 그런데 그 때, 다른 세상의 연기자를 보며 위안을 얻었어. 뮤지컬 배우가 된 조승우의 지킬앤하이드를 보면서 감동받았고, 원판까지 찾아보게 됐다? 그랬더니 전격z작전으로 유명했던 데이비드 핫셀호프가 원판 주인공이었던 거야. 그의 특별 인터뷰를 보니, 젊을 적 그 작품 성공 이후 그도 텅빈 방황의 때를 겪었어. 그러나 50대 중반이 되어 다시 금의환향했어. 그 비결이 뭘까. 그는 이렇게 말했어. ‘우린 거절 참 많이 당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99.9퍼센트는 거절의 연속이요 0.01퍼센트의 확률을 위해 산다. 그러나 99.9퍼센트의 거절은 오직 당신만을 향한 거절은 아닐터, 항상 당신 자신을 믿어라’라고. 나도 마흔에 다시 대학에 들어갔어. 그간 성우로서 사랑을 받아왔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그리고 40대가 된 지금 다음 목표는 좋은 선생님으로 정했어.”
그렇다면, 성우로 인생의 턴을 하려는 이들에게 그녀,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 걸까.
“너무 늦지만 않게 찾아와주면 좋겠다고 전해주면 좋겠어. 마흔을 넘기고 도전하는건 쉬운 일이 아니지. 이 학원에만 해도 나보다 나이많은 언니 수강생이 있어. 48세, 52세인 분들. 둘 다 대학교수 혹은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및 작곡가지만 한때 꿈이었던 성우를 잊지 못해 다시 오더라고. 그 때 두고 갔던 미련은 다시 사람을 이리 데려오는 거야. 그런가 하면 요즘 30대는 괜찮아. 20대가 30대 이상 연륜을 보여주는건 쉽지 않아. 그러니 나이와 연륜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어. 어리면 나이가 장점이지만 나이를 먹어도 대신 연륜으로 보상을 받는 것이야.”
그리고 이 말도 함께 전했다.
“누군가 성우가 내 길이냐고 묻길래, 꼭 성우여야 하는지 딴 일은 안되는지 물었어. 그랬더니 안 된대. 그럼 해야지. 답이란 다름 아닌 자신에게 물어서 답을 얻어야 해.”
24년의 성우생활, 연기가 즐거울 때는?
시간 앞에서 인간은 점차 변해 간다. 미인의 아름다움도 나이를 먹으며 점차 열화되어 간다. 나이 앞에 기력도, 열정도 노쇠해지는 법이다. 그러나 군대에 간 남대생을 아들로 둔 여대생같은 엄마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엄마 역 많이 하고 싶다지만 실상은 햄스터가 애착 가는 분신 1,2호를 다투는데.
“주변서 주희 선배님(소머즈, 요술공주 밍키) 목소리 닮았다는 소리 들어서 의아했었어. 그런 귀여운 소리를 내가? 그런데 햄토리의 머플러를 6년이나 했지 뭐야. 가장 애착가는 캐릭터 중 하나야.”
그래도 가장 재밌는건 라디오 연기란다.
“살아있잖아.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도 많아. 진심으로 내 창조된 연기가 가능해. 애니더빙에선 그게 쉽지 않아.”
“애니메이션에선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 없었나요?”
“아! 있어. ‘루미코의 극장’(애니원 2004년) 중 한 편에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애니메이션 작품으로선 특이하게도 즐거움을 느꼈어. 그리고 라크스도 마지막 그 장면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고.”
앞으로는 푸근한 엄마의 모습으로 자주 찾아올 것 같다. 그러나 다시 귀여운 동물이나 공주님으로 역습해 올지 모르니 방심은 금물. 여전히 엄마 여왕님보단 막내딸 공주님이 어울릴 성우 김희선이다. 실제로 수업을 펼칠 때도 여왕님의 수업이라기보단 어느 나라 공주님께서 친히 찾아와 코치해 주는 것 같은 선생님이니까.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