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 다이어리

[성우인터뷰] 여민정 "열정은 쏟고 힘은 뺀다"

권근택 2013. 4. 1. 09:00

[성우인터뷰] 10. 여민정 "살아갈 땐 열정을 쏟아내고, 연기할 땐 힘을 뺀다"

 

 

 

 

"성우가 되지 못하더라도 행복하게 살았을거라 생각해요. 다만, 성우가 될 수 있었기에 좀 더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누가 빛이고 누가 그림자인가. 그림 한 장 뒤에서 목소리로 만나 온 활달한 소녀와 현실에서 마주한 정중동의 여인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

 

그게 성우다.

 

그녀는 성우의 그런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연재 10회를 맞아 성우 여민정을 만난다.

 

 

 

 

여민정

2000년 투니버스 4기 입사

 

데뷔 - 선계전 봉신연의 (투니버스)

 

대표작

엠마 - 영국사랑이야기 엠마 (투니버스)

구우 - 정글은언제나흐린뒤맑음 (투니버스)

나라 - 아즈망가대왕 (투니버스)

사쿠라 - 나루토 (투니버스)

아리엘 헨슨 박사, 라사라 등 - 스타크래프트2 자유의날개, 군단의심장 (블리자드 게임 캠페인)

철수 - 짱구는못말려 시리즈 (투니버스)

타이가 - 토라도라 (애니맥스)

쿠루미 - 너에게 닿기를 (투니버스) 

아키라 - 러키스타 (챔프)

아름이, 범인 - 명탐정코난 (투니버스)

 

 

 

 

바로 앞에 만난 홍범기 성우는 "평소 이미지에 따라 배역이 돌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따라서, 평소 만나던 작품 속의 분신이 현실에 튀어나온 듯 반가울 때가 있다. 그가 그랬고, 최승훈 성우도 그랬다.

성우 여민정도 그럴까. 유심히 살펴봤다. 그리고 평소 그녀의 목소리로 접한 캐릭터를 떠올려봤다.

 

 

 

출처 다음 영화 아즈망가대왕 게시판

 

 

역시 많은 사람은 나라부터 떠올리려나. 투니버스 방영 당시 로컬라이징이 걱정스러웠지만 기대 이상으로 잘 된 평을 들었던 작품이었고 대체적으로 한국성우들의 연기도 호평이었다. 여기서 천재소녀인 주인공 나라(치요)를 그녀가 맡았다. 이 밖에 정글은 언제나 맑은 뒤 흐림의 구우도 있다. 이처럼 귀엽고 어린 소녀가 대표작이기에 그녀의 이미지 또한 그렇게 그려지곤 한다. 실제로 지금껏 공개되어 온 그녀의 모습도 그랬다.

 

그러나.

 

 

 

 

 

고뇌하고. 또 말없이 들어주고.

 

전혀 다른 이미지가 아니던가. 어시스턴트는 "김희애 같다"고도 했다. 정적이고, 우수에 젖은 듯한 모습. 분위기가 뭐랄까 '촉촉한 어둠'을 담고 있다고 해야 하나. 써 놓고 보니 희한하게 표현이 귀엽다. 일전에 남자셋여자셋이 공전의 인기를 구가할 때 이의정을 인터뷰한 신문기자가 서두에다 "이미지와 너무도 다른 차분함"이라고 소개했는데 지금 내 말이. 머리 쓰다듬어 주고픈 나라는 간데 없고 곧은 기품의 마님이 앞에 계시는 듯 하다. 만일 타이나 스카프를 하고 갔다면 분명 마주하다 몇번이고 고쳐맸을 거다.

 

 

 

 

대표작을 먼저 쭈욱 나열해 봤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알린 작품이 정글은 언제나 맑음 뒤 흐림과 아즈망가 대왕이었다고 밝힌다. 두 작품에서 보여지는 캐릭터 구우와 나라가 둘 다 귀엽긴 하지만 실상 성격은 정반대였기에 그 대조됨이 시청자들에게 인상적으로 남았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작품들은 다시 기억을 되돌려보면 뭔가 아쉬움이 묻어나는데 비해 그 둘은 의미있고 사랑스럽다는 기분부터 들어요."

 

입사한 것이 딱 2000년. 21세기의 첫 해가 지금 돌이켜 보면 벌써 13년 전이다. 햇수로는 이미 14년차의 성우다. 지망생 시절엔 성우가 반드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한다. 그러나 정작 시험을 앞둔 그 해 3월엔 "꼭 성우가 아니라도 행복한 인생은 맞이할 거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사실 KBS 문화센터에서 지망생으로 준비할 때도 직장생활 하느라 꼭 한시간씩 지각했었다고 고백한다.

 

"맘을 그렇게 편안하게 내려놓으니 합격했어요. 1년반 준비하고 붙은거죠."

 

순수가 행운을 불러왔다는 건가. "백지상태라 그림이 그려진 듯 하다"는 성우 여민정은 "그러나 막상 그렇게 되고 나니 동기 언니들이 부럽더라'고도 말한다. 동기 중엔 한채언, 김선혜, 정선혜 등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성우가 많은데, "이미 준비된 실력자들이라 호흡이나 나레이션이나 할 거 없이 뛰어났었다"고 말한다.   

 

"때문에 전속생활 시작한 직후엔 일이 없었어요. 어떤 달엔 녹음이 없어 딱 4만원 받았던 적도 있었죠. 당시 이나중 탁구부나, 괴짜 가족 같이 정말 끼고 싶던 재밌는 작품엔 발들이지 못했어요. 그런 점에선 동기들에 비해 출발이 좀 늦은 편이에요."

 

만약 정말로 그 때 성우가 되지 못했어도 지금의 또다른 여민정은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까. 그녀는 "안되었어도 의미있게는 살지 않았을까 한다"고 말한다.

 

"그래도 하고 싶은일을 하고 있어 지금 이 삶이 조금은 더 행복한 게 아닐까 해요." 

 

 

 

 

인터뷰 수락을 받고도 한참 기다려 만날 수 있었던 그녀다. 요즘 일이 겹쳐 정신없이 달렸다고. 근황을 물었다. 요즘은 예전에 한 작품을 다시 녹음하거나 새 시즌 녹음이 많았다. 투니버스에선 나루토의 새 시즌이 있었고, 애니맥스에서는 명탐정코난을 다시 첫 시즌부터 새로 녹음해 방영하고 있다. KBS에서 테이프를 끊었던 코난의 1시즌을 현재의 투니 성우진이 다시 덧입혀 방영 중이다. 게다가 메탈베이블레이드 신작도 나왔다. 다른 캐릭터는 7년후 변성기가 찾아와 성우진이 대폭 바뀌었으나, 그녀가 맡은 제시카는 소녀 캐릭터였기에 어른 여자가 된 지금도 '다행히' 맡게 됐다고 밝힌다. 

 

카툰네트워크에서 방영하는 로봇과 몬스터에서는 등장 여자 캐릭터 6~7명을 모두 본인이 맡아 하고 있다. EBS 피터팬에서는 팅커벨로 열연 중이다.

 

"몇년간 지속되는 장편 캐릭터를 다시 녹음하잖아요? 극중에서도 세월이 지나 뭔가 달라지고 성숙해진 모습을 해내야 해요. 지금도 그렇게 캐릭터 새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너무 재밌어요."

 

이렇듯 다작을 겹쳐서 해도 지난 작품들 다 기억한다는 여민정. 그러나 너무 일이 많아서인지 기억 못하는 작품도 있더라.

 

"이번 군단의 심장에서 라사라 하셨잖아요."

 

"아뇨. 그거 나 아닌데."

 

"아 루머인가요. 1편인 자유의날개에선 아리엘 헨슨을 하신걸로 아는데 이번 작은 헛소문이었나."

 

"아. 아니요. 맞아요 했어요. 스타크래프트2 2편도 제가 했어요. 지난해 선녹음한거라 깜빡 했네요."

 

 

 

 

혹시 데뷔작은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하고 있었다. 누구나 입봉작은 다 기억한다는 예전 주자들과 마찬가지로 정말 입문작의 기억은 강렬한가 보다.

 

"선계전 봉신연의였죠. 가씨 라는 캐릭터를 했어요. 뱃 속에 아이를 품고 있는데 그 아이가 나중에 커서 중요 배역이 되죠."

 

"엄마 역을 하신 거군요. 그런데 당시 미혼 아녔어요? 첫 배역부터 너무 어렵진 않았는지."

 

"시리즈 중 한 두 편 정도 나왔어요. 동기로 입사한 한채언 언니랑 같이 밤새워서 준비한 기억이 나요."

경관2의 최승훈, 소년1의 김현지... 누구 하나 할 거 없이 입문작은 밤을 새우고 준비하나 보다. 지금 보면 짧은 역할임에도 신인 때는 누구나 그렇게 준비하나 보다. 만족스러웠을까.

 

"작년에 알았어요. 안녕 자두야의 쫑파티가 있었는데 당시 봉신연의 연출가였던 신동식 프로듀서가 밝히더라고요. 녹음 끝나고 돌아가려는데 웬 신인 하나가 달려와서는 '저 정말 잘했죠?'라고 방방 뛰더라고. 대개는 '저 너무 못했죠?'라고 물어온다는데 너 같은 애는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걸 전혀 기억을 못해요. 까르르. 사람들은 그걸 근자감이라고 하죠." 

 

그럼 성우 여민정의 14년 성우 인생 중 가장 아끼는 배역은 무엇일까. "어려운 질문이나 굳이 하나 꼽으라면 '록리의 청춘닌자전'까지 이어지는 나루토 시리즈의 사쿠라"라고 했다.

 

 

 

출처 투니랜드 나루토 게시판

 

 

나루토는 2005년부터 투니버스에서 방영되며 현재까지 TV판, 극장판 할 거없이 이어지는 장수작이다. 8년째 더빙 중이라는 말이다. 작 중에서도 세월이 지나 소녀였던 사쿠라는 어느덧 숙녀가 됐다. 여민정 성우는 "그 세월동안 사쿠라와 함께 성우 여민정도 성장해 왔다"고 애착 가는 작품이자 캐릭터임을 밝힌다.

 

"전속 풀리고 지금껏 계속하고 있는 사쿠라와 함께 오늘날의 성우 여민정도 있을 수 있었습니다. 2% 부족한 애가 성장해 갈 때 여민정도 성장했습니다. 나루토였던 이선주 선배님, 사스케였던 김영선 선배님(이상 MBC)도 모두 고맙습니다. 두 분의 열정적인 에너지를 받아 여민정이 자랐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장 존경하는 성우를 꼽아달라는 말에 두 사람 중 한 사람으로 나루토였던 이선주 성우를 꼽는다. 지난 세월 나루토를 통해 보여준 그 열정에 놀랐고, 녹음 후에도 후배들 연기를 코칭해 주거나 녹음 때 30년차 선배의 기에 눌릴 수 밖에 없는 상대 젊은 후배들을 배려해주는 기법이 존경스러웠다고. 소년 연기에 욕심이 많은 여성 성우의 개인적 목표로서도 남자성우보다 소년 연기가 뛰어나다고 평가 받는 경지를 동경한다고 했다.     

 

또 한사람, 꼭 밝히고픈 선배님은 투니버스에 있단다. 그러나 잠시 고민 후 "이 자리에선 밝히지 않겠다"고 웃었다. 그저, 나 혼자만이 짐작하고 있을 뿐.  

 

나루토와 사쿠라가 그녀 연기인생에 깊게 뿌리잡아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글쓴이가 꼽는 그녀의 명작은 따로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엠마를 좋아해요."

 

 

 

출처 다음 검색 영화 엠마 영국사랑이야기

 

 

아니나다를까 여민정 성우 본인도 이 작품을 자신의 연기를 성장시킨 또 하나의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팬들은 다른 대표작들에 비해 다소 네임벨류가 떨어진다고 할 지 모르지만, 아는 사람들은 대체로 호평하는 작품이다. 작품성에서도, 성우들의 연기에서도. 이 작품의 주인공 엠마는 원판에선 일본의 1류 성우 토마 유미(건담 포뮬러나인티원의 세실리 페어차일드로 유명)가 담당했는데 한국에서는 그녀에게 맡겨졌다.

 

전편의 홍범기 성우는 허니와클로버를, 그 전에 만난 이현진 성우는 몬스터의 니나를 좋은 작품이자 정말 어려운 연기였다고 꼽았는데 이는 애니메이션이지만 그림에서 표정 변화가 그리 크지 않고 섬세하게 내면연기를 터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엠마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녀도 이 작품을 좋은 작품인 동시에 난이도가 높았다고 밝힌다.  

 

"전 시즌 2 5화에서 자신을 찾아온 윌리엄(표영재 분- MBC)에게 '안돼요'라 안기며 호흡하던 엠마의 연기가 너무 좋았어요. 애니메이션도 라디오 드라마도 그 경계를 다 허문 연기였달까."

 

"네. 실은 최근 어떻게 지인한테서 엠마 이야기가 나와서 다시 보게 됐는데, 지금봐도 좋더라고요. 그 때 제가 30대 초반이었는데 당시 여느 작품보다 더 신경쓰였어요. 섬세한 연기가 필요했으니까. 러브신 등 정적 연기가 참 힘들구나 깨닫고 공부도 많이 됐었죠. 호흡, 연기법 두루 모든 방면에서요."

 

 

 

 

그녀는 함께 호흡을 맞췄던 표영재 성우에게도 감사를 표했다고 말한다.

 

"표 선배도 마주하는 연기 때 제 배려를 정말 잘 해줬죠. 그래서 엠마가 끝날 때 '선배랑 함께 해 영광이다'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그 외에도 최문자 선배님(KBS-2008 KBS성우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 등 수많은 베테랑 선배님들이 나왔던 작품인데 그 진가를 보며 배울 수 있었어요. 사실 이번에 피터팬으로 처음 상대역을 하는 용우(신용우)도 그 작품의 시즌1 때 무척 끼고 싶어했었죠. 결국 2기 때는 비중 있는 역으로 등장해 저의 엠마와 여러 호흡을 했어요."

 

"혹시 그 작품 사전에 연구를 하셨나요?"

 

"원작 만화를 봤어요. 그런데 문제는 당시 원작도 결말이 나지 않은 상태라 엠마와 윌리엄이 해피엔딩을 맞을지 어떨지는 저도 모르고 있었죠. 그 땐 시즌2의 존재도 몰랐어요. 기억이 남는 건 녹음 당시 마음 여린 후배들은 뒤에서 울기까지 하더군요." 

 

이 말고도 몇 작품 이야기를 더 했다. 너에게 닿기를 해서 쿠루미를 할 때는 스트레스 좀 받았다고 한다. "녹음 때 내 딴에는 순간 연기를 놓친거 아냐? 걱정스러운데 주변에서는 할 때마다 다 좋다고만 해서 걱정스러웠다"고.

명탐정 코난에 투입된 초반 아름이 외에도 범인 역을 주로 맡아 '남자면 이주창, 여자면 여민정'이라고 시청자가 짐작해 버리던 일화를 소개한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이거 두고 항의가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피디님이 이제 너 범인 안 시킨다고 하며 그렇게 제 범인 시리즈는 끝이 났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그게 너무 좋았거든요."

 

설마 사람 죽이는게? 그건 아닐 거고.

 

"어른 역할을 할 수 있어서요. 그 때만해도 '여민정표' 캐릭터라 하면 아역만 떠올릴 정도니까."

 

그러고 보니 짱구는 못말려에서 철수, 짱아를 맡는 등 영유아 전문으로 기억되고 있지. 특히 짱아는 그녀가 1대 성우 최향윤, 2대 소연에 이어 3대째 맡고 있는데 정말 아기 목소리 같다는 찬사가 후배 성우를 통해서도 들려올 정도다.

 

 

 

 

"결국 여민정표 연기란 무얼까요."   

 

"후배들이 캐릭터를 보면 아 이건 선배님거구나 그런대요. 그런데 이젠 나도 나이가 있어서..."

 

앞으로 그녀가 욕심 내고 싶은 배역은 남아, 그리고 악역이다. 특히 악역을 많이 해 보고 싶다고 말한다. 요새 로봇과 몬스터에서 악역을 많이 맡는데 그게 너무 재밌다고 했다. 아울러 평소엔 잘 안들어오던 50,60대 아줌마 역할도 재미있다고.  

 

"그런데 엄마 역할도 좀 하시지 않았나요? 정작 데뷔작도 엄마 역할이었고."

 

"미소의 세상에서도 엄마 역할이었죠. 맞아요."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점을 찾았다. 딱히 상대역할로 자주 마주치는 특정 성우는 없었다던 그녀, 지금 생각해보니 굳이 멜로연기에서 찾는다면 정재헌 성우가 있었네. 토라도라에서는 연인이 됐고 너에게닿기를에서는 여주인공의 연적으로서 빼앗으려다 실패했고, 러키스타에서는 정말 악랄하게도 괴롭혔었다. 그 말고는 딱히 가리지 않고 여러 남자 성우들과 공연해 즐거웠다고 하는데, 반면 같은 여자로서는 양정화 성우랑 묘하게 엮인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미소의 세상에선 제가 엄마였고 양정화 선배가 딸이었는데, 안녕 자두야에선 제가 딸이고 정화 선배가 엄마예요. 게다가 토라도라에서는 시어머니가 되시는군요. 양정화 선배가 정말 엄마 역을 잘 살려줬어요."

 

"자두는 상당히 깨는 애였는데 이미지 캐스팅이었나요?"

 

"아뇨 오디션이었는데 고맙게도 작가님이 제 목소리를 듣고선 '딱 내가 그리던 목소리'라고 했었죠."

 

참고로 미소 때 남편인 아빠는 명탐정코난 때 공동 범인 전담이던 선배 이주창 성우였고 토라도라에선 정재헌 성우를 매개체로 선배 양정화 성우랑 고부 관계를 맺는다. 이것도 재밌다. 

 

 

 

 

그럼 그녀는 왜 악역에 목말라하는가. 가만 들어보니 그건 자신이 잘 못하는 일이기에 자극받아서, 안 해본 일이라 잘하고 싶어서, 결국 너무 진취적이라서다. 승부욕이라 할 수 있다.

 

"언젠가 서영이(김서영 -MBC)가 투니버스에서 주연한 작품에서 아주 얄미운 학교 친구로 악녀 역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잘 안되어 속상했지요."

 

남아에 욕심을 내는 것도 같은 이유다. "철수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런 어린 남아 말고 진짜 남자다운 소년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배역이 오질 않았다.

 

"고스트바둑왕에서 와이야라는 남아를 드디어 맡았어요. 생긴것도 잘 생겼고 하고 싶던 남아 배역을 드디어 따냈어요. 그런데 내 딴엔 잘했다 싶었거늘, 피디님이 절 따로 부르더라고요. '민정아, 너 하리수같애'라고. '너 전속 때 내가 이런 거 더 줬어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노력했어요. 다음 녹음을 앞두고 남편한테 들어달라고 했어요. 성악한 사람이라서 모니터링을 부탁했죠. 자면 깨워서 들으라고 했어요. 생각해보면 난 절대 재능있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렇게 열정으로 커버했어야죠."

 

"자는데 깨웠거늘 다 해 주시다니 부군도 대단하시네요."

 

"신혼이었으니까요. 이젠 안 해 줄걸요. 밤새 연습하고 다음날 녹음 때 특훈의 성과를 보였더니 그 피디님 놀라시더군요. 어떻게 해서 이렇게 짧은 사이 달라졌냐고. 물론 성에 찰 정도까지는 아니지만요." 

 

그런 도전정신 때문에 한 때는 탤런트에 도전할 뻔도 했다. 언젠가 모든 게 무료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때 마침 염정아의 로얄패밀리를 보고선 그녀 연기에 꽂혀 며칠간 전편을 다 몰아봤단다. 나도 저렇게 열정적으로 연기해 보고 싶다는 욕심에 연기스쿨에라도 들어가 중년 탤런트로 활동해볼까 싶어 선배 강수진 성우에게 털어놨다고. 그랬더니 그의 대답이 글쎄.

 

"'야 거기 가면 네가 교수보다 나이 더 많을걸?'이러시는거예요. 그렇지만 '네가 체계적인 이론은 정립이 안 되어 있더라도 진정 뜻한다면 가능할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결국 어떻게 됐어요?"

 

"희한하게 그 순간 더빙일이 갑작스레 늘더라고요. 쌓여있던 에너지를 거기다 다 쏟아버렸어요. 그리고 후련해졌어요. 성우라는 직업이, 아니 어쩜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 무료하고 지리할 때는 자극과 동기유발이 바닥을 치고 올라가는 계기가 됩니다."

 

이후에도 그녀는 신데렐라 언니에서 문근영의 연기에 반해 대본을 다 찾아서 연기해 봤다고 한다. 어쩜 대사 전달력에 있어 성우보다 더 나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고. 그녀는 뭔가 대단한 사람, 자신에게 부족한 뭔가를 훌륭히 가진 이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겨뤄보고 싶은 승부근성을 주체할 수 없나 보다. 

 

그런 그녀, 성우 여민정의 열정을 해소할 수 있는 건 결국 애니메이션이다. 분출하고 싶을만큼 쌓였을때 잡히는 작품이 있다면 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연기자란, 성우란 자극이 필요하며 내가 정체됐다 싶다면 잘된 작품을 찾아보는게 좋다고 말한다. 성우보다 낫다고 느끼는 배우를 보면 그 땐 달리고 있을 거라고 말한다.

 

 

 

 

지난 14년간 성우 여민정의 연기인생 중 위기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난 일전에 팔에 깁스를 하고 방송을 타던 것을 기억해 냈다.

 

"보드 타다가. (웃음)"

 

"그 말고도 명탐정 코난 때 아름이 배역이 잠시 바뀐 걸 봤었어요. 출산 때문이셨죠?"

 

"둘째 아이때였죠. 그래서 후배 박리나 성우가 그 시즌 때만 맡았는데 투니버스의 기조가 이럴 경우 원래 성우의 사정이 해결되면 다시 원상복귀하는 것이라 다음 기 부턴 다시 복귀하게 됐어요."

 

그러나 정작 큰 일이었던 건 첫째 아이를 출산한 직후 건강상태가 나빠졌을 때였다.

 

"성대결절, 후두염, 인후염 등이 한번에 걸려서 힘든 적 있었어요. 성우가 목쓰는 일을 못하다니, 그 공포감은 컸어요. 게다가 내 주 종목은 목을 쪼이는 소리였는데. 혹시나 다신 이 일을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죠."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두 아이는 모두 복덩이였다. 아이를 낳은 바로 그 날 "꼭 좀 맡아달라"고 캐스팅 섭외 전화가 오기도 했다고. 출산 후에는 일이 더 많아지곤 했단다. 때문에 누가 "셋째도 낳을거냐"고 물어오기도 한다는데 "이젠 끝입니다"라고 단언했다고.

 

그 외에 어렵거나 재밌던 일은 또 없었을까. 전속 당시 사진 공포증이 생겼다고 말한다. 바둑 TV 등에서 인터뷰 기회가 많았는데 순간 방송을 탄 내 얼굴 보고 경직되고 말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코스튬플레이도 하셨었잖아요? 엠마 때는 메이드복도 입으시고 커버 모델이 됐었는데."

 

"그거요? 맨 정신이라면 할 일이 못 됐는데. 푸후후. 그거 처음 부탁받은게 운전 중에 받은 전화를 통해서였어요. 나 도무지 못하겠다고 했는데 워낙에 간청을 해 와서, 고민하다가 그러라고 했지요. 헌데 도저히 안 되겠는거예요. 그래서 전화 걸어선 못하겠다고 다시 번복을 했죠. 그랬더니 이미 주문 제작 들어갔다고... 그래서 에라, 조금이라도 젊을 때 그런 옷 입어보는 거지, 나중엔 입고 싶어도 못 입겠지 하고 체념했지요."

 

 

 

 

그녀에겐 8살, 5살난 남매가 있다. 혹여 나중에 아이가 엄마 따라 성우를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솔직히 한번은 말리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지금은 성우 일이 점차 어려워지고만 있으니까요. 성우가 할 일이 줄어들고, 이렇게 타개책 없이 진행된다면 미래는 더 어둡지 않을까 해요. 그걸 겪다 보니 같은 고생을 권하고 싶지는 않아요. 적어도 뭔가 앞으로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래도 하고 싶다고 한다면?"

 

"평소 제 남편이 자주 하는 말인데, '날 뛰어넘을 수 있다면 하라'고 할거예요. 엄마인 성우 여민정을 뛰어넘겠다면 그 땐 허락하겠죠."

 

찻잔이 비었다. 이젠 작별할 때다. 마지막으로 성우 지망생들에게 해 줄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누굴 가르칠 여력은 없고 연기 자체로서 뭔가 제시해 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그녀는 이미 자신의 아이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다고 할만큼 성우계가 어렵다는 현실을 알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성우가 되고픈 사람은 많다. 어쩜 조만간 새로 입사한 후배가 "난 당신을 좋아해 성우가 됐다"고 밝혀올 지도 모른다고 했더니 웃는다.

 

"연기를 할 때면 힘을 빼는게 중요해요. 전속이나 프리 1년차를 보면 너무 잘하려다 보니 힘이 들어가요. 이제 보니까 힘을 빼면 훨씬 수월해져요. 이건 성우가 아닌 다른 일도 마찬가지예요. 인생에서 내 길이 오직 이거라고 힘을 빡 죽 있을 때, 가끔은 물러서 3자의 시선으로 날 보는 작업이 필요한거 같아요. 실제로 저도 그 순간 성우를 이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도 운이 좋았지요. 만약 그 때 되지 못했다면 이후에도 이루지 못했을거 같아요. 놓고나니 편하더라고요."

 

스물 다섯에 성우가 된 그녀는 어느덧 서른아홉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성우로서, 두 아이의 엄마로서, 그리고 뭔가 도전할 목표가 있으면 반드시 해 봐야 하는 승부사로서 아직도 이룰 것들이 많다. "인생에서 이게 다는 아니니까, 이젠 세상에 시선이 간다"고 "앞으로도 해보고 싶은게 많다"고 밝히는 그녀다.

 

"저마다 보이는게 틀릴 거예요. 성우는 분명 힘든 일이죠. 되기도 어렵지만 되서는 더 힘들어요. 10명이 들어와서는 나중에 돌아보니 한두명만 살아있더라는 옛말처럼 살아남은 우리도 언젠간 그런 날, 정년을 맞는 날이 올 거 같아요. 그런데 말예요, 그래도 그 때까진 도전할 것들이 많아요."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 /어시스턴트 권오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