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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인터뷰] '거울같은 여자' 김현지 "꿈 꾼다면 과정부터 즐겨요"

권근택 2012. 10. 20. 11:09

[성우인터뷰] 7. 김현지 "그런 말 말아, 꿈을 이루고 있잖아요"

 

 

 

 

 

# 김현지 성우님의 쾌유를 빌며 -

 

 

"지망생들에게 늘 들려주는 말이 있어요. 이 순간을 즐기라고."

 

신비한 소녀같다. 순수한 처녀일까, 그것도 아니면 순수를 위장한 실은 매혹적인 마녀일지도 몰라. 고양이를 닮은 그 눈동자와 마주하면 순간 쉽사리 속내를 넘겨짚을 수 없게 돼.

 

그래서 타이틀을 뽑을 때 잠시 고민했다. 1안은 늘 그래왔듯 인터뷰어의 한마디를 인용하는 것, 2안은 내가 느낀 그 첫인상의 강렬함을 소개하는 것. 그래서 결과가 이거다. 결국 둘 다 손에서 놓지 못해 제목란과 본문 중 제목이 조금 달라졌다.

 

고백하자면 나도 지망생이다. 어릴적부터 소망했고 서울시민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꿈을 이루면 한번쯤 프리랜서 기자가 되어보고 싶었던 건데, 실상은 거꾸로 뒤집혀 있다. 상을 뒤바꾸는 거울처럼. 그걸 다시 뒤집는 것이 젊음이 가시기 전 내가 할 필생의 과제다.

 

그런 내 눈에 그녀는 거울같다. 그래, 초라한 나를 눈부시게 비추는 은빛의 거울.

 

미러같은 여자, 투니버스 6기 성우 김현지가 일곱번째 인터뷰 초대에 응해주었다. 4악장에 걸친 선율은 곧 그녀의 목소리다.

 

 

 

 

김현지

2006년 투니버스 6기 입사

 

데뷔작 2006년 투니버스 몬스터 - 소년 역

 

대표작

꿈빛파티시엘 - 감딸기 (투니버스)

케이온 - 아즈사 (애니맥스)

치즈스위트홈 - 치 (투니버스)

펭귄의 문제 - 펭귄 (투니버스)

극장 애니메이션 파닥파닥 - 고등어

토라도라 - 미노리 (애니맥스)

페어리테일 - 윈디 (애니박스)

캐릭캐릭체인지 - 아미 (투니버스)

 

 

 

 

 

 

# 1악장, 소녀 - 첫사랑의 고백 위해 첫 녹음한 여고생, 조금은 슬픈 출발점이 곧 운명점

 

"어떻게 해서 처음 성우란 세계와 조우하게 됐죠?"

 

뭔가 드라마틱한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그 형상은 큐트하지 않을까 했다. 기대와 얼추 비슷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사실 성우라는 직업 자체를 인지한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기자님처럼 어릴적부터 그랬다던가 한건 아녜요."

 

정작 성우를 지망하게 된 동기나 이러한 것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악장에서 듣기로 하자. 조금 달리, 그녀가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를 녹음해 스스로 들어본 경험부터 소개한다.

 

"고등학생 때였어요. 마음에 담았던 오빠가 있었거든요. 그 또래 여자애들처럼 저도 두근하고 그랬어요. 마음을 고백하고자 제 목소리를 직접 담아서 전하자는 용기를 냈지요."

 

우연찮게도 그녀는 훗날 자신이 하게 될 일을 그렇게 처음 맛 보게 된다. 한번도 하지 않았던 경험.

난 너무도 확실히 공감하고 말았다. 그건 해 본 적 없는 사람에겐 이해 못 할 것이다. 막상 자기 목소리를 듣게 되면 얼마나 낮뜨거운지 모른다. 물론, 그 때 소녀는 그런 것을 예상할 겨를도 없이 심호흡 한 번 하고 용기있게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재생 버튼은 심호흡 두번을 요했다.

 

"처음 듣는 소리였죠. 이게 내 목소리야? 했어요. 너무 부끄러웠죠. 처음으로 현실을 안거예요."

 

"어떻게 했죠?"

 

"전하지 못했어요. 아마 그 오빠는, 지금도 전혀 모르고 있을 거예요. 저란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겠죠."

 

그렇게 소녀의 첫 사랑은, 슬프게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끝이 났다.

 

 

 

 

뮤지컬 배우 꿈꾸던 사투리 소녀, 베토벤처럼 주먹 꽉 쥐고

 

그러나 그녀는 이미 중학생때부터 꾸준히 자기 목소리를 가꾸고 있었다. 스스로에겐 좌절했음에도 정작 다른 이의 반응을 통해서는 자신감을 얻고 있었다.

 

"부산에서 오셨다고요? 저도 고향이 부산!"

 

"경성대였어요? 나 정보대였는데. 어쩜 사거리에서 몇번 마주쳤겠네?"

 

그녀는 놀랍게도 동향 사람이었다. 대학조차 내가 다니던 곳에서 걸어 20분 거리, 그리고 내 동생과 같은 학교다.

흔히 경상도 사투리는 고치기 어렵다고들 한다. 성우지망생으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난관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성우란 직업을 목표하지 않던 학창시절부터 이래저래 자기 수련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중학교때 방송반이었어요. 대학 들어가서는 연극 무대에 서기도 했죠."

 

"그 땐 어땠어요? 고교시절 아픈 경험 때문에 불안했을 텐데."

 

"정극 무대에 서서 소리를 내어보는데, 정작 저는 제 목소리를 몰라요. 그런데 보고 있던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니, 자신감을 얻겠더라고요. 정작 자신에겐 자신 없어하면서 말예요."

 

베토벤이 그랬다지. 귀가 어두워 연주가 어떠했는지는 듣지 못하고, 그저 기립한 청중의 눈물을 보며 결과를 알았다고. 가만, 듣고 있다 보니 내심 샘나는걸? 그런 그녀가 그 때, 사모하던 소년에게도 그런 자신을 믿고 테입을 내밀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스포트라이트처럼 플래시가 팍 터질 때, 그녀와 옆의 고양이는 재밌는 사진을 완성했다. 우아한 여인, 그리고 호기심 어린 고양이. 생기가 흐르면서도 정적인 매력은 그녀 자신과 분신을 통해 하나의 인물로 모아지면서 피쳐(포토저널리즘에서 감성적인 사진)인데도 포트레이트(인물 사진)의 그것이 보였다. 

 

 

# 2악장, 처녀 - 활기넘치는 아가씨, 서울이란 무대에 서다

 

대학은 연극영화과로 진로를 정했다. 목소리를 내는 일은 이미 그녀 맘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거다. 그러나 그 실체가 아직 무엇이라 정해지진 않았다고 한다. 졸업 후에도 막연하게 진로를 고민했다고. 1년간 아르바이트하며 지내다 다음 해를 그냥 이렇게 보내진 않겠다 결심한다.

 

"서울서 무대 공연에 서는게 꿈이었어요. 물론 그 공연이 어떤 건지도 확실히 가닥 잡히진 않았고 막연하게 '그런 일'을 하며 살고자 바랬죠. 그런데 막상 집에선 응원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무작정 상경했어요. 딱 1년만, 1년만 해보겠노라 부모님께 약속했죠."

 

"약속?"

 

"서울서 1년만 살아보겠다고 했죠. 그 1년간 무수히 도전하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면 다시 부산에 내려와 부모님 당신들이 원하는대로 살겠다고 했어요. 직업을 가질 수도 있고, 아님 시집을 갈수도 있다고 말예요. 평소와 달리 당당하게 말했죠."

 

자칫했으면 성우계는 오늘의 잘 나가는 '고양이' 하나를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부산 어딘가에서 "우리 동네에 젊은 새댁 하나가 그렇게 노래를 잘 해"란 소문 정도만 들렸을지 모르지.

 

 

 

 

 

생각해보면 그녀의 부모님들은 어느덧 처녀로 자라난 딸에게 현실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건지 모른다. 그러나 성년이 되어서도 그녀는 소녀의 꿈을 놓지 않았다. 활기가 넘치고 대담하게 도전할 줄 알았다. 사실 성우란 직업이 매력있는 것은 늘 그러한 도전이 맺은 열매 그 자체이기 때문에. 물론, 그 때도 그녀의 해답이 성우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어떻게 그 많은 연예인 중에 성우를 의식하고 도전하게 됐죠?"

 

"약속과 함께 허락을 얻어내고 서울로 올라온 건 좋았어요. 그런데 사투리가 문제인 거예요. 지금껏 살아오며 몸에 밴 사투리를 그리 쉽게 떨쳐낼 수 있겠어요? 그래서 성우 아카데미를 찾게 된 거예요."

 

천체망원경 속에 우주를 담다 반짝이는 별 하나하나를 찾아내듯 그제서야 성우가 시야에 들어왔다. "무대 위 허공이 아닌 마이크에 외치는 성우라는 일도 있음을 알았고, 어쩜 이게 내가 바라던 일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쉽지는 않았다. 야심차게 1월1일에 올라와 고시원에서 생활을 시작했지만, 일주일만에 탈출해버렸다. 말만한 처녀를 가둬두기엔 1평 조금 넘는 고시원은 생각과 달라도 너무 다른 환경이었다. 그렇게 해서 찾은 건 서울에 와 있던 친구의 집이었다. 그야말로 어떻게 될지 각본없는 진행이었다. 1년을 채울수나 있는 걸까. 

 

 

 

 

고양이처럼 낭만적으로 스텝 바이 스텝

 

"퍼니야, 야 지금 뭐해."

 

잠깐 쉬어가자.

인터뷰 때 들어온 고양이 '퍼니'는 옆에 누워 이래저래 귀여운 불청객 짓을 한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어느샌가 고양이하면 떠올리는 성우가 되어 있었다. 최근 방영 중인 치즈스위트홈에서는 주인공 고양이 '치'로 등장했고, 케이온의 아즈사는 고양이 귀를 한 덕에 극 중에서 '아즈냥'이었는데 모 성우팬 커뮤니티에선 '현지냥'이라 부른다지. 그런데 실제로도 그녀는 고양이와 많이 닮아 있었다. 주변환경에 순응하지 않고 스스로의 목표를 쟁취하는 것도 독립적인 고양이 캐릭터와 딱 맞는다. 

 

혹시 이 고양이 친구도 그래서 이 사람을 잘 따르는 걸까. 하지만 정작 본인은 "엄마가 나 김돼지라 불러요"라고 꽃돼지과 캐릭터를 자처한다. 지난 번 주자인 최승훈 성우가 '황태자가 아니라 황태'라고 스스로를 칭하더니 졸지에 동물 릴레이가 되네. 행여나 '괜찮아요, 고양이가 원래 비만체질 동물이잖아'라고 서툰 위안(?)을 했다간 저 야옹이가 잠자다 말고 달려들었을지 모른다.

 

 

 

 

# 3악장, 마법거울같은 여자 - 운 없는 기적녀, 한달만에 "합격?"

 

성우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첫 시험 기회가 왔다. 아카데미를 다닌지, 성우가 어쩜 내 물음의 해답일지 모른다 생각한지, 친구집에 막연하게 눌러앉은지 딱 한달만이었다. 그녀에겐 첫 도전이자 '버리는 카드'라 해도 아쉬울 거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얼마만에 성우가 된거죠?"

 

"한달이요. 그 시험에 그냥 붙어버렸어요."

 

내가 머릿속에 그린 단어는 '천잰데?'이거였다. "정말 열심히 1년간 해봐야지 했는데 그냥 1달만에 된 거예요"라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내가 엄청 작아보였다. 몇년간 물만 먹는 난 대체 뭘까.

 

그녀는 말했다. "내가 작은 운은 없어서 내기를 해도 가위바위보를 해도 늘 진다"고.

 

"그런데 대회에선 운이 서요. 늘 수상을 해요. 합격을 하고요. 그게 성우시험에서도 곧장 통했어요."

 

운은 없는데 기적은 따랐다는 건가. 사투리 때문에 공부하러 들어간 성우 아카데미에서 성우공부 시작한지 어언 한달. 그렇게 그녀는 세번인가 네번인가의 짧은 수업만 받고 곧장 투니버스 6기 성우가 돼 버렸다.(?)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치 이 여자는, 거울 같았다. 매직미러. 동화 속 승승장구하는 기적의 주인공 같아서 마법이다. 그리고 꼭 나를 비추는 것 같다.

 

같아서가 아니다. 정반대라서였다. 같은 꿈을 꾸고 용기를 내어 서울로 올라와 홀로서기를 택한 것도, 살던 곳도 똑같았건만 그녀와 나의 걸어온 길은 전혀 달랐다. 그녀는 내가 꿈에서도 바라마지 않던 것을 운이 좋았다는 그 한마디로 설명해 버린다. 난 수년간, 지금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길을, 단 한번도 이루지 못한 꿈을 그녀는 한번에 이뤄버렸다. 마치 그것은 실루엣은 같아도 좌우의 상은 완전히 뒤집어 보여주는 거울처럼 대조됐다. 나의 초라함을 비추는 그녀는 한없이 화려하다.  

 

 

 

 

깨어질듯 약하면서도 강한 거울 속의 여자

 

그녀의 기적을 들여다보면 믿기지 않은 행운도 담겨 있다.

 

"3차 시험 때예요. 대기석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긴장돼죠. 그제사 아차 했어요. 3차 시험 즈음 심사위원이 '좋아하는 성우가 누구냐'고 묻는다고 들었는데, 전 미처 준비를 못했죠. 말씀 드린대로 전 성우에 대해선 거의 아는게 없이 첫 시험을 치르는 상황이었잖아요. 아는 이름이라곤 '배한성' 딱 한분이었어요."

 

그녀의 선택지는 정녕 '배한성'이란 외통수 하나였던 걸까. 

 

"그런데 긴장에 고민에 타들어가는 남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함께 대기 중이던 웬 이상한 여자(크크크크 정체는 잠시 후 공개됩니다) 둘이서 싸우듯이 혹은 사이좋은 듯이 다투는 거예요. 한 사람은 '야! 내가 실은 5기 때 붙을 수 있었는데 말야, 하필 몸살이 걸려서 그랬어. 게다가 하필이면 주자영, 정유미(두 사람은 5기에 합격한 선배들이다)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말야'라고 고래고래 소릴 지르고 또 다른 사람은 '어 그래?'하고 똑같이 질세라 외치는 거였죠. 근데 그게 행운이었어요."

 

이후에 알았지만 그 두 사람도 함께 합격하여 일생의 동지가 되니, 투니버스 6기 김보영, 안영미 성우였다. 

천운이었다. 3년 전에 입사한 성우 둘의 이름을 안 거였다. 선택지는 졸지에 셋으로 늘었다. 덕분에 맘이 편안해졌고, 그렇게 들어선 시험장에서 면접이 시작됐다. 아니나다를까, "좋아하는 성우가 누구예요?"란 질문이 들어왔다.

 

"주자영이요. 그 한마디에 고개 숙이고 필기하던 세 명의 심사위원이 동시에 반응해요. '왜?'하고 고개를 번쩍 들어 되묻는거예요."

 

그럴 법도 하다. 다른 베테랑도 아니고 3년전 본사에 입사한 바로 전 기수를 지목했으니까. 물론 그녀가 그 성우의 목소리를 알고 있을리 만무하다.

 

"하지만 분명 세상에 같은 목소리는 없으니까, 전 '나와 다른 목소리를 가진 그 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그냥 에둘렀어요."

 

도박이었지만 잭팟을 터뜨렸다. 실제로 그녀는 가녀린 소녀 음색이었고, 이름만 알고 있는 그 성우 '주자영'의 목소리는 정반대로 낮고 터프하고 허스키하기 둘째가라면 서럽다. 이만하면 행운도 반칙이다. 혹시나 영화 행운을 돌려줘의 린제이로한 같은 사람이 실존하는 건가.

 

"합격 후 이 소문을 듣고서 5기 중에서도 특히나 주자영 선배님이 절 아껴주셨어요. 어딜 가도 '현지는 내 옆으로 와!'하고 챙겨주셨는데 이제 이 소식 들으시면 절 미워하실까요?"

 

 

 

 

그렇게나 힘들다던 합격의 관문은 실력 플러스 또 하나의 실력인 행운으로 뚫어버린 그녀지만 정작 들어와선 자격지심에 시달렸다고 고백했다. 아무래도 짧은 지망 경력에 무엇보다 사투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도 전에 들어와버렸잖은가. 남들 10번 시사하면 나는 100번을 할 수 밖에 없었노라고 밝혔다. 거기다 가장 나이가 어렸다는 것도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다.

 

"그런데 신나더라고요. 내 목소리가 방송에서 나오는 첫 경험은 너무 신기했어요. 심지어는 옵티컬(원판이 있는 수입작 혹은 오래된 국내작을 새롭게 녹음할 경우 그 원판을 먼저 듣는 작업) 자체가 거슬려 아예 영상자체를 미리 통째로 외워버린 뒤 작업했어요. 그러다 보니 NG도 없었죠. 물론 모니터링하고 보면 이상하긴 했지만요."

 

첫 데뷔작은 몬스터였다. 그러고보니 바로 전 회에서 만난 최승훈, 최지훈 두 성우도 데뷔가 몬스터였지.

 

"저는 소년 2였어요. 밤새 시사했어요. 대사는 한마디인데."

 

실수로 울어버린 적도 있었다. 선배들에게 작품 대본을 전달하다가 누락자가 생겼다. 두 기수 선배인 김기흥 성우였다. 

 

"선배가 얼굴이 벌개져 '누가 그랬냐'고 혼낼 듯 물어오는데 제가 겁이 나서 '그게 아니구요'하고 얼버무리다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거예요. 사회생활도 서울생활도 사실상 처음이었잖아요. 거기다 지금껏 안 들켜오던 사투리도 마구마구 섞여서 부산말도 아니고 서울말도 아닌 이상한 어투가 막 튀어나와요."

 

"결국 어떻게 하던가요. 선배님은?"

"희한한 소리가 제 입에서 막 터져나오는 걸 보시더니 더는 화도 못 내고 웃지도 못하시고 이렇게 물으시더군요. '너, 지금 어느나라 말 하는 거니? 라고요."

 

 

 

 

감딸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대표작 하나를 꼽아달랬다. "역시 감딸기다"라는 대답이 나온다. 아이유가 오프닝을 맡아 알려지기도 한 꿈빛파티시엘의 주인공인데, 성우도 캐릭터도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둘 다 어려운 관문을 재능과 약간의 행운으로 단 1화만에 돌파하고 들어와선 대신 경험치 쌓느라 애 먹는 스토리다. 팬들 사이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 캐릭터가 아닐까.

 

오디션으로 따 낸 첫 주인공 작은 '펭귄의 문제'였다. "재미있게 한 작품"으로 본인은 기억하고 있었다. 반면 올해 초 애니맥스에서 방영됐던 '토라도라'의 미노링은 "이해가 잘 안 가 어려웠던 캐릭터"라고 말한다. 캐릭터와 교감해야 하는데 이성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번역 과정에서의 어려움으로 개연성이 엷어졌다.

 

케이온의 아즈사는 어떨까. 극 중에선 많이 울기도 한 캐릭터인데 정작 본인은 녹음 중 울거나 한 적은 없다고. 다만 시사 땐 많이 울었다고 밝힌다. 현재 출연 중인 페어리테일의 웬디는 아즈사보다도 더 여리게 캐릭터를 잡아냈다. 

 

그리고, 파닥파닥. 지난 여름 개봉된 창작 애니메이션 파닥파닥은 연예인 섭외가 대세가 되어버린 현 극장판 애니에서 정통파 성우로 승부해 관심을 모았던 작품인데 주인공인 고등어를 배정받아 주목받았었다.

 

"창작물이라 긴장도 많이 했어요. 실은 전속기간이 끝나고 얼마안된 4,5년전에 녹음했던 작품이 뒤늦게 나온 거예요. 선 녹음, 후 그림작업을 한 작품이예요."

 

"성우의 입에 그림을 맞춘 건가요? 일본에서는 자리잡았다던 그런 작업을 국내 창작물에서?"

 

"맞아요. 그러다보니 막상 시사회가 열렸을 땐 울렁증이 생길 지경이었죠. 그 때가 언젠데 언제적 실력이었는데 지금 이걸 어떻게 봐요. 사실 이후 수정 녹음을 하러 갔을 때는 '다시 처음부터 싹 녹음할 수 없겠냐'고 묻기까지 했어요. 시사하니 그 때의 내 목소리가... 공포스러웠죠."

 

 

 

 

선배에게서 물려받는 캐릭터 유독 많아 부담 백배

 

맡은 배역으로 인해 부담이 배가 되는 일이 잦다는 성우 김현지. 이상하게도 그녀는 부담스러운 배역 운도 많이 따른다. 일전에 다른 선배가 녹음하다 중간에 하차하는 캐릭터를 이어받는 빈도수가 유독 잦다.

 

"원피스에서는 박영남 선생님이 한 쵸파를 제가 이어받느라 맘 고생을 했어요. 비교될 거 아니예요. 들어보니까 박영남 선생님은 쵸파란 캐릭터를 너무 확실하게 만들어놨어요. 내가 들어설 틈이 없을 지경이예요. 그런데 저는 저대로 또 해보고 픈 무엇인가가 있죠. 그래서 따라하는 게 아니고 새롭게 캐릭터를 구축했어요. 호빵맨은 또 어떻구요. 투니버스 작품이 애니맥스로 넘어가면서 새로이 녹음이 이뤄졌는데 제가 신규로 투입됐어요. 김선혜 선배님(투니버스 4기 선배다)이 했던 짤랑이라고, 세균맨의 여자친구가 있는데 이걸 또 선배에게서 제게로 넘어온 거예요. 호빵맨의 이선주 선배님처럼 웬만한 다른 캐릭터들의 배역은 그대로 이어졌는데 아무래도 일전에 안 보이던 전 튀어 보이죠? 함께 가던 성우들이 '왜 네가 하냐?'고 하는데 부담스럽죠."

 

기존 팬들의 시선이 닿을 수 밖에 없으니 내외로 심리적 압박은 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바꿔 말하면 이것도 타고나는 행운이다.

 

 

 

 

# 4악장, 고양이 - 여전히 꿈꾸는 내일 

 

나의 관념 속에서 고양이란 동물은 언제나 낭만적이다. 듣고 있자니 그녀의 젊은 인생도 낭만고양이의 자서전이다. 꿈을 먹고 자라나던 고양이 한마리가 보장된 거 하나 없이 훌쩍 대도시로 떠나고 거기서 갖가지 우연과 운명을 만나며 하루하루가 다른 모험을 하고. 그러다 보니 아주 유명한 냥냥이가 됐다는 스타탄생의 어쩜 진부할 정도로 부러운 스토리가 아닌가.

 

행운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데, 투니버스에 입사한 것도 행운이라는 게 그녀다. "투니가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아마 두려웠을 것이다"라고 투니버스 6기가 된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보영언니, 영미언니 덕을 본 것도 그렇고 그걸로 지금은 연락이 닿질 않는 자영언니와 각별하게 된 것도 그렇고 이 극회를 만난 것이 천만다행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운이 좋은가?"

"운도 실력이예요."

 

 

 

 

앞으로 이루고 싶은 소망은 또 무엇이냐고 물었다. 성우가 되기 전 막연하게 꿈을 쫓아 서울로 왔을 때 '뮤지컬 배우'를 가장 희망했다던 그녀는 지금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해보고 싶다고 밝힌다. 사실 노래실력 때문에 파닥파닥에서도 캐스팅이 됐다고 하고, 실제로 오프닝, 엔딩곡을 부른 적도 있다. 물론 성우가 내 꿈의 해답이었다는 전제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성우로서 욕심내고 싶은 건요?"

"사실 지금도 너무 행복해요. 과한 배역을 얻기도 했고. 그런데 건방지게 더 욕심내자면, 한동안은 같은 스타일의 캐릭터만 한 거 같아서 그걸 좀 넓혀보고 싶네요. 제 목소리가 어리다보니 그런가봐요. 물론 같은 성격이라 해도 저마다 다 다른 캐릭터로 연구하고 그러다보니 이젠 무슨 역을 맡아도 연기를 재밌게 즐길수 있지만요." 

 

 

 

 

"혹시 인터넷은 하세요? XX갤러리라던지, 카페라던지 다른 커뮤니티 같은."

"아뇨, 실은 제가... 인터넷 자체를 잘 몰라요. 악플이나 이런 걸로 자살하는 분도 계시고 해서. 제가 좀 무서움을 많이 타거든요."  

 

흐음, 그러면 팬이나 지망생들하고 접촉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겠네? 그러나 이미 펀보이스액터스쿨에서 수업을 하는 어엿한 선생님이시니까 지망생들에겐 만날 기회가 있겠다. 

 

인터뷰를 정리하는 시간에 사인 한장을 부탁했다. 사인하는 모습조차도 어딘지 고양이같은 매력이 살아있다.

그러고보니 뭔가 중요한 이야길 빠뜨린거 같은데?

 

 

 

 

아하, 맞다. 그거.

 

"글을 읽는 사람 중에 7년 전 본인과 꼭 닮은 예비성우들이 있을 겁니다. 뭐 저도 그 중 한 사람이지만. 부산에서, 혹은 또 다른 먼 곳에서 찾아와 서울시민이 되어 공부하는 지망생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제가 제자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어요. 나는 내가 뜻하는 결과가 이뤄지지 않으면 '지금 나는 실패한게 아니야, 그저 내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즐기고 있을 뿐이야'라고 스스로에게 주문하듯 말해요. 모호하게 들리겠지만 또 무척이나 뚜렷한 생각이죠.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커져도 그 때마다 내가 건 주문에 용기를 얻었어요. 포기할까, 포기해버릴까 하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포기는 시작된 거고 이미 포기한 거예요. 그러니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지금 이 시간은 꿈을 이루는 과정이며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즐겨 보세요."

 

그녀는 단 한번에 멋지게 꿈을 잡아낸 사람이다. 그래서 가까이 보고 있자면 그 빛이 너무 강해 도리어 나의 그림자를 선명하게 얼룩처럼 남겨 버린다. 가혹할만치 초라하게 날 비춘다. 그러나 상이 뒤바뀌었어도 결국은 같은 형상, 언젠간 그 뒤바뀐 좌우도 다시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포기하거나 스스로를 작게 느낄 시간도 없다.

 

그녀가 말한 것 처럼 이 순간을 꿈이 이뤄지는 과정이며 필요한 시간이라 믿고 즐겨 볼까. 그럼 나도 누군가의 거울이 될 수 있을까. 스스로의 모습을 직시하고 순간 그 부시시한 모습에 실망하게 하더라도 결국엔 몸매무새를 고치고 더 나은 모습으로 가꿀 수 있게 하는 그런 거울. 언젠간 저 거울속으로 나도 들어가 볼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난 대답한다. 그럴수 있다고 한번 더 믿고 싶어졌다.

 

그렇게 그녀는 내가 얻은 커다란 거울이 되었다.

 

 

 

 

 

여덟번째 주자 예고 -

"만나고 싶은 분 계세요?"

"있어요. 제 마음 속의 그 분."

 

 

 

권근택 기자 kwon@newsboy.kr